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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 작가 기자회견 - 공생의 세계 알리고 싶었다

이 책에서 알리고 싶었던 내용은 ‘공생’의 세계입니다. 모든 사람은 생존의 이유가 있습니다. 2천 년 전, 민족, 피부색, 신앙, 사고방식 등 모든 것이 다른 사람들끼리 로마 세계 안에서 더불어 살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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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2006년 12월 16일, 도쿄 상공회의소에 있었던 ‘『로마인 이야기』 완간 기념 시오노 나나미 기자회견’을 정리한 것입니다.

마지막 권(『로마 세계의 종언』)은 특별히 두꺼워 보입니다. 대략의 내용과 『로마인 이야기』의 모든 집필을 끝낸 소감을 말씀해주십시오.

총 400자 원고지 800장 분량입니다. 마지막 권은 라틴어 식으로 말하면 ‘로마 제국의 종언’이 아니라 ‘로마 세계의 종말’입니다. 내용은 세 부분으로 나뉘는데, 제1부는 서기 395년에서 410년 정도로 잡았습니다. 제2부는 410년에서 476년, 보통 말하는 서로마 제국의 멸망을 그렸습니다. (로마 제국의 역사라고 하면) 보통 여기서 끝납니다. 제국의 종말을 학문적으로 엄밀히 따지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햇수로는 476년에 종말을 맞게 되지만, 과연 그런가 하는 의문을 가지고 나는 제3부에 ‘포스트 임페리움’(post imperium)이라는 제목으로 ‘제국 이후’의 7세기까지를 그렸습니다.

지중해는 말 그대로 ‘땅속의 바다’라는 뜻입니다. 하나의 문명 속의 바다, 하나의 세계 속의 바다였습니다. 하지만 7세기쯤 되면 지중해는 땅속의 바다가 아니라 기독교와 이슬람의 경계선이 되어갑니다. 로마 세계의 수평선상에 이슬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때를 중세의 시작으로 보았습니다.

고대는 다신교 세계, 중세는 기독교와 이슬람이라는 일신교 세계입니다. 로마 제국의 종말이 아니라 문명의 종말을 그리고 싶었기에 (로마사의 범위를) 여기까지 잡았습니다. 이것이 다른 로마사와의 차이점이 아닐까요. 한국어로 출판되었을 때 이 점에 유의해서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15년에 걸친 집필을 끝내고 난) 감회는 특별히 없습니다. 그저 지금은 머리가 텅 빈 상태입니다. 너무 바빠서 감회에 젖을 틈도 없군요. 여러분이 마지막 인터뷰인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는 책의 발간을 보지 않고 이탈리아로 바로 돌아갔습니다. 물론 책을 펴내는 마지막 작업까지 모든 과정에 직접 관여했습니다. 그러니 이번은 15년치 인터뷰를 한꺼번에 받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분명한 사실 두 가지는, 내년부터는 한 해에 한 권을 꼭 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더 이상 쫓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고, 또 지난 15년간 없었던 ‘여름방학’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갈 곳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몰래 한국을 갈 수도 있겠지요(웃음).

15년간 매년 한 권씩 내겠다는 공약을 지킬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이었습니까? 독자와의 약속, 또는 작가로서의 보람, 아니면 많은 독자의 성원에 힘입었기 때문입니까?

약속을 지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로마인 이야기』를 집필하는 동안 의사는 일부러 피해 다녔습니다. 병은 밝혀져 이름이 주어지면 병이지만, 모르는 한 병이 아닐 테니까요. 만약 병으로 작업이 중단되었다 해도 독자들은 기꺼이 기다려주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혹시 중단했다면 아마 내 쪽에서 계속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모든 일이 그렇듯이 한 번 중단하면 새로 시작하는 것은 참으로 힘이 듭니다.

르네상스는 고대 부흥입니다.
그래서 나도 고대 로마로 갔습니다.


언제부터 『로마인 이야기』를 구상했습니까?

저는 첫 작품으로 르네상스 시대(『르네상스의 여인들』, 1968)를 썼어요. 르네상스는 1,000년의 중세식 사고방식으로는 문제해결이 안 된다는 시대위기에 봉착했어요. 지금은 르네상스 후로도 이미 500년이 지났지만 나아진 게 없어요. 자연히 일신교가 아닌 세계는 어떠했을까 하고 르네상스 사람이 가졌던 생각을 하게 된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역사는 문화에만 너무 치중했던 것 같아요. 난 문명을 쓰고 싶었습니다. 매일 신선한 물을 공급받는 것도 대단한 문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제대로 기능했던 시대는 어떠했을까 하는 의문을 가져보았죠. 민족·생각·습관·종교도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의 ‘대가족’처럼 살아올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었습니다. 요즘은 싸움만 되풀이하니까요. ‘팍스 로마나’의 팍스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처럼 당시는 평화로웠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평화롭지 않습니다. 국내만 한정하면 평화롭다고 볼 수 있지만 다른 나라도 평화롭지 않아서는 진정한 평화로 볼 수 없지요. 그렇다고 데모행진으로 해결될 평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15년이라는 긴 시간을 들여 이 가혹한 작업을 시작하신 동기는 무엇입니까?

르네상스물을 쓰면서, 먼저 나는 무엇을 얻었을까 하고 생각했어요. 그랬더니 어떤 책이든 3만 부는 팔릴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0년쯤 해왔으니 저도 조금은 이름이 났습니다. 이름이 나면 여기저기서 불러주게 되지요. 어쩐 일인지 나이가 들었는데도 바빠지는 겁니다. 나는 날로 바빠지는 게 왠지 품위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3만 명의 독자는 사준다는 것을 핵으로 한 가지 일에 집중하자고 생각한 것입니다.

‘르네상스’로 데뷔해 ‘로마’로 시대를 거슬러 올라간 셈인데, 집필에 대한 부담은 생각하지 않으셨습니까?

특별한 부담 같은 건 없었는데, 주위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는지 모두 반대했어요. 르네상스로 성과가 확립되었는데, 다음 곳으로 가는 것은 모험이라고. 하지만 작가의 수명을 오래 지속시킨다는 것은 어렵잖습니까? 차츰 신선미가 줄어들거든요. 약간은 교묘해지기는 하지만, 그것으로 속이는 동안 독자들은 분명히 알게 됩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노선변경이야말로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어 그전에 변경을 생각한 거예요. 또 하나는, 르네상스가 왜 일어났느냐 하면, 결국 중세가 위기에 빠졌기 때문이거든요. 그리스도교로 잘 안 된다는 것을 알고는, 그렇다면 그리스도교가 없던 시대에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하고 생각했지요. 르네상스는 고대 부흥입니다. 그렇다면 나도 고대로 가자고 생각했을 뿐이에요(웃음). 그러니까 내 속에서는 무리가 없었던 셈입니다.

선생님 내부에는 르네상스와 고대가 연계되어 있었던 셈이군요.

그리고 나는 문화로 돈을 벌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르네상스 당시에도 상당히 고액의 사례를 받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나 미켈란젤로만 하더라도, 이들과 장사를 하는 메디치 재벌의 수입에 비하면 비교도 안 됩니다. 하기야 그 후 5백 년, 이탈리아 국민을 먹여 살린 것은 르네상스 미술 쪽이지만요. 어쨌거나 이것으로 부자가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일본에서는 어느 시기에, 책이 팔리게 되자 작가도 돈을 벌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기는 했지요. 하지만 내 경우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더욱이 나는 시바 료타로와는 달리, 일본인과 썩 가깝지 않은 서양사를, 그것도 르네상스니 고대니 하는 옛날 것만 쓰고 있거든요. 소설 구도도 아니고. 이것은 곧 대하드라마가 될 수 없다는 얘깁니다. 마찬가지로 부자도 될 수 없어요(웃음). 참으로 생각은 간단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3만 명의 독자를 머리에 두고 쓴 것이지요. 만약 3만 명이 알아주지 않는다면 내가 잘못 써서 그런 거라고.

나는 ‘영감’을 믿지 않습니다.
쓸 수 있거나 없거나 반드시 정시에는 책상에 앉아 있습니다.


선생님의 첫 편집담당자인 이토 기와코 씨에게 60세가 넘은 독자가 찾아와서, “완결편을 읽고 싶은데 좀 더 빨리 간행할 수 없을까”하고 요청했다지요.

이토 기와코 씨는 1년에 한 권으로는 독자가 잊어버리니까 1년에 두 권쯤 내달라고 독자의 말을 빌려 제게 요청해왔지만, 두 권을 내다가는 내가 죽어버린다고 했지요. 그래서 1년에 한 작품으로 한 것입니다. 7월 7일이 내 생일인데, 더욱이 칠월 칠석이라 마침 독자와 1년에 한 번 만나기에 걸맞은 날 같아서, 그날에 맞춰 한 권씩 낼 참이었어요. 하지만 그것이 실현된 것은 제1권뿐이었습니다.

1992년만 그랬군요. 1993년에는 한 달이 늦었습니다.

제1권을 간행한 뒤에 인터뷰에 응하는 동안 귀국이 아주 늦어져 공부할 시간이 줄어든 까닭이지요.

취재, 조사, 집필 등 1년 작업을 어떻게 배분하셨습니까?

보통 일본에 두 번, 합치면 한 달 조금 와 있었던 셈입니다. 그 이외에는 북유럽, 이탈리아, 에스파냐, 북아프리카 등지를 돌아다니는 데 씁니다. 1월 1일은 고대 로마에서는 공화정, 제정의 구별 없이 일을 시작하는 날입니다. 그래서 저도 1월 1일은 공부를 시작하는 날입니다(웃음). 공부가 끝나고 집필에 들어가기 전, 5월쯤 2주일 정도 일본에 놀러옵니다. 그리고 로마로 돌아가서 본격적으로 집필을 시작합니다. 저는 ‘영감’이 떠오르기를 기다린다는 말은 아예 믿지 않으니까, 반드시 정시에는 책상에 앉아서 쓸 수 있거나 없거나 다섯 시간은 그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쓰는 시간은 정해져 있었습니까?

대체로 일곱 시쯤에 일어나 유럽 각국의 뉴스를 좇으며 아침을 먹어요. 저도 주부니까 전날에 쓴 접시 같은 것을 씻고 나면 아홉 시가 됩니다. 아홉 시부터 오후 두 시까지죠. 그야말로 끝이 없는 반복의 생활입니다.

1주일에 하루쯤은 휴식을 취하시는지요?

일요일이란 그리스도교의 휴일이고, 저도 로마인의 처지에 서서 쓰니까 쉽니다. 또 빨래하는 날이기도 하죠(웃음). 그래서 쉬는 시간은 좀 줄어듭니다. 하지만 집필을 시작하면 토요일, 일요일도 쉬지 않아요.

하루를 두 부분으로 나누는 것은 고대 로마인의 생활방식입니다. 조명이 비쌌으니까 일출과 함께 일하기 시작해서 12시에서 1시께까지 일하고, 그러고는 공중목욕장에 가거나 탁자에 둘러앉아 체스를 두거나 아니면 도서관에 갑니다. 그런 뒤 집에 돌아와서 해가 지기 전에 저녁을 먹는 것이 로마 서민의 스타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도 그렇게 했답니다(웃음). 무리를 거듭하면 절대로 계속할 수 없다는 신념을 갖고 있으니까요.

원고는 직접 손으로 쓰십니까?

손으로 씁니다. 컴퓨터 같은 것을 눈앞에 놓고, 2천 년 전 옛날로 ‘타임 터널’을 더듬어 들어간다는 것은 무리지요. 나는 부본 같은 것을 쓰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본문을 쓰기 시작합니다. 하루에 아주 많이 썼을 때가 10장(400자) 정도. 그렇지 않을 때는 5, 6장일 때도 있어요. 처음에는 기차의 출발처럼 천천히 시작합니다. 다음날 책상에 앉아 전날 쓴 것을 읽고 고쳐나가지요. 그런 뒤 그날 치를 씁니다. 이런 식으로 되풀이합니다. 그러는 동안 원고는 완성됩니다. 이토 기와코 씨가 담당하던 첫 다섯 권쯤은, 원고를 완성하고 나서 다시 한 번 읽어보고 고쳐서 보냈지요.

그러다가 그 후, 내 담당이 5년마다 바뀌었는데, 나머지 두 사람은 도쿄 제대 서양사학과 출신이어서 처음부터 다시 읽는 것을 그만뒀습니다. 초고 그대로 보내는 거죠. 그러고는 워드프로세서로 입력해 책이 될 만한 형태로 찍어달라고 합니다. 그러면 교정지가 다시 돌아옵니다. 원고가 올 동안, 저는 어떤 지도를 넣을 것인가, 어디에 어떤 사람의 얼굴이 필요한가 등을 고민해 자료를 모으기 시작합니다. 워드프로세서 원고가 돌아오면 그것을 보고 장(章), 표제, 소표제를 정합니다. 원고는 여기서 완성이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것을 다시 보냅니다. 신초샤에서는 그것을 기초로 교정쇄를 만듭니다. 그것이 언제쯤 되는지 의논해서 제가 일본으로 가게 됩니다. 그러면 호텔에 교정쇄가 도착해 있고, 사흘쯤 걸려서 다시 읽어봅니다.

그걸 가지고 신초샤에 가서, 그림은 어떤 것으로 선택할까 하는 등의 편집 작업을 합니다. 표지도 이번에는 이런 식으로 가고 싶다고 말하면, 장정 전문가가 제작할 수 있다든가 아니라든가 여러 가지 도움말을 줍니다. 그래도 어김없는 내 작품이라고 생각하고 있지요. 내 경우는 원고를 넘겨주는 것만으로는 얘기가 끝나지 않습니다. 어떤 지도가 필요한가, 여기서 이 사나이의 얼굴을 소개하고 싶다, 그렇다면 영국박물관에 있는 조상이 좋을까 아니면 로마의 국립박물관에 있는 것이 좋을까 등등, 편집자와 의논하면서 만듭니다.

참고문헌에 라틴어 원서가 많은데 그 공부는 어떻게 하셨나요?

집필에 꼭 필요한 공부니 했을 뿐입니다. 맨 처음 라틴어를 접한 것은 고등학교 때입니다. 하지만 이미 이탈리아어를 알고 있어서 비교적 배우기 쉬웠습니다. 이탈리아어는 (언어계통적으로) 라틴어의 장남에 해당하니까요.

나는 역사가 재미있습니다.
역사가 싫다는 것은 인간이 싫고 인간에 어둡다는 말입니다.


사와키 고타로 씨가 『체사레 보르자 혹은 우아한 냉혹』의 문고판 해설에서, 시오노 선생이 하시는 일이 “역사도 아니고 전기도 아니고 소설도 아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모든 것이다”라고 했는데, 시오노 선생은 단순한 작가라는 호칭만으로도 부족하고, 역사가라는 것만으로도 안 되고 해서 어떤 호칭이 좋을까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작가라는 것은, 나는 문장으로 표현한다는 의미로 보고 있어요. 유럽에서는 지금도 그래요. 마키아벨리도 작가입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도 『갈리아 전쟁기』로 말하면 분명히 작가지요. 하지만 이른바 소설, 픽션은 다릅니다.

학자나 연구자라면 자료가 없으면 절대로 단정하지 않는지 모르지만, 선생님은 이 책에서 ‘우리는 상상을 할 수는 있는’ 특권이 있다고 말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일 것이다”라고 쓰시고는 “~이다”라고 단정하지 않으시면서 금욕적으로 표현하고 계시죠.

좀 교활한 거죠 뭐(웃음). 하지만 연구자는 실증주의에 입각해야 한다고, 일전에 가스야 가즈키 씨가 말씀하셨어요. 내 것은 실증이 아닙니까 하고 물었더니, 그가 생각하는 실증주의란, 요컨대 사물이 있으면 거기에 믿음을 두는 것이랍니다. 그런데 사물이라는 것은 많은 사물 가운데 우연히 남은 하나에 지나지 않지요. 이 사물 하나로 다른 많은 사물이 상실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니 확실히 상실되고 있어요. 그렇다면 하나만을 존중하는 것을 정말로 실증주의라고 할 수 있을까 하고 나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고고학이 좋은 예로, 여기를 팠으니까 이런 것이 나왔지 그 옆을 파면 다른 것이 나올지도 모르잖아요.

사실은 전체적으로 해야 하는데, 부분적인 것으로는….

말하자면 학자는 사실(史實)이라는 것을 지나치게 믿는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학자와 작가의 차이가 뭔가 하면, 학자는 너무 믿고 작가와 소설가는 너무 안 믿는다는 것입니다. 자료가 없으니까 판타지를 쓰는 거죠. 『로마인 이야기』의 경우, 나는 쓰는 동안은 오현제 시대의 로마인은 자기들의 제국이 끝난다고는 생각지도 않았으니까, 나도 생각지 않기로 했어요. 그리고 마지막 권 표지에 처음으로 유적 사진을 사용했습니다. 그때까지 내게 로마의 수도(水道)는 정확히 기능을 하여 물이 흐르는 수도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유적 사진을 일절 쓰지 않았습니다. 지금 사용한 것은 간신히 나의 유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로마 역사서에는 유적 사진이 가득 들어 있지만, 절대로 쓰지 않았어요. 콜로세움도 복원된 상태의 모형사진을 썼을 뿐입니다. 그래서 로마인과 함께 산다는 느낌이 들었지요.


선생님의 작품이 폭넓은 독자에게 좋은 반응을 얻는 이유는 ‘위대한 교훈과 오락으로서의 역사’ 때문이라고 봅니다. 역사의 오락성에 대해 한마디 해주신다면.

역사가 싫다는 사람이 있다면 난 그런 말 하지 말라고 충고하고 싶어요. 역사가 싫다는 것은 인간이 싫고 인간에 어둡다는 말과 같습니다. 잘 읽으면 역사는 재미있습니다. 학자들은 재미있다고 하면 권위가 떨어지니까 재미있다고 보려는 자세 자체도 거부해서 학술서가 재미없는 것이 아닐까요. 작가인 내가 역사를 쓰면서도 재미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독자들도 재미있게 느낀다고 봅니다.

로마인의 위대함으로, 흔히 유능한 지도자, 로마인의 개방성, 인프라 구축, 노블레스 오블리주 등을 듭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점을 든다면?

로마인은 자기네들이 모든 것을 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다른 민족이 더 뛰어난 분야가 있으면 그들에게 기꺼이 맡겼습니다. 일본은, 역사 자체가 개방하고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조금 깨우치는 것 같습니다. 좀 더 나은 생활을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지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그와 관련하여 일본은 한국과는 독도문제, 북한과는 납치문제, 중국과는 과거사문제 등의 현안이 있습니다. 이웃나라와의 문제에 대한 해법은?

원래 이웃나라와 잘 되기는 어렵습니다. 심한 표현일는지 모르지만, 전쟁만 일어나지 않아도 잘 되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역사 사실’은 공유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역사 인식’은 다른 쪽에서 보면 달리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달리 보이는 인식을 하나로 하려는 의도가 무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해법이라면 서로 인식을 한번 바꿔보는 것입니다. 한국이 보는 독도와 일본이 보는 다케시마에 대한 인식을 서로 바꿔보면 어느 부분은 공감할 만한 곳이 있을 것이고, 그리되면 서로 사고방식을 이해해갈 수 있을 것입니다. 같은 맥락으로 로마사를 예로 들면, 나는 일본인이고 특정 종교가 없으니 내 로마사는 비유럽인 비기독교인에 의한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기독교도의 유럽인이 쓴 로마사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내 로마사를 영어 번역본으로 내고 싶은 바람은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까지와 다른 로마사를 대다수 기독교도인 유럽인이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 생각을 접할 수 있지 않을까요. 단 하나의 시각밖에 없다면 사고의 강요나 다름없습니다.

제1권 머리말에서 “왜 로마인만이”라는 말씀을 하시고, 제15권 마지막에서 로마인을 “알았다”고 쓰시고, 독자도 “알았다”고 생각해준다면 더한 기쁨은 없다고 쓰고 계시는데, 마지막은 독자로서 여러 가지 질문을 받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1권에서는 로마인의 개방성, 다신교로 상징되는 종교에 대한 관용성 등이 지적되고 있습니다. 로마인이라는 것은 체력, 경제력 등 여러 가지 면에서 다른 민족에 미치지 못했는데도 오랫동안 제국으로서 군림한 시대가 있었고, 더욱이 천이백 년 가운데 이백 년은 전혀 전쟁을 하지 않은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지배한 나라의 사람을 교묘히 자기 쪽으로 끌어당겨 로마 시민으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이 로마를 흥륭시킨 제일가는 포인트인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 ‘언저리’쯤의 얘기를 나는 좋아했어요. 지금은 종교적으로는 점점 더 불관용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고, 2천 년이나 지났으면서도 다른 사람과 함께 살면서 생기는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더욱 서툴게 만들고 있거든요. 그런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나는 독자에게 일찍이 이런 문명이 있었다, 부디 생각해주세요 하고 말씀드리게 된 겁니다. 독자들에게 생각하기를 요구한다면 책은 팔리지 않아요(웃음). 해결책은 주어져 있지도 않고요.

로마인들에게 그리스도교는 무엇이 득이었을까.
내게 그리스도교는 적이 아니라 관찰이 대상입니다.


일신교에 대해서 심정적으로 싫어하는 감정을 갖고 계시는 것처럼 느꼈습니다.

1천 년의 그리스도교 지배 뒤에 르네상스가 오고, 계몽주의 시대가 오고, 그 뒤에 종교는 개인의 것이니까 공적으로 다룰 때는 그것을 제외하자는 정교분리가 유럽에선 주류가 되어 있는 셈이지요. 이슬람 쪽에는 아직도 그런 것이 없어서, 우리는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일본인은 종교 하면 일신교라고 생각하고, 자기들은 뭇 신들을 모시고 있다면서 열등감을 느끼고 있어요.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요. 일찍이 서양도 고대라는 것은 다신교 세계로 이런 세계가 있었던 겁니다. 특이했던 것이 유대교인데, 일본인이 아는 서양이라는 것은 북유럽, 서유럽이지요. 우리가 개국을 했을 때는 세계의 주도권이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옮겨가 있었기 때문에, 지중해 세계라는 것이 일본인의 머리에는 좀처럼 잘 들어오지 않는가 봐요.

로마의 황제는 종신 대통령 같은 것이기는 했어도 세습제는 아니었어요.

세습제에 대해서 로마인은 줄곧 수상쩍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것을 없앤 것이 콘스탄티누스 대제인데, 현재의 황제에게 로마 시민권을 가진 유권자들은 권력의 행사를 위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황제의 아들에게 위탁한 적은 없었어요. 그리스도교에서는 현재의 황제는 인간이 아니라 신이 권력의 행사를 위탁한 것이 되기 때문에, 인간이 아무리 반대해봐야 아무 상관도 없는 셈입니다. 상관없는 존재로 모셔 올려지면, 신이 행사를 위탁한 사람의 아들은 피의 연계가 있으니까 위탁의 계열에 들어오게 되지요. 그러니까 세습제를 확립하는 데는 그리스도교가 대단히 큰 힘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권력을 신이 부여한다는 주권의 신수설(神授說)이 그것이지요.

내가 일신교에 대해서 호감을 느끼지 않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은 노예를 포함해서 모두 평등하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그들이 믿는 신 앞에서의 평등이었지 믿는 신이 다르면 평등이 아닙니다. 그래서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극언을 한다면, 일신교는 여러 악의 근원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만이 옳다는 것은 아무래도 찬동할 수 없어요. 다른 사람이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로마인 이야기』는 내가 생각하는 방법으로 로마를 보고 쓴 것입니다. 앞에서 말했지만, 로마 세계가 흥륭하고, 안정되고, 끝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니까 공유할 수 있지요. 하지만 역사 인식이라는 것은 어떻게 보느냐 하는 문제니까 공유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내 견해에 반대한다면, 그 사람의 견해로 쓰면 되고, 그러는 편이 독자로서는 선택의 가짓수가 많아서 좋습니다.

초기 로마의 다신교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뭇 신의 나라 일본인이 좀 용이한 면이 있을까요.

사실을 말하면, 로마의 다신교와 일본의 다신교는 질이 다릅니다. 일본은 일본 안에서 신들이 자기번식을 해서 뭇 신이 된 겁니다. 로마는 타민족을 정복하면 그 타민족이 믿는 신도 따라오게 되는 셈이지요. 그쪽 역사학자의 말투로 말하면, 패자에게 시민권을 주는 것이니 패자가 믿은 신들에게도 시민권을 준다는 겁니다. 그래도 하나밖에 진리가 없다는 처지가 아니라는 점에서는 일본인이 더 알기 쉬울까요.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그 자신이 그리스도교도이자 계몽주의 시대의 사람인데도 그리스도교를 비난·비판하는데, 그런 생각은 잘못된 것이었다는 겁니다. 그러나 나는 로마인은 어째서 그리스도교도가 되었고, 되어서 무엇이 좋았는가, 무엇이 로마인으로 하여금 그리스도교로 달려가게 했는가를 생각했어요. 내게 그리스도교는 적이 아닙니다. 관찰의 대상이지요. 나는 유대교도도 아니고, 그리스도교도도 아니며, 굳이 어느 쪽인가 하면 다신교입니다(웃음).

그리스도교를 인정하지 않았던 로마인이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삼게 되는 과정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계시는데, 그것은 비판이라기보다 사실을 서술한 것이지요?

기번은 그리스도교도이고 나는 그리스도교도가 아닙니다. 그는 로마인이 그리스도교도 쪽으로 기울어진 방식에 종교적인 무언가를 구하고 있어요, 즉 정신적인 무언가를. 하지만 나는 무엇이 득이었을까 하는 데까지 떨어뜨려서 생각했어요. 기번은 절대로 떨어뜨리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교도라면 그렇겠지요.

기번이 『로마제국 쇠망사』를 발표한 시점에서, 로마 황제에 의해 살해된 그리스도교도의 숫자보다 그리스도교도끼리의 이단 소탕으로 살해된 그리스도교도가 더 많다고 말했기 때문에, 아무리 계몽주의 시대라 하더라도 모두가 그리스도교도니까 그것으로 당한 것이지요. 그러나 나는 그게 옳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왜 이교도끼리보다 이단에 대해서 더 증오를 느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성 안토니오의 수기를 읽어보니, 로마 황제가 그리스도교도를 탄압하려 하고 있는 시대인데도, 그의 증오는 로마 황제를 향하지 않고 자기편인 이단으로 향하고 있더군요. 이 증오감, 이 근친증오가 왜 일어나는가 생각해보니, 아마도 이교도라는 것은 참된 그리스도교도 쪽에서 보면 참된 가르침을 아직 모르는 불행한 사람들, 그러니까 설득할 여지가 있다고 보는 겁니다. 그러나 이단은 같은 그리스도교도지만 믿는 방법이 잘못되어 있다, 그러니까 고칠 여지가 적다고 생각한 모양이지요. 나는 지나치도록 노골적으로 떨어뜨려서 생각하니까, 아마도 그리스도교도인 구미의 연구자들은 그렇게 하지 않을 것 같아요.

다신교라는 것은 남의 신을 인정하고 남의 존재를 인정하는 일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데, 이건 종교론을 초월한 인간의 존재론으로 받아들였습니다만.

그건 어떤 연구자도 아무 데서도 쓰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다만 실제로는 로마의 일곱 언덕 중에서 신들의 주거지라 일컬어지는 곳은 캄피돌리오 언덕인데, 거기에는 로마인의 주신이라는 유피테르와 유노와 아테네를 위한 신전이 있고, 다른 데도 여러 신을 위한 신전이 있어요. 말하자면, 시리아에 와서 로마가 시민권을 준 신, 카르타고와 전쟁을 해서 이긴 카르타고의 신들, 여러 가지가 있지요. 나는 이것을 로마의 교묘한 지배 논리였다고 생각합니다.

로마의 쇠퇴 요인도 이 책 속에 씌어 있는데, 로마인이 갖고 있던 개방성은 로마 제국 말기에는 상실되어간 것입니까?

후반의 다섯 권쯤을 썼을 때, 경제라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인간은 먹을 수 없게 되면 마음도 가난해진다, 그렇다면 먹을 수 없게 된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야만족이 침입해서 안전을 보장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었어요. 학문적으로는 연구할 가치도 없는 그런 것이 의외로 중요하니까, 정치가는 그걸 실현하면 되는 겁니다. ‘아름다운 나라’라는 것은 개인적으로 자기에게 어떤 나라가 아름다운가가 중요한 문제지, 정치가 하는 것이 아니지요. 정치는 사람들이 자기 나라가 불현듯 아름답다고 여겨지는, 그런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있게 하는 데 필요한 인프라라든가, 국토의 안전이라든가, 경제의 번영 같은 것을 마련해주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도 역사 연구자로 하여금 말하게 한다면, 논평의 주제도 되지 않는 보통 일입니다. 그 보통의 일을 했기에 로마인은 대단했다고 생각합니다.

보통이자 현실적이었다는 말씀이군요.

철학에서 그리스인은 훌륭한 일을 했지만, 보통 일을 말끔하게 한다는 점에서는 어떨는지. 로마법이라는 것은 로마인의 ‘정신의 결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주체가 그리스도교도로 바뀐 뒤에도 사용할 수 있는 법을 만들었으니까요. 법은 종교의 구별이 없고, 사람들이 함께 살기 위한 룰에 지나지 않는 거지요.

법률이라면, 같은 생각을 하지 않더라도 논리와 규칙으로 서로 알 수 있지만, 종교의 가르침은 믿지 않으면 통하지 않는 것이니까, 법률이 훨씬 보편적이라는 느낌이 드는데요.

그렇게 생각해요. 종교라는 것은 그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관계없는 일이고, 그리스 철학도 적당한 머리의 수준이 필요하지요(웃음). 그러나 로마의 법률은 누구에게도 완력으로 결판을 내지 않습니다. 그래서 로마인은 법률이라는 참으로 보통의 일을 했어요. 보통이라는 것은, 학자들에게는 경시를 당하지요. 나는 내가 보통 인간이라서(웃음), 그게 쓰고 싶었던 거예요.

이라크 전쟁도 현대의 종교전쟁 같은 면이 있어서, 로마 초기의 다신교적 관용성이 있는 사고방식은, 지금의 시대에야말로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스도교 세계는 일신교지만, 다른 종교를 적대시하지 않는다는 데까지는 가 있습니다. 이케우치 메구미 씨에게 이슬람에도 르네상스나 계몽주의 같은 것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서양의 그리스도교도가 생각하는 그런 르네상스는 없다고 했습니다. 이슬람은 내가 마지막에 쓴 대(大)이슬람 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것이지요. 요컨대 다른 종교의 존재를 인정하는 쪽을 인정하지 않는 쪽이 부딪치는 겁니다. 옛날 다신교의 로마가 그리스도교나 일신교에 대해서, ‘당신들에게 신이 하나밖에 없다면 그건 그것대로 괜찮아’ 하고 말한 데 대해서, 그리스도교도는 다신교도 쪽에 대해서 ‘당신들 자체가 틀렸어, 우리가 옳아’라고 말했습니다. 그걸 지금 되풀이하고 있는 셈이죠. 세상이 조용하면 그렇지가 않고, 저마다 이치가 있는 법이니까, 이치는 역시 조금 시간을 들여서 이해해야 합니다. 유감스럽게도 자기가 옳다고 믿는 목소리가 큰 쪽이 강한 거예요.

리더는 남을 생각해야 합니다.
사리사욕으로 제 배를 채워서는 안 됩니다.


위기를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번영과 쇠퇴가 옵니다. 어떤 경우에 성쇠가 나뉘는지요?

어느 정도는 정신적인 면이 영향을 끼친다고 봅니다. 아직 기력이 있을 때 위기가 온다면 이걸로 끝낼 수는 없다는 기개로 위기를 극복해낼 것이요, 그럼으로써 재차 흥륭할 수 있을 것입니다. 스스로에 대한 긍지가 있다면 재기 가능할 것이요, 그 긍지가 없다면 다시 못 일어날 것입니다. 가장 좋지 않은 예는 눈앞의 이익에 사로잡혀 수단이 목적이 되는 경우입니다. 이런 경우는 의외로 많습니다. 흥륭했지만 금방 없어진 나라들이 얼마나 많은가요. 구체적인 예를 들어, 아테네와 피렌체는 충분한 힘이 남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외부에 적을 두고도 내부 갈등에 너무 힘을 소모했지요. 작은 문제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큰 문제를 소홀히 하는 바람에 나라가 넘어간 것입니다. 요즘 일본의 좁은 의미의 내셔널리즘 또한 그 나쁜 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유능한 지도자와 국가의 흥망에 대한 비례관계는 어떻습니까?

마키아벨리는 리더의 세 가지 요건으로 역량, 운, 시대와의 부합성을 들었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역량을 지녔다 해도 시대가 쇠퇴해갈 무렵이라면 제 힘을 발휘하기 어렵습니다. 그 미움 받던 네로도 외교정책과 금융정책은 성공했어요. 그것은 로마가 흥륭기라서 가능했습니다. 개인의 능력만 뛰어난다면 지도자로서 어떻게 되리라는 낙관적인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같은 재능을 가지고도 주어진 여건에 의해 결과가 달라지니까요. 그래서 역사가 재미있는 것이지만.

책 속에 탁월한 지도자(리더)의 바람직한 상에 대해 많은 부분을 서술하였습니다.

보통 사람은 개인의 이익을 위해 행동합니다. 하지만 리더는 남을 생각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일개 개인이 자신의 생활향상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하지만 리더는 조직 구성원의 이익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조직 전체가 풍요해져야 하며 사리사욕으로 제 배를 채워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이상형이니 실제로는 참 힘든 일이지요.

유럽 여행을 하다 보면 베르사유 궁전 같은 굉장한 건물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로마의 대형 유적은 모두 공공의 편리와 이익을 위해 지은 것입니다. 리더가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남이 리더에게 힘을 위탁했다는 말이며 기회를 주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로마의 리더들은 자기를 뽑아주고 기회를 주어 성과를 남길 수 있게 된 것에 대한 보답으로 신전, 회당, 포룸 같은 공공건물을 기증했습니다.

로마인조차도 피라미드가 대단하다고 했지만 그것은 단 한 사람의 사후를 위한 것이라며 (피라미드를 본 이후에도) 로마인은 살아 있는 많은 사람이 공유할 수 있는 것을 건설하는 데 더욱 힘을 쏟았습니다.

나는 베네치아의 통사도 썼습니다. 그 민족도 개인보다 공공이 우선된 나라였습니다. 그 점에서 로마와 비슷합니다. 그런 민족을 좋아하는 것이 내 취향인가 봅니다.

15년간의 대장정을 끝낸 지금, 독자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일본인에게도 한국인에게도 같은 말을 드리고자 합니다. 즉 독자로서 차별을 두고 있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 책에서 알리고 싶었던 내용은 ‘공생’의 세계입니다. 모든 사람은 생존의 이유가 있습니다. 2천 년 전, 민족, 피부색, 신앙, 사고방식 등 모든 것이 다른 사람들끼리 로마 세계 안에서 더불어 살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서로 존재를 인정하는 관용의 세계를 그리고자 했지요. 난 여러 문제에 대해서 해결법을 주고 있지 않습니다. 내 책이 최고라고 말한 적도 없습니다. 그저 옛날에 이런 민족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했을 뿐입니다. 그다음은 여러분 스스로 생각해주시길 바랍니다. 제 독자는 머리가 좋은 사람들일 것입니다. 한국에서 그렇게나 많이 읽히고 있다니 한국인의 지력을 신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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