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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번역자의 말 - 『로마인 이야기』와 함께한 행복한 세월

마침내 끝났습니다. 처음 출발할 때만 해도, 끝이 보이기는커녕 그 끝이 있기나 한 것일까, 그곳에 정말 갈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과 걱정이 앞서기도 했던, 그 멀고 오랜 길이 이제는 다 끝나고,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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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끝났습니다.

처음 출발할 때만 해도, 끝이 보이기는커녕 그 끝이 있기나 한 것일까, 그곳에 정말 갈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과 걱정이 앞서기도 했던, 그 멀고 오랜 길이 이제는 다 끝나고,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한 것입니다.

15년에 걸친 대장정의 고난과 성취, 그 빛나는 영광은 물론 저자인 시오노 나나미 선생의 몫입니다. 나는 그저 책이 나올 때마다 한 달 남짓 번역에 매달리면서, 선생이 닦아놓은 길을 따라 고대 로마 세계를 돌아다니곤 했는데, 그 시공을 넘나든 여행을 마친 기분을 표현하자면, ‘임페라토르’ 카이사르를 따라 갈리아 전선을 누비고 다니다가 전쟁이 끝난 뒤 어느 시골에 정착한 로마 병사의 기분이 이런 게 아니었을까 싶기도 합니다.

이럴 때, 흔히 ‘시원섭섭하다’고 말합니다. 그 오랜 작업에 보람도 있고 미련도 남아 있겠지만, 이제는 그 고달픔을 훌훌 털어버리고 싶을 테니까요. 나도 그런가 하고, 내 속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로마인 이야기』와 함께한 세월이 언제나 신났고, 그래서 행복했습니다.

돌이켜보면, 『로마인 이야기』와는 첫 만남부터가 운명적이었습니다. 1995년 봄에 한길사에서는 ‘시오노 나나미 저작집’을 준비하면서 세 사람에게 검토를 요청했습니다. 오정환 선생과 정도영 선생 그리고 나. 당시 시오노 나나미는 우리나라에 생소한 이름이었고, ‘일본의 여류 아마추어 저술가’에 대한 출판계 일각의 회의적인 견해도 없지 않았던 모양이지만, 검토자들은 그의 책이 아주 재미있으며, 출판해볼 만하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이런 평가에 책임을 지듯 책을 하나씩 맡아 번역하게 되었는데, 오정환 선생은 마키아벨리(『나의 친구 마키아벨리』)를, 정도영 선생은 베네치아(『바다의 도시 이야기』)를 맡았고, 내가 로마를 맡게 된 것은 순전히 젊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15년 작업을 수행하려면 그만큼 젊어야 하니까). 그렇게 해서 『로마인 이야기』와 관계를 맺게 된 것인데, 그것은 실로 행운이었고, 그 인연을 나는 고맙고 소중하게 여깁니다.

나는 책에도 나름의 유전(流轉)이 있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책은 그렇게 자신의 바퀴를 굴리며 팔자를 만들어가는 것이지요. 저자의 품에서 태어나 편집자의 손에서 행색을 갖추어도, 독자의 보살핌이 없으면 책은 성장을 멈추고 맙니다. 심한 경우, 태어나자마자 죽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독자들-1995년 가을 시독회(試讀會)를 가졌을 때 참석하여 좋은 의견을 내준 독자들부터, 책이 나오고 나면 벌써 다음 책이 언제 나오느냐고 성화(?)를 부렸던 열성 독자들까지-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독자 중에는 역자인 나에게 직접 성원과 질책을 주신 분들도 있습니다. 첫 권이 나온 직후인데, 어느 나이 지긋한 독자께서는 전화로, ‘로마인’이 아니라 ‘로마 사람’이라고 해야 우리말 어법에 맞다고 지적해주었습니다. 일면 수긍을 하면서, 책 제목이기에 어쩔 수 없는 사정을 설명해 드렸지만, 『로마인 이야기』 번역을 마칠 때까지 내내 그분의 매서운 가르침을 가슴에 담아둔 채, 우리말다운 번역이 되도록 늘 조심하고 노력했습니다.

『로마인 이야기』는 햇수와 권수를 더해갈수록 독자의 폭과 층이 넓어지고 깊어졌지만, 처음엔 일반 독자보다 재계 쪽에서 많은 관심을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은 아마 천 년 제국을 경영했던 로마인의 지혜가 당시 우리나라에 구호처럼 던져진 ‘세계화’ 담론에 단서를 제공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컨대, 어느 기업체 사장은 역자와 발행인을 근사한 식당에 초대하여 『로마인 이야기』의 번역 출간을 기뻐해 주었는데, 보이든 보이지 않든 이런 격려와 성원은 번역에 최선을 다하도록 나에게 힘을 보태주었습니다.

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독후감 모집에서 수상자로 뽑힌 아이들이 한길사 회의실에 모였을 때, 그 열띤 표정이며 초롱초롱한 눈빛도 잊을 수 없습니다. 나는 그들 앞에서 심사 소감을 말한 적이 있습니다. “『로마인 이야기』를 읽은 여러분은 앞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크게 달라질 것이다. ‘우물 안 개구리’의 시야에서 벗어나 좀 더 넓고 먼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될 테니까. 이런 체험과 세계관이 얼마나 중요한 자산인지는 여러분이 대학에 들어간 뒤, 그리고 사회에 나아간 뒤에 더욱 절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같은 믿음을 지니고 있고, 이 책을 집어든 청소년 독자가 있다면 그에게도 같은 말을 해주고 싶습니다.

『로마인 이야기』는 리더십의 문제를 제기하여, 제대로 된 지도자에 목마른 독자들에게 시대적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시오노 선생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열었던 강연회도 청소년을 상대로 한 ‘지도자란 무엇인가’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로마인 이야기』가 그렇게 인기를 얻은 이유에 대해서 한 친구는, 우리도 ‘카이사르 같은 지도자’를 한 번 가져보고 싶다는 국민적 열망의 반영이 아니겠느냐고 설명하더군요. 참 그럴듯한 해석이라고 무릎을 친 적이 있는데, 리더십 문제는 이제 우리 앞에 더욱 중대하고도 피할 수 없는 현안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 책을 처음 번역하던 1995년 무렵에 나는, 번역은 조강지처 같고 창작은 애인 같다는 소리를 하면서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속으로는 창작의 어려움 때문에 소설을 그만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때 나에게 용기와 명분을 준 것이 『로마인 이야기』였습니다. 시시한 소설 쓰느니 좋은 번역을 하는 게 훨씬 뜻있고 수지맞는 사업임을 깨달았던 것이지요. 그래서 과감히 애인과 헤어지고 아내한테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 선택과 전향을 나는 지금도 다행으로 여기고, 그런 만큼 번역은 나에게 소중한 존재이기도 합니다.

보통 가을이면 나오던 원서가 제10권부터는 12월 중순에 출간되었고, 그때 책을 받아 번역에 들어가면 연말연시의 흥겨움을 즐기거나 송구영신의 기분으로 어디 여행 한 번 다녀올 여유도 없이 지내곤 했는데, 이런 고역도 이젠 끝이구나 생각하면 굴레를 벗어난 듯 가뿐한 것도 같지만, 해마다 그렇게 몸살을 앓듯 몸과 마음을 다잡으며 한해를 마감하고 새해를 맞이하곤 했던 일은 이제 독한 그리움으로 남을 것입니다.

다 알다시피 시오노 선생은 1992년에 『로마인 이야기』 제1권을 내면서, 2006년까지 해마다 한 권씩 발표하여 전 15권으로 완결 지을 예정이라고 공언한 바 있습니다. 그 책 끝에 덧붙인 ‘역자 후기’에서 나는 이렇게 썼습니다. “선생의 비장한 각오와 부단한 노고에 찬탄과 경의를 표하면서, 이 책의 번역 작업에 나 또한 끝까지 참여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옷깃을 여민다.”

강산이 한 번 변하고도 반쯤 더 변하는 동안, 50대 중반이었던 시오노 선생은 이제 칠십 고개를 넘었습니다. 완간에 즈음하여 했던 인터뷰에서 선생은, 병원에 가면 의사가 여기저기 아픈 데를 찾아내어 입원시킬까 봐 아예 병원엔 가보지도 않았다고 말했더군요. 그런 열정과 책임감 앞에 누구인들 고개가 숙여지지 않겠습니까. 선생의 노익장에 새삼 경의를 표하면서, 또한 번역 작업에 끝까지 참여할 수 있었던 행운에 감사하면서, 선생의 건강하고 행복한 노년을 축원하는 마음으로 다시금 옷깃을 여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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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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