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8년 독일 윤이상 선생 자택에서 선생과 인터뷰하고 있는 필자. |
|
“정치 이데올로기란 계절에 따라 무성하다가 낙엽이 되어 떨어지는 것이지만 민족문화란 창공처럼 푸르고 엄숙하고 영원합니다.”
1988년 10월 6일 베를린 자택으로 방문한 나에게 윤이상 선생은 말했다.
“나는 하루 한 시간도 내 조국 내 고향을 잊어본 적이 없습니다. 내 민족 성원들 속에 나는 서 있습니다. 짐승도 죽을 때 제집으로 돌아가는데, 내 조상이 살았고, 위대한 우리 조상이 우리에게 물려준 내 땅에 묻히는 것이 나의 희망입니다. 고향 땅에서 여생을 보내는 것이 나의 간절한 염원입니다.”
그 엄혹한 80년대에 나는 우리 민족의 위대한 음악가 윤이상 선생을 만날 수 있었다. 윤이상 선생과의 만남은 감동적이었고 선생의 정정한 목소리는 나의 영혼을 흔들어놓았다. 세계가 그의 음악을 연주하고 연구하는데, 막상 그의 조국에서는 연주도 되지 않고 논의하고 연구하는 것이 금기시되어 있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이럴 수 없다는 생각을 나는 하고 있었다.
윤이상 선생과 나, 각자에게 놀라운 제안을 하다
| 1988년 『윤이상 상처입은 용: 윤이상·루이제 린저의 대화』에 실린 선생의 자필편지. |
|
마침 윤이상 선생은 DMZ에서 남북이 공동으로 참여하는 음악제를 열자는 안을 내놓았다. 남과 북의 음악인들이 민족과 국토의 분단과 전쟁을 상징하는 바로 그곳에서, 음악으로 평화를 노래하자고 남과 북에 제의한 것이었다.
나는 우리 출판사가 선생의 음반을 직접 출반해보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음악전문 출판사 또는 음반회사가 그걸 하지 않으니 우리가 해보자는 것이었다. 한길사는 책을 만드는 출판사지만, 음반도 사실은 또 다른 책이라고 볼 수 있고, 또 출판사가 음반을 기획하기도 하지 않는가.
나는 10월 6일부터 11일까지 베를린에 머물면서 윤 선생을 만나 우리 출판사가 선생의 음반을 직접 만들어 한국에 소개하겠다는 말씀을 드렸고, 선생은 흔쾌히 나의 제안에 동의했다. 실은 윤 선생도 나의 이러한 제안을 매우 놀라워하셨다. 한국의 이런저런 언론이 선생의 동정을 보도했지만, 그런 보도는 선생의 생각과 행동을 늘 왜곡하곤 했다. 선생은 사실은 한국의 미디어를 믿지 않았다. 그러나 선생의 음악전집을 펴내겠다는 나의 제안은 여러 의미에서 선생님에게 하나의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날 윤이상 선생을 만나러 가는 나는 다소 긴장했다. 1956년 6월 유럽으로 유학 간 지(처음에는 프랑스로 갔다) 30년 이상이 흐른 지금 작곡가 윤이상 선생은 어떤 모습일까. 한편으로 궁금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론 걱정도 되었다. 그러나 세계의 음악가 윤이상 선생은 한국적인 편안한 할아버지였다. 베를린 숲 속에 있는 자택 문 앞에서 선생은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나를 맞아주었고, 집안의 풍경은 한국의 여느 곳과 같았다. 이웃집에 들러 즐겁게 환담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선생에겐 약간의 경상도 악센트가 남아 있었다. 선생은 나를 고향 후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젊은 시절 통영 풍경을 떠올리는 듯, 고향 이야기를 마구 쏟아냈다. 꿈꾸는 소년 같았다.
나는 윤이상 선생과의 첫 만남에서 또 다른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마침 10월 8일과 9일 베를린 필하모니홀에서는 연속으로 ‘윤이상 음악회’가 열렸는데 선생의 초대로 그 음악회에 갈 수 있었던 것이다. 선생의 음악회가 열릴 때는 주최 측이 선생을 오게 함으로써 관객의 열띤 갈채를 받게 되는데, 그날도 그러했다.
음악회가 끝난 후엔 연주자들과 회식을 했는데, 윤이상 선생은 나를 그들에게 소개했다. ‘한국에서 온 출판인인데, 나의 음악전집을 기획하려고 왔다’고. 나는 그때 윤이상 선생의 작품을 전문으로 연주하는 세계적인 오보에 연주자 하이츠 홀리거와 하프 연주자 우어줄라 홀리거 부부와 마주앉아 저녁을 같이했다.
10월 10일 나는 온종일 선생과 인터뷰하슴 기회를 얻었다. 선생은 동베를린 사건을 비롯해 가슴에 묻어두었던 여러 가지를 털어놓았다. 나는 선생의 뜨거운 예술정신과 민족애에 감동했다. 선생과의 긴 인터뷰는 나의 첫 베를린 방문의 절정이었다. (인터뷰 내용은 이어지는 2편에서 자세하게 소개한다.)
<윤이상 선집>에서 <윤이상 음악전집>으로
나의 윤이상 선생 인터뷰는 막 창간된 <한겨레신문>에 게재됐다. 윤이상 선생의 예술관·민족관에 대해서 한국신문으로서는 가장 본격적으로 소개한 기사였을 것이다. 나는 이미 우리가 펴내는 월간 <사회와 사상> 88년 10월호에 윤이상·송두율 대담으로 ‘윤이상의 예술세계와 민족관’을 게재했다. 윤이상 선생의 음반을 내야겠다는 구상을 하면서 기획된 기사였다. 베를린으로 윤이상 선생을 방문하기 직전에 발행되었는데, 송두율 교수와의 대담에서 선생은 자신의 예술과 철학을 깊이 있게 언급하였다. 이 기사는 참으로 격조 있는 대담으로, 윤이상의 예술사상을 최초이자 체계적으로 국내에 소개하는 것이었다.
처음에 나는 <윤이상 선집> 정도로 구상했다. 그러나 베를린으로 가서 선생을 뵙고는 <윤이상 음악전집>을 기획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일단 귀국했다가 1989년 2월 구정을 할애해 다시 베를린으로 갔다. 아내 박관순도 동행했다. 우리가 베를린을 방문하는 기간에 함석헌 선생님이 서거하셨다. 그래서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하고 말았다.
선생의 작품과 자료가 방대해서 본격적인 작업이 필요했다. 전문가가 진행해야 할 작품해설도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독일에 유학 중인 한정숙 씨(현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최성만 씨(현 이화여대 독문학 교수), 홍은미 씨(음악학) 등이 윤이상 선생 댁으로 모였다. 홍은미 씨는 나중에 윤이상 선생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는데, 1주일 동안 출근하는 것처럼 윤이상 선생 댁에 모여 구성을 짜고 어떤 해설을 어떻게 붙일지를 토론했다. 물론 윤이상 선생과 함께였다. 이미 발표된 ‘윤이상 연구’를 조사했다.
하루를 할애해 윤이상 선생의 사진을 정리했다. 선생은 대단한 기억력과 에너지를 갖고 계셨다. 오전 10시에 시작해서 오후 6시까지 사진을 살펴보고 사진 설명을 붙이는 작업을 진행했는데, 선생은 50장이 넘는 오래된 사진의 내용을 아주 구체적으로 기억하고 계셨고, 그 사진 설명을 척척 해내는 문장가였다.
하루는 선생의 안내로 베를린예술대학의 윤이상 아카이브를 방문했다. 전임연구자를 두어 선생의 음악에 관한 모든 연구와 자료를 집성하는 연구소였다. 윤이상 선생은 베를린예술대학 교수로 재직하다가 정년퇴임 했다. 베를린예술대학은 윤 선생의 아카이브를 설립해서 학교 차원에서 운영하는 것이다. 나는 사진을 비롯한 이런저런 자료를 갖고 귀국했다. 윤 선생이 윤이상 아카이브에서 확보해준 CD도 함께였다.
| 1972년 오페라 <심청> 초연 후 축하연에서. 왼쪽부터 다우메 올림픽 준비위원장, 윤이상, 심청을 맡은 수키스, 바이에른 주지사. |
|
윤이상 오리지널 음반 김포공항에 6개월간 억류
그러나 윤이상 선생이 확보해준 오리지널 CD 등을 김포공항에서 압수당하고 말았다. 김포공항 당국은 갖고 들어갈 수 없다는 단호한 태도였다. ‘허가’ 없이는 그 어떤 음반도 펴낼 수 없는 시대였다. 문공부에 이야기를 해보았자 소용없었다. 결국 ‘윤이상 음악’은 김포공항에 6개월 이상 유치되는 일이 벌어졌다. 그 오리지널 음반은 윤이상 선생의 운명처럼 조국에 들어오지 못하고 되돌아가야 했다. 최성만 씨가 일시 귀국했다가 독일로 돌아가는 편에 그것을 찾아서 윤이상 선생에게 돌려주었다. 민족의 위대한 음악예술가 윤이상의 작품은 6개월 동안 ‘감옥’을 살았던 셈이다.
나는 정치 또는 정치 상황과는 애초부터 무관했다. 어떻게 보면 무관심하다고나 할까. ‘공안정국’을 예측할 수 있는 정보도 없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한 출판인으로서 내고 싶은 책, 펴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책을 기획했다. 세계가 높이 평가하고 연주·연구하는 윤이상의 음악을, 다른 전문가가 소개하지 않기에 내가 나섰을 뿐이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당국은 나에 대해 ‘심각한 대책’을 준비했다고 했다. 금기시된 윤이상을 만나러 다니고 그의 사상과 예술관을 소개했으니, 공안정국을 만드는 공안당국자에게는 내가 얼마나 비위에 거슬리는 존재였겠는가.
내가 윤이상 선생을 만나 음악전집을 준비할 그때 중앙일보사는 윤이상 선생의 귀국과 윤이상음악회를 준비했다. 나는 준비해온 사진자료까지 음악회 준비를 위해 전달했다. 선생 자신도 이제는 귀국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다. 시대가 이미 ‘문민’ 쪽으로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1988년 10월에 윤이상 선생을 만나고 돌아온 나는 선생의 귀국이 실현될 것으로 보고 ‘윤이상선생 귀국준비위원회’까지 준비했다. 나는 예총의 전봉초 회장과 서울대 이강숙 교수를 만나 귀국하는 윤이상 선생을 환영하는 위원회를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를 의논드린 바 있다.
다른 한편으로 <사회와 사상> 89년 4월호에 윤이상 선생의 ‘정중동(靜中動): 나의 음악예술의 바탕’을 실어 윤이상에 대한 이해를 한층 더 도모했다. 이 글은 1985년 윤이상 선생이 튀빙겐대학 명예박사학위 수여식에서 한 강연이었다. 이 연설은 윤이상 선생의 음악관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내용이다.
정치 상황은 공안정국으로 치닫고 있었지만, 한길사의 <윤이상전집> 작업은 그대로 진행되었다. 이미 연주하고 녹음하여 수집할 수 있는 곡을 모으면 LP판 15장 정도는 된다는 계산이 나왔다. 레코드 재킷에 실을 해설과 정보를 번역하는 작업은 베를린에서 공부하는 최성만·홍은미 씨 등이 중심이 되어 진행하였다. 레코드 재킷의 그림은 판화가 이철수 씨가 시안을 제작했다. 윤이상 선생 음악에 대한 음악적 해석과 각 곡에 대한 전문가의 해설 그리고 윤이상 선생 자신의 해설을 번역하거나 새로 썼다. 자세한 연보작업도 진행하였다. 아직 국내에 윤이상의 음악이 제대로 소개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우리가 준비한 내용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귀국’도 무산, ‘음악전집’도 무산
그러나 결국 윤이상 선생의 ‘음악전집’은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윤이상 선생의 귀국도 무산되고 음악회도 더 시간이 흘러야 가능했다. 선생은 그때 귀국이 성사될 것으로 본다면서 흥분해 있었다. 통영 그 앞바다에서 낚시를 하고 싶다고도 했다. 자기가 태어난 지리산 산청의 그 마을에 가보고 싶다고 했다. 아버지가 지리산에 와서 어머니를 만났고, 그래서 그 지리산에서 태어났다고 선생은 나에게 말했다.
나는 1년 6개월 동안 출국 정지당해야 했다. 왜 출국 정지를 당해야 했는지, 아무도 그 이유를 설명해주지 않았지만, 여러 정황으로 보아 그렇게 되었다고 나는 이해한다.
우리는 결국 레코드 출판을 위해 준비한 원고를 정리해 한 권의 책으로 펴냈다. 1991년 2월 최성만·홍은미 편역으로 나온 『윤이상의 음악세계』가 그것이었다. 634쪽이나 되었다. 이 책은 윤이상 선생을 한국에 본격적으로 소개하는 최초의 문헌이 되었다. 나는 선생과의 인터뷰를 200자 원고지 80여 매로 정리해 이 책에 수록했다.
선생의 귀국은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시도되었지만 성사되지 못했다. 선생이 참석하는 음악회가 계속 시도되었지만, 한참 후에 주인공 없는 음악회를 열 수 있을 뿐이었다. 나는 선생과 전화는 가끔 했다. 선생은 한국에서 나온 책을 보내달라고도 했다. 우리 출판사가 펴낸 책을 보내드렸다. 우리 책을 보면서 고향을 더 그리워했을까.
선생의 건강은 계속 악화하였다. 일본의 한 병원에 입원해 계실 때 선생을 찾아뵈었다. 선생은 건강이 조금 회복되었을 때 배를 타고 대마도 쪽까지 왔다고 했다. 일본의 한 방송국 취재진과 동행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그 바다에서 멀리 고향 땅을 바라보았다는 것이었다.
최고의 영예를 누렸지만 참으로 고단한 생애
베를린에서 뵈었을 때 선생은 계속 고향 이야기를 했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는 말씀을 여러 번 했다. 정말 고향에 가고 싶다고 했다. 선생의 그 간절한 염원은 이뤄지지 않았고 1995년 11월 3일 이국땅 베를린에서 서거하고 말았다. 한 음악예술가로서는 최고의 영예를 누린 생애였다. 그는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상을 받았다. 그러나 조국과 민족을 사랑한 선생의 삶과 정신은 참으로 고단했다.
이제 윤이상에 대한 ‘편견’은 해소되어가고 선생의 고향 통영에서는 선생을 기리는 음악제가 해마다 열린다. 선생의 음악을 연주하는 젊은 연주자도 크게 늘어나고 있다.
나는 윤이상 선생의 예술정신과 민족 사상을 기리고자 한 출판인으로서 나름대로 여러 가지 일을 해보려 하고 있다. 2005년에는 윤신향 박사의
『윤이상: 경계선상의 음악』을 펴냈다. 앞으로도 윤이상 음악연구에 대한 책을 계속 기획하자는 생각을 하고 있다. 다른 윤이상 연구자들에게도 집필을 부탁하고 있다.
예술마을 헤이리에서 2005년에 이어 2006년에도 윤이상평화재단에서 기획한 윤이상음악회가 열렸다. 나는 지난 1994년부터 헤이리 프로젝트를 여러 장르의 문화예술인과 손잡고 진행하는데, 이 헤이리에서 윤이상 선생의 음악회가 열리게 됨은 아마도 윤이상 선생과의 그 어떤 인연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민족분단의 그 경계지대에 있는 예술마을 헤이리에서 우리는 민족이 낳은 위대한 음악예술가 윤이상의 예술사상·평화사상을 더욱 소중하게 펼치는 것이다. 문화와 예술이야말로 평화를 구현하는 힘이다. 윤이상 선생은 나에게 문화와 예술의 힘을 일깨워주고 있다.
올해는 윤이상 선생의 탄생 90주년이 되는 해다. 윤이상평화재단이 중심이 되어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지난 3월 14일에는 90주년 기념사업을 후원하는 음악회모임도 있었다. 우리에게는 세계에 내놓을 수 있는 민족의 큰 음악가 윤이상이 있다. 오늘도 선생의 정정한 말씀이 나의 귓전에 쟁쟁하다.
다음 글:
"정치가는 음악을 할 수 없지만 음악가는 정치를 할 수 있다" - 윤이상 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