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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즈에 걸린 여인을 사랑하다 - 『푸른 알약』

어느 날, 한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런데 그녀가 에이즈에 걸렸다고 고백한다면? 당신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대로 사라져버린다 해도, 당신을 비난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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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한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런데 그녀가 에이즈에 걸렸다고 고백한다면? 당신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대로 사라져버린다 해도, 당신을 비난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에이즈는 불치병이고, 콘돔 없이는 섹스를 할 수도 없다. 그녀에게 언제 죽음이 찾아올지도 모른다. 당신이 도망쳐도 전혀 비겁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푸른 알약』의 작가 프레데릭 페테르스는 도망치지 않았다. 그렇다고 에이즈와 맞서 싸우겠다는 결심을 하고 거침없이 그녀를 품에 안은 것도 아니다. 그냥 ‘처음 학교에 가던 날, 교실 문 앞에 얼어붙어 있는 어린애’가 되어버렸다. 뭐가 뭔지 정확히 모르는, 아직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미지의 세계와 직면한 어린애가 된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소년은 교실 안으로 발을 내딛는다.

페테르스는 친구의 집에서 카티란 여인을 보게 된다. 아주 인상적이고 당당하고 매력적인 여인이었다. 카티는 친구와 함께 사라지고, 몇 년간 페테르스는 그녀를 보지 못했다. 다시 제네바의 거리에서 몇 번을 스쳐 지나간 후에야 그들은 서로 마주보게 된다. 카티가 먼저 좋아한다고 고백하지만, 또 하나의 고백이 뒤를 잇는다. 자신이 에이즈 양성보균자라는 것, 아들 역시 그렇다는 것. 모든 사실을 알고도 페테르스는 도망가지 않고 동거를 시작한다. 그녀와 아들을 받아들인다.

『푸른 알약』은 사랑 이야기다. 아들이 있는 이혼녀와의 사랑 이야기는 별로 낯선 것이 아니지만, 에이즈 보균자인 여인과의 사랑 이야기는 낯설다. <너는 내 운명> 같은 영화도 있긴 하지만, 『푸른 알약』은 신파로 흐르지 않는다. 주변 사람들의 반대를 뚫고 둘만의 고결한 사랑으로 빠지는 대신, 에이즈라는 질병을 가운데 두고 사랑에 빠지는 두 사람의 일상을 보여준다. 그들에게 놓인 장벽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 놓인 가장 큰 적은 그들 내부에 있다.

카티는 언제나 죄책감과 싸워야 한다. ‘그녀는 자신을 완전히 예외적인 존재로, 말하자면 온갖 위험을 안고 있는 질병 그 자체로 보고 있었다.’ 카티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행복한 미래를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아주 사소한 것에 늘 긴장해야 한다는 것도. 섹스를 할 때는 항상 콘돔이 필요하고, 혹시라도 찢어지지 않을까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손이나 몸에 상처가 있지는 않은지, 잇몸에서 피가 나지는 않는지 등도 늘 살펴야 한다. 아들을 에이즈 보균자로 만들었다는 죄책감에, 사랑하는 이에게도 에이즈를 옮겼다는 죄책감이 더해진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다.

페테르스는 카티를 사랑한다. 그리고 ‘그저 내 지성을 믿었다. 나 스스로 이에 대한 판단과, 판단에 대한 점검을 해낼 것이라고.’ 그럼에도 그들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지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그저 카티를 사랑하기에 그녀와 함께 하루하루를 살아갈 뿐이다. 어머니에게 카티가 에이즈 보균자라는 것을 말해야 할지, 카티의 아들이 자기를 어떻게 받아들이게 해야 할지, 어떻게 섹스를 해야 하는지 등등을 생각하면서. 카티의 아들이 어떤 사춘기를 보내고 어떤 인생을 살아갈 것인지도 고민해야 하고, 찢어진 콘돔 때문에 거대한 혼돈을 맛보기도 한다. 에이즈 보균자인 카티와 살아가는 일은 결코 일상적인 시간이 아니다.

하지만 모든 것에 이해와 판단이 필요한 시간을 겪으면서 ‘난 지금 느긋하고 편안하다. 또한 내 이해력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에 관해서도 마음이 열려 있다’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에이즈를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고, 그렇다면 에이즈와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그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우리의 이해력을 넘어서는 일이다. 그냥 받아들여야 한다. ‘세상 모든 일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길 바라지 말라. 그저 되어가는 대로 받아 들’이라는 그리스의 철학자 에픽테투스의 말처럼.

단순한 사랑 이야기가 아닌 『푸른 알약』이 한없이 감동적인 이유는, 작가 자신의 경험이 절절하게 배어있기 때문이다. 매 순간 삶과 죽음에 대해, 살아가는 과정 자체에 의문을 갖고 뭔가 판단을 해야만 하는 상황을 수없이 거치면서 페테르스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아마 이 병은 자네한테 최악의 불운이자 최고의 행운이 될 거야. 가장 본질적인 것에 눈을 뜨게 해줄지도 모르지.’ 고통의 깊이만큼, 불운의 무게만큼, 그것을 헤치고 나오면 그만큼의 무엇인가를 얻게 된다. 그 깨달음을, 『푸른 알약』을 보면 얻을 수 있다.

페테르스의 자전적 만화 『푸른 알약』(2001)은 2002년 앙굴렘 세계만화축제에서 최우수작품상을 받았다. 그것은 단지 에이즈에 걸린 여인과 사랑에 빠졌다는 독특한 이야기가 아니라, 삶과 죽음을 동시에 살아갈 수밖에 없는 남녀의 갈등과 깨달음을 담고 있기에 가능한 결과였다. 담담하게 일상의 순간을 묘사하면서, 철학과 유머를 동시에 담아낸 『푸른 알약』은 만화의 영역이 얼마나 광활한지를 보여주는 걸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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