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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거리에서 울고 다니는 여자
성스러운 장소는 인간의 자비를 추방하지 않는 장소다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진행된 일들의 결과로 모든 희망이 사라져 버린 순간의 이런 어울리지 않는 깨달음은 뭘 말하는 걸까? 왜 그런 답답한 순간에 일인칭의 행동이 그렇게 중요한가?
1. 조승희의 누나는 이렇게 말했다.
“조승희는 제가 함께 자라고 사랑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제 와 생각하면 제가 그를 잘 몰랐단 생각이 듭니다….”
조승희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는 『프라하 거리에서 울고 다니는 여자』 중 난 이 문장을 좋아했다. “그를 그윽하게 바라보고 껴안고 애무했기에 그의 체온과 냄새를 느끼며 살을 대고 잠잤기에, 포만감이 극에 달해도 더욱 더해지는 욕망으로 그를 원했기에 우리는 그를, 그 타자를 누구보다도 더 잘 알았다. 연인의 몸은 우리의 비밀이요, 긍지요, 행복이다. 그 몸은 길 가는 곳마다, 네거리마다 세운 기념비다. 새겨진 비문이 끊임없이 새로워져서 눈으로만이 아니라 손가락으로 입술로 읽고 또다시 읽어도 지루한 줄 모르는 기념비인 것이다.”
실비 제르맹이 이 문장을 쓴 이유는,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살로 이뤄진 존재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였다. 사랑하는 사람의 몸을 잃어버린 사람은 무한히 왜소해지고 슬픔과 추위로 온몸이 쪼그라들고, 사랑하는 사람이 원하지 않는 존재가 되면 자신에게도 누구에게도 반갑지 않은 존재가 되어버림을 말해주려고 이 문장을 썼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의도에도 불구하고 조승희 사건이 있기 전의 이 문장은 어쩔 수 없이 달콤한 뭔가를 떠올리게 했다. 하지만 그 사건 이후 이 문장은 달콤함을 잃었다 .이제 내 눈엔 다른 문장이 보인다.
“석탄은 다 땠고 통은 비었고 삽은 아무 쓸모가 없어졌다. 난로에서는 찬바람만 일고 방엔 냉기가 가득하다. 창밖에는 나무들이 서리에 굳어져 서 있다. 하늘은 모든 기도를 거부하는 은빛 방패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나는 석탄이 필요하다. 나는 아직 얼어 죽을 수 없다. 내 등 뒤에는 무자비한 난로, 내 앞에는 그에 못지않게 무자비한 하늘. 나는 그 양자 사이를 지나서 석탄 장수에게 도움을 청해야한다. 나는 한심하게 비어있는 석탄통에 올라타고 찬바람이 휘몰아치는 허공으로 내닫는다. 나는 성서에 나오는 선지자 같은 목소리로 석탄 장수를 부른다. 그러나 석탄 장수는 가는귀가 먹었다. 그의 아내는 부르는 소리를 분명히 듣긴 들었다. 그러나 마음이 모진 그녀는 끄떡도 하지 않는다. 그녀의 눈에 보이는 것은 굶주린 주둥이처럼 쩍 벌어진 빈 통 위에 두 다리를 벌리고 걸터앉은 어떤 거지뿐이!다. 그 여자는 새나 파리를 쫓듯이 그 귀찮은 작자를 쫓아버리기 위하여 앞치마를 벗어서 털털 턴다. 여자의 앞치마에서 일어나는 바람만으로도 그는 족히 땅바닥에서 공중으로 붕 뜰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계명에 무관심한 석탄 장수 마누라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창백한 사막인 세상의 끝으로, 추위의 끝으로 그를 추방해버린 것이다. 세상엔 늘 무엇인가가 부족한 법이다. 언제나 어떤 부족함 위에 텅 빈 소리가 나는 어떤 구멍 위에 올라타고 앉게 되는 그런 순간이 있는 법이다. 그럴 때 좀 관심을 가지고 구해 달라고, 우리의 어떤 의문에 답을 좀 해 달라고, 결국은 제발 좀 측은히 여겨달라고 애걸하고자 애써 찾아간 그 사람이 아무 생각 없이 손수건을 탈탈 털거나 짜증난다는 표정으로 손을 내젓기만 해도 우리는 당장 얼음의 바다 저 끝으로 튕겨 나가버리는 것이다.”
실비 제르맹이 카프카의 단편 「석탄통에 걸터앉아」를 인용하며 쓴 글이다. 석탄통에 올라타고 앉아서 뼛속까지 피 속까지 추위를 느끼는 사람들은 바로 이런 모습으로 길바닥을 돌아다니지만 아무도 그들을 보지 못한다. 그만큼 그들은 가볍고 투명한 것이다. 그들은 존재감을 상실했다. 어쩌다 우리가 눈썹 한 번 꿈쩍하면 그들을 쫓아버릴 수 있고 그러면 그들은 휴지처럼 날아가 버린다. 버림받는 것이란 바로 그런 것이라서, 사람을 사람에게서 뿌리 뽑아 버리는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가벼워진 이유는 사람이 원래 다른 사람의 살로 만들어진 것이라서 그렇다. 부모의 몸, 형제의 몸, 아직 어렸던 시절 자신의 몸, 연인의 몸, 껴안고 애무하고 체온을 느꼈던 몸으로 이뤄져서. 버지니아의 조승희는 어떤 방식으로 자기의 살을 잃었던 것일까? 어떤 과정을 통해서 가족에게조차 잘 모르는 사람으로 명!명된 채 영원히 버지니아 하늘을 떠돌아다니는 존재로 남게 된 것인가?
2. 조승희의 누나는 또 이렇게 말했다.
“… 저희는 참기 어려운 고통을 경험하고 있는 유가족과 희생자들이 사랑했던 모든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부상당한 사람들과 이? 사건을 목격하고 경험함으로써 인생이 영원히 바뀌어버린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녀의 말 중 다른 무엇보다도 ‘인생이 영원히 바뀌어버렸다’는 말에 감정이입한다.
『프라하 거리에서 울고 다니는 여자』에는 버려진 구두 한 짝이 나온다.
“그 구두는 아직도 그것을 오랫동안 신어서 닳게 했을 발의 형태를 어렴풋하게 간직한 채 입을 딱 벌리고 있었다. 더 이상 그 어떤 것과도 짝을 이루지 못하고 그 어디에도 쓸모가 없어진 신발짝. 그러면서도 과거에 유용했었다는 표시를 고집스레 간직하고 있는 신발짝, 어떤 걸어가는 사람의 발을 감싸주고 튼튼하게 지탱해주며 땅 위에서 몸을 확고하게 떠받쳐준다는 것의 표시를, 걷고 몸무게를 감당하면서 그 몸의 운동에 참가한다는 것의 표시를. 땅 위에 사는 한 남자의 무게를, 이 세상에서의 보행을 증언하는 신발. 벌써 진흙탕 속에서 썩어가고 있는 이 구두가 가까운 어떤 사람의 것이었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는 누군가가 있을까?”
구두의 주인을 사랑했던 사람들은 언제나 구두 주인이 멈추어 버린 자리에서부터 약간 발을 절뚝거리게 된다. 그들은 살아있는 자의 세계와 사라진 자의 사이를 오가기 때문에 다리를 절게 되는 것이다. 인생이 영원히 바뀌어 버린다는 말은 영원히 한 세계에서 살 수 없게 된다는 말과도 같다. 조승희 누나 역시 다른 희생자 가족과 함께 영원히 삶이 변해버렸다. 그녀는 다리를 저는 프라하 거리의 울고 다니는 여자가 되었다.
경험하고 본 것으로 인생이 영원히 바뀌어버린 또 하나의 사람 프레모 레비는 아우슈비츠에서 살아 돌아오고 나서 『이것이 인간인가』를 쓴다. 2차 세계대전 말미에 붙잡힌 이탈리아 유대인이었던 그는 아우슈비츠에서 사람들의 한숨 같은 이야기를 듣는다.
“지금은 다 잊어버렸지만 몹시 가슴 아프고 감동적인 이야기였을 것이다.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다 그랬으니까. 수천 수백 가지 이야기, 모두 다르지만 모두 끝없이 비극적이고 마음 아픈 운명의 이야기 말이다. 밤이 되면 우리는 서로 이런 이야기를 나눈다. 노르웨이, 이탈리아, 알제리,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난 이야기들이다.”
그는 그 이야기들을 성경 이야기처럼 단순하면서도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라고 회고한다. 그 이야기들이 단순하면서도 이해할 수 없는 속성을 부여받게 된 이유는 모두 비극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전쟁과 범죄를 목격한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이야기들. 희생당한 이들의 열정, 순수, 낙천성, 웃음, 재능. 그리고 그들의 비극적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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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어느 날 하루에 한 번밖에 배급하지 않는 죽을 타러 걸어가면서 피콜로란 사람에게 단테의 『신곡』을 이야기해 준다. 이야기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그리하여 깊고 광활한 바다를 향해 나를 던졌다”라는 문장에서 깜짝 놀란다. 그가 주목한 것은 ‘나를 던졌다!’라는 주어와 동사였다. 나도 모르게 깊은 바다로 던져졌다거나, 운명이 깊은 바다로 나를 끌고 갔다가 아니라 내 스스로 나를 던졌다니. 프레모 레비는 그다음 문장을 내뱉어본다. “그 누구도 나아가지 못하도록…” 그리고는 이렇게 말한다. “나아가다. 나는 이 말이 조금 전의 그 말 -나를 던졌다- 란 말과 같다는 것을 알기 위해 이 수용소에 들어온 게 틀림없었다.”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진행된 일들의 결과로 모든 희망이 사라져 버린 순간의 이런 어울리지 않는 깨달음은 뭘 말하는 걸까? 왜 그런 답답한 순간에 일인칭의 행동이 그렇게 중요한가? 경계까지 끌려가 끝장난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경계 그 자체 말고 경계 너머를 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나는 프레모 레비의 마음을 이렇게 읽었다. 고통을 끝장내 버리는 것보다 고통에 강하게 대응하는 것이 중요한 순간이 있다고.
인생이 영원히 변해버린 사람들에게 우리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이런 거다.
“사람들에게, 유령들에게, 동물들에게, 사물에게 완전히 버림받은 사람도 심지어 혼자 말하는 사람도 오로지 혼자서만 말하는 것은 아니다.” 처음에 이 문장은 지상에서 참으로 이상하고 끔찍하고 표독스럽게 사라져버린 조승희의 몫이었지만 이젠 나는 이 문장을, 그녀의 본명보다 조승희의 누나라는 이름의 무게로 평생 살게 될 그녀의 몫으로 남겨두고 싶다.
“각자 저마다의 방식으로 삶과 작별했다. 기도하는 사람, 일부러 곤드레만드레 취하는 사람, 잔인한 욕정에 취하는 사람, 하지만 어머니들은 여행 중 먹을 음식을 밤을 새워 정성스레 준비했고 아이들을 씻기고 짐을 꾸렸다. 새벽이 되자 바람에 말리려고 널어둔 아이들의 속옷이 철조망을 온통 뒤덮었다. 기저귀, 장남감, 쿠션, 그밖에 그녀들이 기억해낸 물건들, 아이들이 늘 필요로 하는 수백 가지 자잘한 물건들도 빠지지 않았다. 여러분도 그렇게 하지 않았겠는가? 내일 여러분이 자식들과 함께 사형을 당한다고 오늘 자식들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을 것인가?”
이건 프레모레비가 아우슈비츠로 가는 기차에 올라타기 직전 날의 풍경을 묘사한 부분이다. 철조망에 걸린 채 바람에 날리는, 내일이면 죽을 아이의 기저귀, 장난감. 그것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시선, 혹은 정말로 그 물건들의 주인이 죽어 버렸을 때 그 장난감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시선. 그 시선은 한없는 연민의 시선이다.
비극적으로 인생이 변해버린 이들을 살아 움직이는 공동체로 끌어들여 다시 한 번 인간의 몸짓을 하게 하는 것. 그것도 연민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그리하여 실비 제르맹은 다시 말한다.
“그녀는 지난날의 노예들처럼, 모든 시대 모든 곳의 가난한 사람들처럼 오직 맨발로 다닐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녀가 지나가면 장소들이 모습을 바꾸면서 산 사람들과 죽은 사람들 사이의 접점이 되는 것이다. 몸은 인간들의 기억의 무게로 무거워도 발걸음은 미풍보다도 가벼운 거인 여자가 절뚝거리며 걷는 모든 장소는 성스럽다. 타자들에 대한 기억과 생각 말고는 그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고 그저 가난하고 겸손한 손님으로 지내는 한, 이 세상 어떤 하찮은 장소도 다 성스러운 곳이다.” (성스러운 장소는 인간의 자비를 추방하지 않는 장소다)
마술적 저널리즘을 꿈꾸는 라디오 피디. 세월호 유족의 목소리를 담은 팟캐스트 [416의 목소리] 시즌 1, 재난참사 가족들과 함께 만든 팟캐스트 [세상 끝의 사랑: 유족이 묻고 유족이 답하다] 등을 제작했다. 다큐멘터리 [자살률의 비밀]로 한국피디대상을 받았고, 다큐멘터리 [불안], 세월호 참사 2주기 특집 다큐멘터리 [새벽 4시의 궁전], [남겨진 이들의 선물], [조선인 전범 75년 동안의 고독] 등의 작품들이 한국방송대상 작품상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삶을 바꾸는 책 읽기』, 『사생활의 천재들』, 쌍용차 노동자의 삶을 담은 르포르타주 『그의 슬픔과 기쁨』, 『인생의 일요일들』, 『뜻밖의 좋은 일』, 『아무튼, 메모』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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