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물학자 데이비드 스즈키(David Suzuki, 1936- )는 일본계 캐나다인이다.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캐나다에서 태어나, 그는 캐나다 이주 3세다. 1941년 일본군이 미국 영토인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하자, 캐나다 당국은 덩달아 “악랄한” 전시특별법에 의거 일본계 캐나다인 2만여 명을 붙잡아 소개(疏開)한다.
그의 누나들을 포함한 스즈키네 식구도 예외가 아니었다. 검거된 그들은 각자 70파운드의 짐만 지닌 채 배에 태워져 고향 밴쿠버에서 쫓겨난다. 스즈키 가족은 한동안 이산의 아픔을 겪기도 한다. 아버지는 도로건설수용소로 “끌려가” 고속도로 건설 노동자가 되었고, 나머지 가족은 브리티시컬럼비아 내륙지방으로 보내졌다.
새로운 조국에 버림받은 것이 어린 데이비드 스즈키에게는 전화위복이 되었다. 소개된 곳에서 그는 자연과 친해지는 계기를 마련한다. 그는 3년간 수용소 주변 자연환경에 흠뻑 빠진다. 학교에 못 다닌 첫해엔 호숫가와 강과 인근 산의 숲을 젊은 탐험가인 양 돌아다닌다.
전쟁의 막바지에 스즈키 가족은 캐나다에서 계속 살기로 한다. 이후로도 그는 줄곧 자연을 벗하며 산다. “하지만 어린 소년 시절부터 자연과 하나가 될 수 있었던 브리티시컬럼비아의 야생성과 달리 전후의 체험들은 사람들이 시골까지 점령하고 있어 얼마 남지 않은 자연을 내가 찾아다녀야만 하는 곳들에서 얻은 것이었다.”
어린이 환경 책
데이비드 스즈키는 세계적 명성의 환경운동가이자 25년간 초파리를 연구한 유전학자다. 방송 진행자로도 활약했는데 그가 진행한 과학 프로그램은 캐나다 시청자의 주목을 받았다. 과학 대중화에 기여한 공로로 국제적인 상을 여러 개 받았다. 캐나다 공영 텔레비전이 뽑은 ‘캐나다 건국 이래 위대한 캐나다인 10인’ 중 한 사람이다. 그리고 책을 40여 권 썼다.
그의 책은 공저가 많다. 번역된 여섯 권 가운데 다섯 권이 2인 공저서다. 하여 스즈키는 대리집필 논란에 휘말릴 여지가 거의 없다. 책을 통해선 스즈키와 공저자의 역할이 뚜렷하게 구별되지 않는다. 다만, 편집자 캐시 밴더린든과 함께 펴낸 책 두 권은 각자 맡은 역할을 짐작케 한다. 작가이기도 한 캐시는 어린이 책에 관심이 많다. 굳이 둘의 역할을 나눈다면, 어린이 책 두 권에서 스즈키는 소프트웨어를 책임지고, 캐시는 하드웨어에 집중한 것 같다.
『우리가 바로 지구입니다』(김난령 옮김, 소금창고, 2003)는 지구의 자연을 이루는 네 가지 구성요소인 공기, 물, 흙, 불 등이 지구의 생명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설명한다. 우리 자신이 바로 공기의 일부며 물이고 흙이기도 하다는 점을 만화와 그림, 사진 같은 이미지 자료와 세계 각지의 설화를 곁들여 효과적으로 알려준다. 불은 생명력을 불어넣는 생태계의 에너지원이다.
스즈키는 어린이와 10대 청소년에게 우리가 바로 지구라는 사실을 일깨운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지구환경을 보호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어린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망설이는 친구들에겐 12살 때 ‘어린이 해방 운동’을 제창한 캐나다 소년 크레이그 킬버거를 예로 들어 부추긴다. 또한 우리의 생존은 우리가 누구인가를 기억하는 데 달렸다는 것이다.
“우리는 바로 지구의 일부, 즉 공기?물?흙?세상 에너지의 한 부분입니다. 가슴 속에 사랑이 있는 존재들, 영혼이 있는 생명체들이 모두 함께 사는 세상. 아주 가까운 곳에 우리의 이웃생물들과 더불어 사는 곳. 이곳이 바로 지구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우리 다음 세대들이 살아갈 세상에도 여전히 머물러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바로 우리 손에 달려 있습니다.”
권말의 ‘확인문제’는 책의 내용을 되짚게 하고, 몇 가지 실험을 통해서 스스로 발견하는 즐거움을 누리게 한다.
『즐거운 생태학 교실』(제인 크리수 그림, 김재석 옮김, 사계절, 2004)은
『우리가 바로 지구입니다』 권말부록의 확대판이다. 책 속의 실험은 우리 몸속에 지구와 우주가 들어 있고, 어째서 자연과 우주와 인간이 하나가 될 수밖에 없는지 확인해 준다.
전 지구적 생태위기 『우리 아이들에게 어떤 세상을 물려줄 것인가』(이한중 옮김, 나무와숲, 2007)는 저자란에 데이비드 스즈키의 이름이 들어간 번역서 6권 중에서 하나뿐인 그의 단독저서다. 이 책은 산문선집의 성격이 있다. 스즈키가 펴낸 그간의 책에서 “가장 나은 것들”과 책에 실리지 않았던 글을 모았다.
이 책을 통해 그는 자신의 삶을 더러 언급한다. “결혼에 한 번 실패했고, 애인이나 학생이나 아이들에게 관심을 쏟지 못해 그들과의 관계가 곤란해졌으며, 생활은 편협해졌다.” ‘자기만의 열정에 몰입하기’ ‘순간의 희열’ ‘내일이 없을 것처럼 일하기’ 같은 그에게 부족한 점의 태반이 생태위기를 초래한 사회 전체의 특징이라는 사실을 깨닫기도 한다.
그는 아무도 피해갈 수 없는 생태위기가 “근?현대 도시인들의 마음속에, 우리의 파괴성을 조종하는 가치와 신념에 내재되어 있다고 믿는다.” 아울러 “우리가 인간 행동의 위협에 대응하지 않는 이유의 하나가 스스로를 더 이상 자연 세계의 일부로 보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자연의 제약은 느끼지 못하면서 모든 것을 우리 맘대로 써도 된다는 끔찍한 믿음을 지녔다는 것이다. 오늘 지구의 생물권이 온통 탈이 났는데도 우리는 여전히 성장만 부르짖고 있다며 전 지구적인 경제 무한 성장론에 일침을 놓는다. “경제는 생물학적 존재인 우리가 지구의 생산력으로 살아가기에 돌아갈 수가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깨끗한 환경을 누리기 위해서는 경제가 계속 성장해야 한다는 소리를 듣는다.” 그러고는 사태의 심각성을 크게 우려한다.
“빈곤에 처한 사람들은 개발업자의 감언이설에 쉽게 놀아나곤 한다. 일자리와 전기와 텔레비전을 약속하는 달콤한 유혹에 빠져 도로와 항구 건설을 환영한다. 그들에게 숲은 돈으로 바꿀 수 있는 자원이다. 잘사는 나라의 우리 같은 사람들도 개발이라는 사이렌이 부르는 소리에 저항할 수 없었는데 훨씬 불리한 조건에서 출발한 사람들이 저항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할 수 있겠는가?”
논픽션 작가 웨인 그레이디와 함께 지은
『나무와 숲의 연대기』(로버트 베이트먼 그림, 이한중 옮김, 김영사, 2005)는 ‘더글러스-퍼’ 나무의 일대기다. 번역서의 제목이 부풀려졌다고 볼 수도 있으나 실은 그렇지 않다. 정곡을 찌른다. ‘더글러스-퍼’를 얼마든지 다른 나무로 대체할 수 있기도 하거니와, 생명체가 더불어 사는 숲에서 어느 한 종에 대한 위협은 생태계 전체에 대한 위협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이키는 다르다”누가 그러는데 내 얼굴에는 ‘운동 같은 거 안 함’이라 쓰여 있단다. 옳은 지적이다. 그런데 나는 몸을 단련하는 운동뿐만 아니라 적은 힘이나마 보태고 싶은 사회운동과도 궁합이 잘 안 맞는 것 같다. 한동안 환경운동 하는 분들을 자주 만났다. 지난해 1년 동안은 어느 환경잡지의 편집위원을 하면서 그들과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그럴수록 나는 환경운동의 국외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번은 환경잡지 편집회의에서 생각이 다른 편집위원과 감정이 실린 언쟁을 했다. 환경운동의 실상을 보는 눈이 판이했기 때문이다. 그는 희망을, 나는 절망을 보았다. 친환경운동 연구소의 연구원을 지낸 그 편집위원은 지역공동체와 협동조합운동에 적잖은 의미를 부여했지만, 나는 그 숫자가 얼마나 되느냐며 따졌다. 보잘 것 없지 않으냐고 말이다.
데이비드 스즈키는 동료 환경운동가 홀리 ?레슬과 더불어 나쁜 뉴스에 절망한 나 같은 사람에게
『굿 뉴스』(조응주 옮김, 샨티, 2006)를 들려준다. 이 책은 세계 각지에서 다양한 환경운동을 펼치는 이들에 대한 탐방기다. 두 사람은 그들에게서 희망의 싹을 본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실천사례가 그저 좋지만은 않아 보인다. 광야를 불사르기엔 약한 불씨다.
나는 데이비드 스즈키의 뒤늦은 각성이 수상쩍다. 내 짧은 상상력으론 작금의 경제활동과 지구의 자연환경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지 감이 안 잡힌다. 잔인한 방식으로 사육한 고기와 인간적인 방식으로 사육한 고기의 차이도 잘 모르겠다. 그리고 ‘지속가능성’은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도랑 치고 가재 잡는 식의 돈 되는 환경운동이 가능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이키를 친환경기업으로 부각한 것은 어리둥절하기 짝이 없다. 스즈키는 헌신적인 중간급 간부들이 나이키의 친환경정책을 주도하고 있다면서, 회사의 진로를 결정하는 이사회와 책임 소재의 불분명함을 이에 맞세운다. 게다가 그는 세계 여론의 지탄을 받은 나이키의 제3세계 노동력 착취에도 면죄부를 준다.
“나이키는 자금 대부분을 광고와 유통에 투자한다. 그리고 실제 신발제조는 다른 업체에 아웃소싱한다. 그래서 이름도 모르는 신발공장의 비인간적 노동행위가 적발되면서 나이키가 망신을 당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비참한 노동 착취 현장과 세번 같은 훌륭하고 정직한 사람들 간의 괴리가 생기는 것은 생산이나 급여에 관한 나이키의 결정방식 때문이다.”
일본 사회 소수자와의 만남“명확하진 않지만 위협이 된다고 판단되면 시민으로서의 모든 권리를 중지시킬 수 있도록 한” 2차 대전 때의 캐나다 전시특별법이 얼마나 ‘악랄한지’ 나는 잘 모른다. 하지만 20세기 전반기 일본과 일본군이 식민지와 전쟁터에서 자행한 야만적 행위보다는 덜 악랄할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소위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한 일본이 이른바 과거사에 대해 전혀 반성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일본이 2차 대전의 대가를 부당하게 치렀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다.
『강이, 나무가, 꽃이 돼 보라』(이한중 옮김, 나무와숲, 2004)에서 스즈키는 일본의 인류학자 오이와 게이보와 함께 일본 사회의 소수자를 찾아 나선다. 두 사람은 우리에게 일본 사회 소수자와의 만남을 주선한다. 두 사람이 일본의 소수민족 구성원과 평화운동?인권운동?환경운동 분야의 풀뿌리 운동가를 만나 대화를 나눈 이 책에서 오히려 나는 희망을 본다.
마루키 이리?마루키 도시 부부는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며칠 후, 히로시마의 참상을 목격한다. 이를 계기로 화가 부부는 평화를 염원하는 전쟁 벽화 작업에 몰두하는데 미국에서 열린 전시회에서 전환점을 맞는다. “일본인들이 난징 대학살을 비롯해 자기네가 저지른 끔찍한 행위에 대한 책임을 모면하기 위해 원자탄을 이용한다”라는 비판에 충격을 받은 두 사람은 벽화의 주제를 일본 바깥으로 넓힌다.
“저는 반미주의자는 아닙니다. 문제는 그들이 우리 땅에 주둔하고 있다는 사실이지요. 일본 자위대도 저에게는 똑같은 존재입니다. 사실 50년 전에 일본군이 우리에게 저지른 짓을 생각하면 자위대보다 차라리 미군이 낫다는 생각도 듭니다. 저는 미국인들보다 일본인들이 더 무섭습니다. 이곳 사람들 중 상당수가 저처럼 생각할 겁니다.”
이렇게 말하는 치바나 쇼이치는 식료품점 주인이자 보기 드문 저항 운동가다. 그는 1987년 10월 26일 고향인 오키나와 요미탄 마을에서 처음 열린 전국 규모의 소프트볼 대회 경기장에 나부끼는 일장기를 끌어내려 불태운다. 그래서 교도소 신세를 졌지만, 메가폰을 든 서글서글한 눈매의 치바나는 그런 ‘엄청난’ 일을 벌일 사람으로 전혀 안 보인다.
언론인 혼다 가쓰이치는 20세기 전반기 일본이 다른 나라를 침략하면서 저지른 만행에 관한 전문가다. 일본군은 중국 난징에서 1937년 12월 10일부터 6주에 걸쳐 20만 명을 학살한다. “혼다의 말로, 그러한 만행은 갑작스런 살인의 광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일본군이 입성하는 순간부터 시작되었다. 정부의 선전에 길들여진 사람들에게 그의 사건 묘사는 충격적이었다.” 차마 여기에 옮겨 적을 수 없을 만큼.
오이와 게이보에게는 일본 사회 소수자의 피가 흐른다. 그런데 오이와는 그의 아버지가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서른이 돼서야 알게 된다. 이 책의 7장 「일본인의 거울, 한국인」에는 ‘자이니치(재일 조선인)’ 세 사람이 등장한다. 그 중 한 분인 이인하 목사는 일본인에게 화해의 손길을 먼저 내민다.
“한인들이 일본인들에게 받은 대우를 생각하면 화가 납니다만, 인종주의자인 일본인을 보면 안됐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들은 제국주의 체제의 희생자이자, 증오와 무지를 부추기는 교육 제도의 희생자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일본을 용서하기는 아직 너무 이르다. “법을 지키지 않는 모든 한국인들을 어디 섬으로 끌고 가서 씨를 말려 버려야 한다”라는 일본 법무성 장관 야나가와 헤이스케의 섬뜩한 발언(1941)과 “한국이 일본에 주권을 넘겨줄 때 아무런 군사적 압력이 없었다”라는 전직 외무성 장관 와타나베 미치오의 망발(1995)은 본질이 같다. 한편, 우리가 일본의 파렴치함을 닮아가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자이니치’ 김신종 시인의 지적이다.
“저는 차별에는 반대합니다. 하지만 차별을 받는다고 해서 저절로 정의로운 편에 서게 된다는 사람들의 생각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저는 그런 태도를 몹시 싫어합니다. 지나친 이기주의는 막돼먹은 편견을 가진 쪽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희생자 쪽에도 있는데, 그게 훨씬 더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