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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두르지 않는다. 집중한다"

농부·철학자·시인 야마오 산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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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오 산세이(山尾三省, 1938-2001)는 농부입니다. 지금까지 번역된 그의 책 세 권은 그런 면이 여실합니다. 먼저, 야마오 산세이 책의 한국어판에 대해 뭉뚱그려 말씀드리지요. 셋 다 산문집입니다.

이번엔 제 얘기부터 하렵니다. 또 수술을 받았어요. 간단한 수술이지만 수술은 수술이지요. 지난 3년간 세 번이나 몸에 칼을 댄 셈입니다. 작년 이맘때 왼쪽 뺨의 ‘긁어 부스럼’은 메스가 아니라 레이저로 지졌지만요. 십수 년 전 포경수술을 받기도 했습니다. 사실, 이 수술은 그 필요성 여부가 논란거리입니다.

비근한 예로 ‘현대의술과 과대망상증에 관한 슬픈 이야기’인 앤드류 스컬의 『현대 정신의학 잔혹사』(전대호 옮김, 모티브북, 2007) 한국어판 감수자의 지적을 들 수 있지요. “우리나라는 유대인이 거의 없는데도 포경수술 비율이 세계 최고라는 기막힌 통계도 있다. … 이 수술에 대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이 수술의 이점이라고 알려진 성병의 예방, 성감의 향상, 파트너의 자궁경부암 예방 등은 근거가 없는 속설일 뿐이라고 한다.”

한국어판 감수자는 우리나라에서 널리 행해지는 포경수술의 배경으로 세균에 대한 두려움을 덧붙입니다. “신체의 한 부위에 머물러 있던 세균이 온몸을 돌아 다른 부위에 더 심각한 질병을 야기한다는 국소감염설은 이러한 막연한 두려움을 과학으로 포장한 것이다.” 세균을 만병의 근원으로 보는 건, 세균성 전염병의 실체를 확인한 19세기 말 상황에선 매우 자연스런 일이나, 그것을 너무 극단으로 밀어붙인 게 문제라네요.

간단한 수술이 그리 간단치만은 않았습니다. 설날 저녁, 오른쪽 아랫배에 가벼운 통증이 느껴져 만져보니 물컹한 게 잡히지 뭡니까. 이내 마음이 불안해졌습니다. 엄지와 집게손가락 사이에 들어온 멍울이 보통의 그것보다 크기가 좀 컸거든요. 연휴라 하루를 거르고 동네 내과에 갔지요. 의사는 별것 아닐 가능성이 크지만 그래도 모르니 큰 병원에서 검사를 한번 받아보라더군요. 그는 생각지 않게 내과가 아닌, 일반외과를 추천했습니다.

집에서 가까운 종합병원 외과의사의 생각도 동네 내과의사와 비슷하더군요. 그래서 이튿날 조직검사용 시료채취를 겸한 절제수술을 받기로 했습니다. 3년 전, 예닐곱 시간에 걸친 큰 수술을 받은 바 있어도 몹시 겁났지요. 이리 뒤척이고, 저리 뒤척이느라 수술 당일 새벽녘에야 겨우 밤잠이 들었습니다.

농부

야마오 산세이(山尾三省, 1938-2001)는 농부입니다. 지금까지 번역된 그의 책 세 권은 그런 면이 여실합니다. 먼저, 야마오 산세이 책의 한국어판에 대해 뭉뚱그려 말씀드리지요. 셋 다 산문집입니다. 그가 살았던 규슈 아래에 있는 야쿠 섬의 흙냄새가 나는 듯합니다. 재생지를 본문 용지로 사용한 『여기에 사는 즐거움』(도솔, 2002)과 『더 바랄 게 없는 삶』(달팽이출판, 2003)은 더 그렇네요.

흙냄새 물씬 풍기는 두 권은 내용이 꽤 겹칩니다. 중복되는 내용이 흠이 될 정도는 아닙니다. 『어제를 향해 걷다』(조화로운삶, 2006)에도 이 두 권과 겹치는 부분이 더러 있네요. 그건 아마도 야마오 산세이가 강조하고 싶은 소재와 주제인가 봅니다. 『어제를 향해 걷다』는 야마오 산세이의 책 두 권(『조몬 삼나무의 그늘 아래서』와『회귀하는 날들의 일기』) 중 일부를 우리말로 옮긴 것입니다. 야마오 산세이의 책은 모두 최성현의 번역입니다.

그런데 번역서의 만듦새가 다소 아쉽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네요. 어떤 책은 전체적으로 무난한 편집이나 책의 앞부분이 약간 번잡하네요. 또 어떤 책은 교정을 한 번 더 봤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오탈자가 적지 않습니다. 편집상태가 제일 깔끔하고 양호한 책은, 어찌 된 영문인지, 책날개의 저자 소개 글과 역자 서문에서 야마오 산세이의 타계 연도가 틀리네요.

와세다 대학을 나온 야마오 산세이는 마흔에 식구를 이끌고 야쿠 섬으로 이주해 농사를 지으며 살다가 그 섬의 자기 집에서 세상을 뜹니다. 일종의 귀농이었던 셈이죠. 책에 실린 그의 노년 사진을 보면, 농부가 ? 되어 있네요. 하지만 한번 물들인 인텔리 기운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한데, 그는 농경시대 저편의 ‘석기시대’를 동경하는군요. “석기문화를 생활 속에 받아들임에 따라 우리들은 이 문명사회에서는 맛볼 수 없는 새로운 풍요로움과 기쁨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도 시대착오적이라는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네요. 이런 반응을 예상했는지 몰라도 그는 ‘석기시대 충동’을 부연합니다.

“석기시대 충동이라 하면 뭔가 대단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자연과의 긴밀한 관계가 성립돼 있으면 저절로 그 충동도 성취되는 것이다.” 또한 그가 “‘석기시대 충동’이라는 말로 부르는 자연 회귀의 바람이 앞으로 우리가 우리의 문명을 균형 잡힌 모양으로 만들어가려고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요소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철학자

그는 철학자이기도 합니다. 그는 “철학이라고 하여 겁낼 것 없다” 말하지요. “철학이란 인간이 어떻게 바르게 살 것인가, 진실하게 살 것인가, 혹은 풍요롭게 살 것인가를 생각해보는 일로서 우리 모두가 이미 나날의 생활 속에서 실제로 하고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하는 갈대’로 태어난 인간은 늘 그러한 생각의 고삐를 늦추기 어려운데 그게 바로 철학이라는 거죠.

그는 이른바 철학자들의 전문영역은 철학의 아주 작은 부분이라고도 합니다. 야마오 산세이에게 “철학은 오랜 기간 나의 생을 어디로 돌려보낼 것이냐”와 관련돼 있었지요. “바꿔 말하면 나를 어떻게 죽게 할까, 어디로 나의 의식과 뼈를 돌려보내야 할까를 생각하는 일이었다. 그것이 더 진실하게 살고, 더 바르게 살고, 더 풍요롭게 살아가는 길이었다.”

그의 철학을 함축한 두 마디는 이렇습니다. “서두르지 않는다. 집중한다.” 보통 사람의 생활철학이 높은 사상의 경지로 승화하는 것은, 그가 이를 삶 속에서 철저하게 지켜 발현하기 때문이겠지요. 그런데 그것은 야마오 산세이가 자연으로 귀환하여 얻은 알찬 소득입니다.

“내가 이제까지 익혀 온 들일, 산일의 가장 중요한 요령은 결코 서두르지 않을 것, 집중할 것, 이 둘이다. 이 두 가지의 균형이 무너지지 않는 한 어떤 일을 해도 그 작업은 한없이 즐겁다. 그 작업을 통해 나는 내 속에서 피어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 생의 근원적인 충동(석기시대 충동), 곧 생명의 충족감과 내밀함을 손에 넣을 수가 있는 것이다.”

삶의 근원적인 충동은 인간의 원시적인 본능과 맞닿아 있지요. 숲 속의 길에서 벗어나거나 나무 위에 올랐을 때 불안해지는 것이 아니라 기쁨과 충족감을 느끼는 것이 바로 그런 예에 속합니다. “세포인지 유전자인지는 알 수 없지만 좌우간 그 레벨에 기억돼 있는 ‘나무 위’라는 기분 좋은 긴장이 심신을 돌며 어린아이들처럼 다만 거기에 그렇게 올라가 있는 것만으로 즐겁다.”

시인

무엇보다 야마오 산세이는 시인이지요. 번역시는 감흥이 떨어지게 마련이나 그의 작품은 많이 다르네요. 좋은 번역 덕분인지, 아니면 언어의 장벽이 무색할 만큼 그의 시심(詩心)이 탁월한 덕분인지 마치 우리 시를 읽는 듯한 느낌입니다. 그의 시집을 번역 출간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에게 “시인이란 세계의 희망 찾기를 숙명으로 삼는 인간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럼, 산문집 세 권에 흩어져 있는 그의 시 작품을 읽어보도록 하지요.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고요함이다/산은 고요하다/밭은 고요하다/그래서 나는 고향인 도쿄를 버리고 농부가 되었다/이것은 하나의 의견인데/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고요함이다”(「고요함에 대하여」에서)

“입동의 들길에 핀/털머위 노란 꽃은//제 행복의 단편이자/인생의 의미입니다//입동의 들길에 핀/털머위 노란 꽃 속에//은하계가 깃들어 있고/인생의 의미가 있습니다//한바탕의 털머위 꽃은/한바탕의 은하계//저는 그것이자/그 행복의 한 조각입니다”(「털머위 꽃」 전문)

“산에 저녁 어둠이 다가온다/아이들아/봐라 이미 밤이 등 뒤에까지 와 있다/불을 피워라/너희 마음에 남아 있는 놀이를 놓고/옛 마음으로 돌아가/불을 피워라”(「불을 피워라」에서)

야마오 산세이의 글을 읽으면 읽을수록 그의 삶과 사상에 빠져들기보다는 일정한 거리를 두게 됩니다. 그건 이런 의구심이 들어서겠지요. 그를 믿어도 될까? 그도 고작 해야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 가운데 한 사람은 아닐까? 현대문명에 비켜선 그의 자연주의는 혹여 사회와 역사로부터의 도피가 아닐까?

그렇다고 뭇 생명과 더불어 살려는 그의 뜻을 의심하진 않습니다. “그쪽으로 가면 도망칠 곳이 없기 때문에 안 된다”며 농사에 피해를 주는 사슴의 퇴로를 걱정하는 대목에서 진하게 감동했거든요. 아무튼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직은 확실한 판단이 서질 않네요. 다만, 「왜-아버지에게」라는 그의 시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도 있지 않나 싶습니다. 아래는 그 시의 일부입니다.

“왜 너는 도쿄 대학에 갈 생각을 않느냐고
고등학교 3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물었다
저는 와세다 대학에 가고 싶습니다 라고 대답했지만
그때 나는
키에르케고르 전집을 읽기 시작했기 때문에
이미 시험 공부할 사이가 없었다

왜 너는 대학을 그만두냐고
대학 3학년 때 아버지는 물었다
나는 방자하게도
입학할 때부터 졸업할 생각이 없었고
졸업장 갖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비겁한 사람이나 하는 일이고
중학교만 졸업한
아버지의 길에도 거스르는 일이라고 대답했다

왜 너는
아나키스트가 되었냐고
올 삼월에 암으로 죽은 친구가 물었다
그 친구는 깊은 연민과 힘을 가지고
평생을 사랑 하나로 일관한 보기 드문 사람이었다
나는 그에게
어디나 다 중심이고
또 거기에는 그 나름의 질서가 있으니
정부 따위는 필요 없는 게 아니냐고 대답하지 않고
너 또한 아나키스트일 게 분명하다고 대답했다”

제가 받은 수술은 복잡하지 않았습니다. 수술실에 걸어 들어가고 걸어서 나왔거든요. 국부마취를 해서 그렇지요. 수술시간은 30분 남짓이었습니다. 피부를 절개해 살 속의 덩어리를 잘라 끄집어내는 과정이 어렴풋이 느껴졌지요. 서너 번 꽤 강한 통증이 와서 신음소리를 냈어요. 그러자 집도의가 고려해 줬습니다.

하지만 저는 『나는 침대에서 내 다리를 주웠다』(한상호 옮김, 소소, 2006)의 올리버 색스처럼 내가 수술 받는 과정을 모니터로 지켜볼 깡다구는 없는 사람입니다. 다행히 수술은 잘되었지요. 좀 있다 실밥도 뽑을 겸 조직검사 결과를 들으러 병원에 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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