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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예술의 경계선

지난 몇 달 동안 전 정말 심하게 앓았어요. 그렇다고 심각한 중병에 걸린 건 아니고, 온갖 작은 병이 허리케인에 딸려 날아다니는 가구처럼 한꺼번에 와르르 몰려왔던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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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몇 달 동안 전 정말 심하게 앓았어요. 그렇다고 심각한 중병에 걸린 건 아니고, 온갖 작은 병이 허리케인에 딸려 날아다니는 가구처럼 한꺼번에 와르르 몰려왔던 거죠. 그 때문에 몇 달 동안 별별 병원을 다 찾아다니고 전에는 상상만 해봤던 검사도 여러 차례 받았어요. 이제 병 투정의 밑천도 떨어질 지경입니다. 그래도 그냥 하겠지만.

<한나와 그 자매들>
며칠 전 우디 앨런의 <한나와 그 자매들>을 본 것도 어느 정도는 그 때문이었어요. 언제부턴가 그 영화에서 앨런이 연기한 캐릭터 미키에 감정이입이 되었기 때문이죠. 기억하시는 분이 계실지 몰라요. 미키는 방송국 PD로 자기가 세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병에 걸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걱정하는 심기증 환자죠. 그러나 그가 정말로 뇌종양에 걸렸을지도 모른다는 의사의 말을 듣자, 그 순간 그의 우주는 뒤집히고 말아요. 하긴 그것도 당연해요. 자기가 병에 걸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건 습관이죠. 하지만 진짜일지도 모를 병의 징후는 그 습관을 깨트려요.

물론 전 미키처럼 심각하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어설프게 그의 영화를 모방한 제 실제 경험은 그의 심정을 이해하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되었던 거죠. 이제 저에겐 미키가 조금 달라 보여요. 십여 년 전부터 알아온 우디 앨런 캐릭터지만 이제는 동료처럼 느껴지죠. 물론 전 그 사람처럼 서툴게 자살을 시도하지는 않겠죠. 그래도 아마 시간이 되면 미키가 영화 속에서 보았던 작품인 막스 형제의 <오리 수프>를 다시 보게 될지도 몰라요. DVD라는 게 있다는 건 이래서 좋군요.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들어요. 예술이란 것의 기본 기능은 삶이 준 상처를 치유하고 상처받은 사람들을 위로하는 것이죠. 우리가 직접 맞선 적 없는 삶의 경험을 간접적으로 제공해주는 건 그다음의 일이고요. 그렇다면 우린 온전하게 한 예술작품을 즐기려면 일단 삶을 겪어 봐야 해요. 그게 ‘연애를 하고 나니 세상 모든 유행가가 다르게 들린다’ 정도의 수준이라고 해도 말이죠. 그 단계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그 예술 작품은 수용자에게 어느 정도 회색으로 남을 수밖에 없어요. 적어도 이론상으로는요.

하지만 이 경계선이 얼마나 분명할까요? 시네마테크에서 엉덩이가 망가질 정도로 박혀 사는 영화광에게는 껌뻑이는 2차원 화면이 만들어 내는 이미지가 주는 감정이야말로 진짜일지도 모르죠. 그 세계가 분출하는 압도적인 감정에 도취한 그들은, 해상도가 높고 3차원이지만 따분하기 짝이 없는 실제 세계에서도 그와 같이 압축되고 순수한 무언가를 기대하겠죠. 뭐, 영화광만 예로 들 필요는 없어요. 평일 10시마다 텔레비전 앞에 달라붙는 드라마 중독자의 세계도 비슷할 테니까.

이야기를 더 연장했으면 좋겠지만, 계속 이어가기엔 제 편두통이 너무 심하군요. 아무리 예술이 좋아도 직접적인 육체적 고통을 능가할 만한 힘을 지닌 작품은 드물죠. 그러나 분명하게 선을 긋기 어려운 그 흐릿한 경계선 위에서, 그것은 현실 세계의 사람들을 위로해주고 잠깐이나마 그 고통을 잊게 도와주기도 합니다. 더 운이 좋다면 <한나와 그 자매들>에 나왔던 <오리 수프>에서처럼 주인공에게 결정적인 삶의 계시를 내려줄 수도 있고. 전 삶의 계시까지는 안 바라니 앞으로 침대에 들어갈 때까지 2시간 동안 편두통을 잊게 해줄 만큼 재미있는 뭔가를 찾아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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