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다빈이 왜 죽었는지, 어떻게 죽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그 사람이 자살한 것이 아니라고 믿고 싶어 하죠. 국과수의 발표가 있었고 지금까지 잘못 알려진 많은 정보들이 교정되긴 했어도 인터넷 어딘가에 떠돌아다니는 음모론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왜일까요? 우린 정말 정다빈이 자살이 아닌 다른 이유로 죽었기를 바라는 걸까요? 그럼 이 사건이 덜 끔찍해지기 때문일까요? 아뇨. 그건 아닐 겁니다. 그 이유는 보다 단순합니다. 우린 그것이 좋은 이야기라고 느끼지 않습니다. 플롯에는 구멍이 뚫려있고 설명은 불완전하며 복선도 없지요. 바로 저번 에피소드에서는 변태짠돌이 최민용과 말싸움을 벌이던 <논스톱 3>의 정다빈 캐릭터가 다음 회에서 갑자기 자살하면 뭔가 잘못된 것이죠. 우린 자연인 정다빈이 <논스톱 3>나 <옥탑방 고양이>의 캐릭터보다 훨씬 많은 문제를 안은 사람이라는 걸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조금 더 설득력 있는 이야기가 필요해요. 종종 잘못된 정보에 바탕을 두고 있고 의도적으로 사실을 오도하는 경향이 있어도 음모론은 더 많은 걸 보여주고 더 일관성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냅니다. 결정적으로 그 음모론에는 책임을 져야하는 당사자가 존재합니다.
| <옥탑방 고양이> 출연 당시의 故 정다빈의 모습(사진 : MB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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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기승전결이 있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건 이야기 속의 주인공들에게도 마찬가지죠.
『오만과 편견』이 이야기가 되는 건 엘리자베스 베넷과 다시가 만나기 직전에서 시작해서 결혼으로 끝나기 때문입니다. 그 뒤로 그들은 죽을 때까지 살았겠지만 그걸 다 다루면 『오만과 편견』이 될 수가 없죠. 이야기는 인생의 재료들을 자르고 붙이고 적당히 편집해서 조립한 인공물입니다. 엘리자베스 베넷의 인생에서도 이야기는 자연스럽지 않지요.
전지전능한 작가 제인 오스틴과는 달리 우리는 한 사람의 인생에 대한 완벽한 정보를 얻을 수도 없습니다. 우린 정다빈이 죽기 몇 시간 동안 어떤 생각을 했고 어떻게 반응했는지 끝까지 알 수 없을 겁니다. 죽은 사람들의 기억을 읽고 재현하는 정말로 마법과 같은 기계가 나중에 발명되지 않는다면 말이죠.
그 인생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백설공주나 신데렐라, 올리버 트위스트, 심지어 제임스 본드나 필립 말로의 삶도 우리에게 하나 또는 그 이상의 교훈을 주기 위해 존재합니다. 하지만 인생은 그냥 인생일 뿐입니다. 거기에서 우리가 어떤 의미를 찾으려 하는 건 당연한 것이지만 거기에 절대적인 무언가가 있는 건 아닙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필사적으로 기승전결과 완벽한 설명과 교훈과 권선징악이 있는 이야기를 찾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탄생에서 시작해서 죽음으로 끝나는 하나의 이야기로 봅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나 기독교들은 궁극적인 목표에 도달하면 종결하는 하나의 이야기로 역사를 볼 거고요. 사실 우리 문명이라는 것도 이야기를 만드는 과정에서 탄생했습니다. 예를 들어 사법부는 권선징악의 이야기를 우리 스스로 만들기 위한 시도이지요. 하나 또는 그 이상의 목표를 가지고 그에 매진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만의 이야기를 쓰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가 제대로 된 모양을 갖추고 완성될 수 있느냐는 또 다른 문제지만 모두 가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런다고 해서 우리의 역사나 인생 그 자체가 이야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스스로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통제할 수 있지만 허공중에서 존재하지도 않는 이야기를 보는 사람들은 그 환상 속에서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동시에 기만하며 해를 끼칠 수도 있습니다. 정다빈 사건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아마 경찰이나 국과수는 사건의 진상을 영영 알아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돌아다니는 음모론이 몇 가지 면에서 의외로 정곡을 찌르고 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일관성 있는 이야기의 환상에 취해 집착하다보면 우린 보다 중요한 사실을 잊게 될 수 있습니다. 앞뒤가 맞는다고 모두 사실은 아니고 이야기가 현실 세계에 자신의 논리를 강요할 수 없다는 것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