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처럼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던져보는,
‘인사’를 빙자한 ‘원고분량을 늘이려는 처절한 몸부림’
지난 나문희 편은 많은 분이 지적해주셨던 것처럼 <소문난 칠공주>에서의 활약상이 쏙 빠진 채로 게재되었습니다. 이유인즉슨, 제가 <소문난 칠공주>를 싫어했기 때문입니다. 이 드라마를 사랑한 많은 시청자껜 죄송한 이야기지만, ‘안 좋아해’ 수준이 아니라 마음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으로 그 드라마를 싫어했어요. 드라마의 완성도 문제나 연기자의 연기 수준 문제 그런 게 아니었어요. 그냥 제 취향으론 소화할 수 없는 드라마였을 뿐이에요. 여러분도 그런 경험이 있으실 거예요. 남들은 다 좋다고 잘 보는데 유독 나 혼자 이유를 알 수 없는 거부감에 차마 가까이할 수 없는 작품을 만난 경험이요. 엎친 데 덮쳤다고 저는 일일연속극 <열아홉 순정>도 있는 힘껏 싫어했습니다. 작년 한 해 KBS 2TV는 저에겐 그야말로 악마의 채널이었습니다. 일주일 내내 <열아홉 순정>을 방영해서 절 괴롭히고도 주말이면 기세 좋게 <소문난 칠공주>를 틀어댔으니 곱게 보였겠습니까.
어쩌면 저에게 채널 선택권이 있었다면 <소문난 칠공주>를 자의로 시청하며 서서히 정을 붙일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배우들이 단체로 출연하는 작품이니 정말 그랬을지도 몰라요. 그러나 저희 어머니께선 다른 곳을 한번 보면 안 되겠느냐는 저의 간절한 제안을 모른 척하셨고, 전 목구멍에 깔때기가 꽂힌 푸아그라용 거위처럼 그저 무력하게 봐야만 했습니다. 그렇다고 제 방에 들어가서 드라마가 끝나길 기다릴 수도 없었어요. 저희 집 저녁식사 시간은 좀 늦은 편이라 8시에서 9시 사이거든요. 어머니는 느긋하게 밥상에 앉아 식사를 하며 드라마 보는 것을 선호하셨기에 저 역시 식사 시간엔 꼼짝없이 <소문난 칠공주>를 봐야만 했습니다. 아시잖아요, 원래 뭐든 강제로 시키면 더욱 싫어하게 된다니까요.
그런 이유로, 제가 좋아하는 배우에 대해 찬사를 늘어놓으려는 목적이라지만 <소문난 칠공주>를 다시 보는 일은 정말이지 하고 싶지 않았어요.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나문희의 활약이 돋보였던 열 몇 편에 달하는 에피소드를 다시 보고 글을 썼지만, ‘나, 이 부분 억지로 썼네’ 하는 게 너무 노골적으로 티가 나더군요. 나중엔 잠을 쫓으려고 틀어놨던 나문희의 ‘있을 때 잘해’가 머릿속에 메아리치는 바람에 입만 열면 그 노래가 튀어나올 지경이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원고를 보내며 <소문난 칠공주> 부분을 싹 빼버렸습니다. 덕분에 글은 애초에 의도했던 것보다 분량으로나 글의 성격으로나 빈약해진 상태로 기사화되었습니다. 이 점, 정말로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위 글의 교훈 : 밥도 드라마도 지나친 편식은 좋지 않다. (…)
끝이 보이지 않는 가능성을 지닌 배우 변희봉에게 바치는 찬사
최근에 메릴 스트립이 했다는 말로 시작해 볼게요. “할리우드에서 내 나이 여성들이 할 수 있는 역은 둘 중 하나다. 괴팍한 마녀거나 흐리멍덩한 노파거나.”(씨네21 제587호에서 재인용) 나이 든 여성에 대한 할리우드의 편견 때문에 맡을 수 있는 배역이 한정된다는 얘기죠. 메릴 스트립이 어떤 사람인가요. 짐 캐리로부터 ‘What are you! Shape shifter? Body snatcher?’라고 신앙 간증 수준의 찬사를 받은 명배우 아닙니까. 그런 사람이 투덜거렸으니 다른 배우들은 오죽하겠어요. 하지만 우리나라 배우들에 비하면 메릴 스트립의 투덜거림은 엄살입니다. 한국은 나이 든 배우가 설 자리가 할리우드와는 비교도 안 되게 좁잖아요. 게다가 맡을 수 있는 역도 사극이 아닌 이상에야 주인공 부모, 기껏해야 대기업 임원 정도에 그치죠. 가장 흔히 쓰는 예를 들어볼게요. 숀 코너리가 <엔트랩먼트>에서 캐서린 제타 존스와 아슬아슬하게 러브라인을 형성해도 우리는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죠. 하지만 신구와 김혜수가 끈적끈적한 뉘앙스를 풍기며 러브라인을 형성한다고 상상해보세요. 낯설죠?
이유가 뭘까요. 일단 나이 때문에 맡을 수 있는 배역에 제약이 생겨요. 젊은 배우가 노역을 하는 것은 특수분장의 힘을 빌릴 수 있지만, 나이 든 배우가 젊은 애들처럼 날고 기는 연기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요. 물론 연극무대에선 나이 든 배우가 종종 젊은 역할에 도전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연극무대와 영상매체는 달라요. 연극을 보러 갈 때 우리는 그 정도는 속아줄 각오를 하고 갑니다. 기본적으로 연극이라는 것 자체가 무대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보는 사람의 상상력을 동원해 빈자리를 메워나가는 예술이잖아요. 배 하나 무대 위에 올려놓고 망망대해라고 한 마디만 던져도 그 공간을 바다라고 인식해훁는 관객이 있는 한, 칠순의 배우가 열여덟 처녀 역할을 맡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시청각으로 던져지는 정보만 소화하면 되는 영상매체에서 나이 든 배우가 자신의 나이보다 젊은 역할을 맡아 관객을 설득하는 데 성공할 확률은 희박해요.
하지만 더 큰 원인은 창작자의 나태함에서 비롯합니다. 나이 든 배우가 젊은 역할을 맡을 수 없다면 대신 나이 든 역할을 만들면 되는데 그럴 생각을 안 합니다. 손짓 하나, 눈빛 하나에도 수십 가지 연기를 담는 경지에 오른 원숙한 배우를 고작 주인공 아버지, 주인공 어머니쯤으로만 활용하고 마는 건 순전히 나태함 때문이라니까요. 그나마 드라마에선 그래도 이런 배역에 이름이라도 붙여주는데, 영화에선 이름 자체도 붙이지 않는 경우가 비일비재해요. ‘OO母 역’ ‘OO父 역’ 정도로 얼버무리는 엔딩 크레딧을 보면 ‘이름조차 부여받지 못하고 연기하는 사람들 심정은 어떨까’ 하고 곱씹어보게 됩니다.
그래도 요 몇 년간 상황은 많이 나아진 편이에요. 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 한국 영화계가 질적 향상과 양적 팽창을 동시에 해치우는 과정에서 관객은 좀 더 참신한 캐릭터를 요구했고, 안방극장에서 활약하던 배우들이 속속 단골 조연으로 스크린에 등장하게 되었지요. 앞서 말씀드린 백윤식은 주연급이 되어 종횡무진으로 활동하고 있고, 욕쟁이 할머니 캐릭터로 코미디계를 평정한 김수미나 죽어가는 남편을 두고 바람을 피우는 할머니 역할(<바람난 가족>)로 화려하게 영화판에 복귀한 윤여정도 있지요. 그리고 작년 가장 바쁜 한 해를 보냈을 배우, 오늘의 주인공 변희봉이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이 제일 최근에 변희봉을 만나보신 작품은 필시 드라마 <하얀 거탑>일 겁니다. 그 어떤 회유에도 넘어가지 않고 정도를 지키는 기초의학계의 수장 오경환 석좌교수 역할을 맡은 변희봉은 연기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남자배우들이 단체로 출연하는 이 작품에서 범상치 않은 존재감을 자랑합니다. 수많은 시청자의 주말 귀가 시간을 앞당긴 외과과장 선거기간 내내, 오경환은 그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고 중립을 지키며 뇌물을 가져오는 자를 꾸짖고 선거에서 인위적으로 여론몰이하려는 세력을 견제합니다. 환자의 안위만을 걱정하는 샌님 최도영을 격려하는 인자한 스승이다가도, 어느 순간 대쪽같이 냉철하고 엄격한 사람으로 돌변하는 오경환은 권력의 자리를 향해 발버둥치는 수컷이 즐비한 <하얀 거탑>에선 독보적인 존재지요.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학처럼 고고하고 강철처럼 단단하게 살아가는 오경환을 보고 있노라면 절로 존경심이 우러나옵니다.
드라마 <하얀 거탑>에서 오경환 역을 맡은 변희봉(출처 : 하얀 거탑 공식 홈페이지)
제 지인 한 명은 ‘야, 변희봉이 이런 역할을 맡게 될 줄은 몰랐는데, 멋지다’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변희봉이 이런 대쪽 같은 역할을 맡은 게 처음이 아니에요. 영화
<공공의 적 2>에서 맡았던 안효준 이사 역할은 평생을 교육계에 몸 바친 대쪽 같은 신념을 지닌 역할이었어요. 제 지인은 그 영화를 저와 함께 극장에 가서 제 돈 내고 봤었단 말이죠. 그렇다면 과연 이분이
<공공의 적 2>의 안효준 이사에 대해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요? 일단 영화가 1편과 비교해 흥행에도 비평에도 모두 쓴잔을 마시는 바람에 1편보다 쉽게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는 점도 있겠지만, 저는 변희봉이 작품마다 보여주는 연기의 스펙트럼이 그만큼 넓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싶군요.
영화 <공공의 적 2>에서 안효준 이사 역을 맡은 변희봉
<괴물>을 만나기 전까지 변희봉이 인터뷰할 기회가 되면 늘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었어요. 바로 ‘제대로 된 아버지 역할을 한번 맡아보고 싶다’였습니다. 수많은 중견배우가 그저 주인공 엄마 아빠 역할만 맡으며 늙어가는 현실에 개탄하는 시절에 변희봉은 그 흔한 아버지 역할을 탐냈어요. 그도 그럴 것이, 강한 인상과 말씨에 배어있는 짙은 전라도 사투리 덕에 늘 강퇇 이미지의 조역을 도맡아 하는 통에 평범한 아버지 역할을 맡을 겨를이 없었던 겁니다. 왠지 앞에서 제가 했던 말과 어긋나는 것 같죠? 앞에선 평범한 아버지 역할에 그치던 중견배우들이 새로운 배역을 받아 충무로에 진입했다고 해놓고선 말이죠.
하지만 슬프게도 변희봉 역시 그즈음 되어서야 충무로에 진입했습니다. 다시 이야기하면, 한국영화에 노역 캐릭터의 비중이 높아지기 전까지는 그나마 평범한 아버지 역할조차도 할 수 없었던 거죠. 실제로 봉준호 감독이
<플란다스의 개> 시나리오를 들고 변희봉을 찾아오기 전까지만 해도 변희봉은 배우를 그만둘까 진지하게 고민했다고 합니다. 슬프지만 지속적으로 일을 하지 않으면 일체의 수입이 없는 게 배우니까요. 실제로 조금만 내막을 들여다보면 겉으로 보이는 화려함 이면에 봉급생활자보다 어렵게 지내는 사람도 허다하잖습니까. 꼭 출연해 주십사 부탁하는 봉준호 감독에게 이끌려 ‘한 번 속는 셈치고’ 출연했던
<플란다스의 개>에서 변희봉은 몇 페이지에 달하는 ‘보일러 괴담’을 쉬지도 않고 쭉쭉 읊어나갑니다. 일부러 그로테스크하게 친 조명을 받아 더욱더 강조된 표정으로 ‘보일러 돈다, 이이잉-’ 하며 으스스한 어조로 ‘썰’을 푸는 기괴한 경비원 캐릭터에 사람들은 ‘발견’이란 말을 아끼지 않았죠. <수사반장> 사이비 교주, 사기꾼 전담 배우로 쌓은 기괴한 캐릭터가 폭발한 이 작품 이후 변희봉은 여러 감독에게서 러브콜을 받게 됩니다. 그렇게 하고 싶었던 아버지 역할만 빼고 오만 가지 역할을 다 맡게 되지요.
영화 <플란다스의 개>에서
제일 먼저 김태균 감독의
<화산고>에선 무림 최고수가 되는 비법이 적혀있다는 ‘사비망록’을 얻고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악한 교감 역할로 영화 전체를 압도하는 악역을 해치웠습니다. 배우 변희봉의 존재를 모르던 사람들도 영화관을 나서면서 허준호보다 변희봉의 악역 연기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하게 되었지요. 뒤이어 배우 변희봉의 존재감을 다시금 확인했던 것은 장규성 감독의
<선생 김봉두>였습니다. 외제 담배는 없느냐고 물어보는 차승원에게 대뜸 물벼락을 끼얹고 화를 내는 괴짜 영감 역할이었죠. 단순히 괴짜 영감 캐릭터로 끝날 수도 있었던 이 배역이 입체감을 얻는 건 영화 중반부터입니다. 까막눈 처지를 벗으려고 차승원에게 그 싫어하던 외제 담배 한 상자를 툭 던져주는 대목에서 변희봉의 절묘한 연기는 산골 오지에서 글도 모르고 평생을 외롭게 살았을 캐릭터의 인생까지 가늠하게 해줍니다. 철저하게 캐릭터 설정을 해 와서 함께 작업한 장규성 감독을 놀라게 했다는 변희봉은, 차승원에게 ‘봉투’를 안기는 마지막 장면에 대한 아이디어까지 준비해 와서 영화의 주제의식을 고취했죠. 그리고는 다들 아실 작품,
<살인의 추억>이 개봉했습니다.
영화 <화산고>에서
영화 <선생 김봉두>에서
구희봉 반장. 어딘가 어수룩하고 빈틈투성이에다가 어떻게든 범인만 잡으면 만사 오케이라는 편한 사고방식의 형사반장 역할을 맡은 변희봉은 이 영화에서 실로 경악할 만한 일화를 남겼습니다. 영화 초반, 농한기의 논에서 시체가 발견되어 송강호와 함께 현장을 둘러보는 장면, 기억하시나요? 변희봉은 그날 감기를 심하게 앓았지만, 감독이 OK 사인을 낼 때까지 논두렁에서 13번이나 굴러 떨어졌습니다. 그리고는 애드리브의 황제 송강호의 애드리브에 매번 다르게 호흡을 맞춰주며 그 긴 원 신 원 테이크 장면을 소화해냈습니다. ‘연기할 땐 신이 나서 몇 번을 다시 찍어도 아픈 줄도 모른다’는 변희봉은 그날 촬영이 끝나고 결국 병원에 입원하기에 이릅니다. 영화학도나 영화광을 자처하는 분이라면 그 장면의 카메라와 조명 동선이 얼마나 복잡하게 꼬여 있는지 아실 거예요. 설령 영화학도가 아니더라도
<살인의 추억> DVD 박스 세트를 구매한 분이라면, 별책부록으로 딸려온 콘티북에 그려진 동선을 보면서 참 더럽게 복잡하단 생각을 한 번쯤 하셨을 겁니다. 그 복잡한 신에서, 논두렁에서 13번을 거푸 굴러 떨어지며, 매번 바뀌는 상대배우의 애드리브를 능수능란하게 받아준다는 것. 정말이지 예술이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으스스한 아파트 경비원, 사리사욕에 불타오르는 고등학교 교감, 늘그막에 연애감정을 느끼고 아이처럼 들뜬 노시인, 괴팍한 성미의 까막눈 시골영감, 빈틈이 많아 결국엔 경질되고 마는 무능한 형사반장, 도시에서 온 사람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는 수상한 마을의 이장, 초등학교 교장선생, 묵묵히 손자 같은 녀석의 트레이너를 자처한 소년원 권투코치…, 그동안 못 한 연기를 한꺼번에 해치울 듯한 기세로 매번 직종과 성격을 달리해 가며 수많은 캐릭터의 탈을 뒤집어쓴 변희봉은 자신의 색깔을 강하게 어필하면서도 동시에 캐릭터마다 전혀 다른 인상을 심는 데 성공했지요. 언뜻 보면 말장난 같지만 진짜 이렇게 밖엔 표현이 안 돼요. 똑같은 역할로는 한 번도 소비되지 않은 채로 7년간 쉬지 않고 작품을 계속 할 수 있었다는 건 변희봉의 연기가 그만큼 독보적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동시에, 변희봉이 얼마나 성실한 배우인가를 입증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그와 함께 작업해 본 감독들은 입을 모아서 자신이 맡은 배역에 몰두하는 변희봉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위에서 제 지인이
<공공의 적 2>에 대해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도, 비슷한 성격의 역할이지만 말투부터 눈빛 하나까지 전혀 다른 뉘앙스로 연기하는 변희봉 앞에서 전작을 떠올리는 건 어렵기 때문일 거예요.
아버지 빼고 오만 가지 역할을 다 거쳐 온 변희봉은 ‘제2의 연기인생을 시작하게 해준 은인’ 봉준호와 세 번째 작품을 함께하며 마침내 오매불망 그리던 아버지 역할을 맡았습니다. 작년 한 해 박스오피스를 들었다 놨다 한 영화
<괴물>의 박희봉 역할이었죠.
봉준호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꿰는 영화팬이라면 아시겠지만, 봉준호의 전작에서 ‘가족’이 비중 있게 등장한 적은 별로 없습니다. 단편 <지리멸렬> <백색인>은 물론이거니와, 지금의 명성을 얻게 된
<살인의 추억>에서도 가족이란 존재는 에필로그에 잠시 등장할 뿐 영화에선 찾아볼 수 없어요.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에서 이성재와 이성재의 아내 김호정으로 이루어진 가족 또한 냉랭함과 지루함이 감도는 관계였지요. 흔히 한국영화에서 ‘부모님’이나 ‘가족’이라는 개념이 사라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봉준호처럼 작품에서 ‘가족’이 드물게 등장하는 경우는 찾기 어렵습니다. 김지운의 영화에서 가족(혹은 유사 가족)은 극을 이끌어나가는 갈등의 핵심인 경우가 대부분이고, 박찬욱의 복수 3부작과 단편영화 <심판>에서도 핏줄의 문제가 극 전체를 지배합니다. 동시대 작가군 중에서 가족의 존재를 유달리 희미하게 그렸던 봉준호는 세 번째 장편
<괴물>에서는 대놓고 가족이란 개념을 정면으로 바라봤어요. 감독이 말한 영화의 핵심 모티브인 ‘먹인다’라는 개념은 박강두의 가족을 통해, 또 등장인물들이 맺는 유사 가족의 관계 속에서 꾸준히 재현됩니다. 그리고 등장부터 퇴장의 순간까지 자기 자신보단 ‘내 새끼’의 안위를 챙기는, 애끓는 부정(父情)으로 가득 찬 아버지 박희봉 캐릭터는 이전 봉준호 영화에선 찾아볼 수 없었던 종류의 것입니다. 대본 작업에서부터 변희봉을 염두에 두고 쓴 역이라고 했던가요? 감독이 작정하고 변희봉에게 바치는 헌사였지요. 아마 앞의 두 작품을 함께하며 쌓인 변희봉에 대한 신뢰가 없었다면 나올 수 없는 캐릭터였겠죠.
간절하게 기다렸던 아버지 역할이어서 그랬을까요. 변희봉은 유달리 캐릭터 구축에서부터 공을 들였습니다. 백금 씌운 보철 치아를 이에 끼우고 토끼털 복대를 배에 두둑이 찬 외양에서부터 꼭 늘 그 자리에서 한강 매점을 운영하던 사람을 보는 것만 같았죠. 팔자 좋게 늘어져 자는 강두에게 면박을 주고 딸 남주의 경기를 숨죽여 지켜보며 응원하는 일상을 어찌나 그렇게 실감나게 연기하던지요. 영화가 일상에서 과격한 판타지의 영역으로 급격하게 넘어갈 때도 관객이 위화감을 느낄 수 없었던 것은 ‘친구 조카사위 매형’을 들먹이며 작품의 무게 중심을 강하게 잡아주는 변희봉 덕이 큽니다. 아무도 못 믿을 극한상황에 처했음에도 공권력 앞에선 공손하게 고개 숙이는 게 순리라 믿고, 심부름센터 직원들의 협박에 말없이 가진 걸 모두 탈탈 털어주는 그 모습이 전혀 낯설지가 않습니다. 괴물을 잡으러 다니는 도중에 남일과 남주를 앉혀놓고 늘어놓는 ‘나야 좁아터진 매점에서 하루 왼종일 죽치고 혼자 이놈 방귀 소리만 들어도 이놈 오늘 컨디션이 B 마이나구나 A 프라스구나 단박에 알지만…’ 타령은 괴물이 뛰어다니는 극한의 판타지 속에서도 이 이야기가 우리가 발붙이고 사는 현실과 등을 맞대고 있음을 상기하게 하지요. 그 직후에 이어지는 퇴장 역시 (자세히 서술하면 스포일링이 될 게 두려워 이 대목의 변희봉을 자세히 예찬할 수 없음이 서러울 따름입니다) 영화의 터닝 포인트를 확실하게 해줬지요. 그 눈빛과 손짓 하나에 천만 관객이 눈시울을 적셨습니다. 심지어
<괴물> DVD 감독 코멘터리에 따르면, 한국 특유의 정서를 이해 못 할 것만 같은 미국 CG 스태프조차 그 장면의 CG를 작업하면서 가슴이 찡했다고 하네요. 세계를 울린 연기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버지 배역에 대한 오랜 한을 푸는 데 멋지게 성공한 변희봉은
<괴물>로 청룡영화제 남우조연상, 디렉터스컷 올해의 연기자상, 그리고 최근 열린 제4회 최고의 영화상 남자조연배우상을 수상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상보다도 ‘아버지’ 영화 한 편으로 전 국민의 마음속에 애끓는 부정으로 넘쳐나는 우리네 아버지로 기억되었다는 것이 변희봉에겐 더 큰 기쁨이겠지요. 봉준호 감독만큼은 아니지만
<플란다스의 개>에서부터 계속 변희봉을 주의 깊게 바라본 저도,
<괴물>로 변희봉이 일군 성취가 한없이 기쁘고 뿌듯했습니다.
영화 <괴물> 포스터
영화 <괴물>의 봉준호 감독과 출연진들과 함께
영화 <괴물>에서
영화 <괴물>에서
영화 <괴물>에서... 자식을 바라보는 흐뭇한 표정이 마음에 남는다.
다시 <하얀 거탑> 이야기입니다만, 전 변희봉의 연타석 한풀이가 즐겁습니다. 무슨 소리냐고요?
<살인의 추억> DVD에서 변희봉은 배역상 어쩔 수 없이 퇴장했지만, 자신도 지적이고 멋진 신 반장 역할을 자기 식으로 풀어낼 수 있는데 아쉬웠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지요. 나아가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그런 역할을 맡고 싶단 소망도 노골적으로 피력했습니다. 그 인터뷰 영상을 보고 제가 변희봉을 주연으로 썼던 시놉시스만 열두 꾸러미는 될 겁니다. (제 프로필을 보신 분은 제가 습작도 한 번 안 찍어본 주제에 영화감독이 꿈이라는 걸 아실 테지요.) ‘왜 변희봉은 지적이고 카리스마 넘치는 멋진 역할엔 캐스팅되지 않는가!’라며 오랫동안 투덜거렸던 전 <하얀 거탑>에서 하얀 가운을 걸치고 아무도 함부로 할 수 없는 대쪽 같은 카리스마의 지성 오경환 역할을 맡아 승승장구하는 변희봉을 보는 게 무척 즐겁습니다. 한국판 캐스팅이 발표되었을 때 변희봉의 이름을 확인하고 전 십 년 묵은 체증이 한 방에 날아가는 것만 같았어요. 변희봉은 그렇게나 원했던 아버지 역할에 이어, ‘지적이고 멋진’ 역할까지 아주 완벽하게 해내고 있습니다. 마치 여태껏 못 했던 걸 이 한 작품에 몰아서 다 보여주겠다는 듯한 기세로요.
<선생 김봉두> <여선생 대 여제자>에 이어 세 번째 작품
<이장과 군수>를 함께한 장규성 감독은 변희봉을 두고 ‘아직 다 만개하지 않아서 좋은 연기자다. 어디까지 나아가실 수 있을지 모른다’라고 말했다지요. 저 역시 같은 이유로 변희봉을 사랑합니다. 제 미욱한 글로는 그 가능성과 잠재력을 다 헤아릴 수 없어서 더 빛나는 배우. 이번 <땡땡의 요주의 인물> 주인공은 늘 현재진행형의 가능성을 지닌 배우 변희봉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