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계 이탈리아 작가 프리모 레비(Primo Levi, 1919-1987)를 읽고 싶었다. 마침 지난 연말에서 올 초까지 한 달 보름 새, 프리모 레비 관련서 한 권과 그의 저서 두 권이 한꺼번에 번역돼 나왔다.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박광현 옮김, 창비, 2006)는 지난해 이맘때 우리말로 옮겨진 『디아스포라 기행: 추방당한 자의 시선』(김혜신 옮김, 돌베개)을 통해 프리모 레비의 이름을 우리 가슴에 또렷하게 각인한 재일조선인 에세이스트 서경식의 프리모 레비 길라잡이다.
프리모 레비를 찾아서
서경식이 프리모 레비의 발자취를 찾아 나선 건 그가 자살로 삶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레비가 1987년에 자살하지 않았다면 모든 것이 단순명쾌했을 것”이라는 츠베탕 토도로프의 말에 이끌린 까닭이다. 이 책에서 서경식은 프리모 레비와 대화를 나눈다. 서경식의 대화상대는 레비가 남긴 글이다. 이 책은 한국어로 번역되지 않은 레비의 저서도 인용한다. 여기에 이따금 서경식의 슬픈 가족사가 겹친다.
레비가 ‘시대의 증언자’인 것은 그가 아우슈비츠에서 살아 돌아와서다. 그런데 레비의 생환은 참으로 역설적이다. 아우슈비츠를 ‘선택’했기에 살아 돌아올 수 있어서다. 고향 토리노가 있는 피에몬테 주에서 레지스탕스 활동을 펼치던 레비는 1943년 12월 13일 스파이에게 속아 체포된다.
체포된 파르티잔은 즉결처분하는 것이 상례였으나 나치즘의 인종법칙이 고지식하게 적용돼, 레비는 1944년 2월 이탈리아의 포솔리 디 카르피 중계수용소에서 아우슈비츠로 넘겨진다. 심문관에게 자신이 유대인임을 인정한 ‘덕분’이다.
그러나 “인종법 공포 이전, 쁘리모 레비에게는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것이 태생의 머나먼 기억이며, 사라져가는 관습과 문화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죽음보다도 나쁜 테러의 목격자”가 된다. 프리모 레비 등을 실은 화물열차가 목적지에 도착하고 나서 그에게 다시 한 번 ‘행운’이 따른다.
아우슈비츠 “도착 후 불과 10분이 채 되기도 전에 ‘선별’ 작업이 행해졌다. 건장한 남자들은 하나의 그룹으로 모았다. 쁘리모 레비는 30명 정도의 사람들과 함께 트럭에 태워졌다. ‘노동 가능’하다고 인정된 그는 강제노동 수용소에 들어가는 ‘특권’을 얻었던 것이다. 그것은 즉시 살해되지 않을 특권, 즉 그 자리에서 말살되는 것이 아니라 ‘노동을 통한 절멸’의 대상으로 분류되는 특권이었다.”
레비와 함께 아우슈비츠에 도착한 유대인 가운데 남자 96명과 여자 29명만이 모노비츠와 비르케나우 수용소로 보내지고, 남은 500명이 넘는 여자와 아이와 노인은 그 즉시 전원 말살되었다. 어느 날 작업 도중 다리를 다친 프리모 레비는 ‘진료 동(棟, 카베)’ 출입을 허가받는다. 얼마간 작업을 면제받자 마음속에서 번민이 솟구쳤다.
“이 카베에 들어와 질타와 구타에서 일시적으로 해방되자 우리는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다시 되돌릴 수 없음이 확실해졌다. 우리는 봉인된 화물열차로 여기까지 끌려왔다. 그리고 여자들과 아이들이 무(無)를 향해 떠난 것을 보았다. 그리고 자신은 노예 취급을 받고, 수백 차례나 무언의 노동으로 가는 행진을 반복했다. 하지만 무명의 죽음이 닥쳐오기 전에 이미 마음은 죽어 있었던 것이다.”
“전략전술의 부재로 ‘아군’의 피해가 컸다” 나는 소위 ‘박정희 신드롬’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해한다’는 것은 ‘인정한다’와 닮은 행위이기 때문이다.”(프리모 레비) 사실, 나는 그런 현상이 있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을뿐더러 그것은 허상이라고 생각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를 기리는 뜻으로 기껏해야 그가 세웠다는 공업도시의 체육관에나 그의 이름을 붙였겠는가?
결과적으로 그의 18년 권좌를 이어받은 셈이 된 전직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는 지금보다 5공 시절이 더 낫다고 여기는 이들을 도대체 이해할 수 없다. 그래도 이건 약과다. 나는 ‘학살의 수괴’를 못 잊어 팬클럽까지 만든 이들에겐 정말이지 어이가 없다. 몹시 언짢다. 얼마 전, 시사주간지 <뉴스메이커>에 그 모임 홈페이지 운영자의 인터뷰가 실렸다. ‘전 전 대통령을 따른다는 게 낯설다’라는 물음에 대한 그의 답변은 이랬다.
“전 전 대통령의 죄에 대해선 ‘추정’만 있을 따름이다. ‘5.18’도 당시 보안사령관으로서 발포명령자란 게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밝힌다면 나도 기꺼이 (카페를) 탈퇴한다. 재판정에서 유추하는 걸로 사람을 판단할 수 없다. 보안사령관은 실 병력이 없고 지휘체계를 따른다. 최규하 당시 대통령이 발포명령을 했을지 누가 아나. 다 짐작이다.”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격이지만 꽤 익숙한 해명이다. 그런데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 책임 소재를 놓고도 이런 식의 본질 흐리기와 물 타기가 있는 모양이다, 여전히. “이 역사상 유례없는 민족 절멸 작전이 언제, 누구의 권한으로 결정되었는지는 연구자들 사이에서 아직 논쟁 중이지만, 1941년 중에 히틀러가 직접 명령을 내렸고, 이미 그해 연말부터 실행에 옮겨졌다는 견해가 현재로서는 유력한 듯하다.”
광주민주화운동을 보는 전직 대통령 팬 카페 운영자의 시각은 나의 무척 부끄러운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그쪽에도 피해자가 있으니 ‘폭동’이란 단어는 자제하고 ‘사태’란 표현을 쓴다. ‘부마사태’라고 쓰지 않나. 위 글은 당시 언론보도를 인용한 한 온라인 사이트 글을 퍼온 것이다. 우리가 주장하는 내용들이 아직 밝혀지지 않은 상황이다. 귀순용사들의 증언을 들으면 알 수 있다. 5.18은 자위권발동이라 생각한다.”
때는 1986년 봄. 경기도 성남에 있는 육군 무슨 학교(속칭 문무대)에 입소한 한 무리의 대학생들이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연병장 귀퉁이에서 쉬고 있다. 대뜸 구대장이 말문을 연다. ‘심심파적 삼아 한마디 하려는 거겠지.’ 내 예상은 크게 빗나갔다. ‘여기서 80년 5월 광주가 왜 나와?’ 위관급 장교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아주 충격적이었다.
“전략전술의 부재로 ‘아군’의 피해가 컸다.” 나는 이른바 운동권이 아니었지만, 나 또한 ‘적군’이라는 건가? 불쾌함과 모멸감이 동시에 몰려왔다. 나는 마땅히 일어나 그건 말도 안 되는 얘기라고 해야 했었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아니, 감히 못했다. 몇 대 두들겨 맞는 것보다는 퇴소당하는 것이 더 두려웠을 것이다.
당시, 일주일간의 문무대 입소와 역시 일주일간의 전방입소에다 정해진 교련 학점을 따면, 3개월 군 복무 단축 혜택을 받았다. 이건 군부정권이 대학생을 다루는 채찍이자 당근이었다. 현역병에겐 큰 특혜였다. 나는 내게 치욕감을 안겨준 문무대 구대장 중위의 이름을 또렷이 기억한다. 얄궂게도 그는 내 아버지와 이름이 같았다. 그의 피아개념은 이제 바뀌었을까?
어쨌거나 두 전직 대통령에겐 체육관 이름도, 고향의 공원 이름도 과분한 대접이다.
프리모 레비의 ‘갈등’나는 반미 성향 못잖게 반유대인 성향이 강하다. 그런데 유대인을 직접 만난 적이 없는 내가 인종적 편견을 가질 리는 만무하다. 또한 나는 가톨릭과 개신교에서 유대인과 유대교를 배척하는 이유에도 공감하지 않는다. 유대인이 싫은 건 오로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해도 너무하기 때문이다.
프리모 레비는 이스라엘의 영원성에 대한 믿음과 이스라엘이 저지르는 악폐 사이에서 심하게 고민한다. 레비는 이스라엘이 유대 민족의 피난처라는 그의 바람과는 반대로 “군사적 방향으로, 미숙한 방식의 파시즘적 방향”으로 바뀌어 “공격적인 의미에서의 내셔널리즘”이 강화되는 것에 위기의식을 느낀다.
레비는 우리가 “우선 민주주의자인 다음에 유대인, 이탈리아인 등 그 밖의 존재여야 한다”라고 강조하지만, 이에 대한 울림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회색인’ 취급을 받는다. 친이스라엘과 반이스라엘 양편 모두가 그에게 비난을 퍼부었다. 여기에다 1986년 시작된 독일의 ‘역사가 논쟁’도 레비에게 큰 충격을 줬으리라. ‘가스실은 없었다’는 아우슈비츠 부정론과 발뺌의 역사는 꽤 길다.
“어떤 친위대원은 강제수용소에 관한 진실을 어차피 누구도 믿어주지 않을 것이라며 수인들을 조롱했다고 한다. 그 조롱은 어느 정도 적중했다. 계획적인 증거 인멸도 있었다. 가해자의 끈질긴 부인도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실제 일어난 일이 너무도 믿기 어렵기 때문에 조롱하는 친위대원을 두둔하는 것이리라. ‘가스실에서 수백만 명이나 학살되었다고? 그게 말이 되나….’”
레비는 왜 스스로 목숨을 끊었나?1987년 4월 11일, 프리모 레비는 그가 살던 아파트 실내 ?단의 4층 난간에서 아래로 몸을 던졌다. 그는 왜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까? 서경식은 이에 대한 답변을 회피하면서도 조심스레 추측한다. “그의 자살은 원래 불안, 공포, 실의, 절망 혹은 권태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마지막 존엄을 지키기 위한 그리고 ‘증인’으로서 마지막 일을 완수하기 위한 조용한 선택이었을지 모른다.”
그렇다. 그의 자살은 인간이 저지른 만행을 잊지도 용서하지도 않겠다는 마지막 의사 표시였다. 가해자의 사죄 없는 용서란 있을 수 없다. 또한 레비는 인류 역사에서 멸시받고, 들볶이며, 노예로 혹사당하다 못해 살육당한 수많은 희생자를 위한 제의를 치른 것이리라. 그는 백인의 관점에서 보면 아프리카인, 아메리카 원주민, 아시아인, 애보리저니, 마오리였고, 일본인의 관점에선 조선인, 중국인, 류우쿠우족, 아이누족, 타이완 원주민, 남양 제도의 사람이었다. 레비는 팔레스타인이고, 그의 백인 중심 문명관을 노출한 “야만적인 피그미”이기도 하다.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가 튼튼한 뼈대라면, 번역된 레비의 저서 두 권은 실팍한 살점이다. 그리고 이 두 권은 서로 보완관계에 있다. “한쪽을 읽는 것이 다른 한쪽을 보다 깊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며, 독서의 감명을 배가시키기 때문이다.”(서경식) 레비는 첫 작품
『이것이 인간인가』(이현경 옮김, 돌베개, 2007)에서 그가 겪은 죽음의 “수용소 체험을 냉철하고 극명하게 성찰”한다.
그는 ‘작가의 말’을 통해 “이 책은 새로운 죄목을 찾아내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 정신의 몇 측면에 대한 조용한 연구에 자료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힌다. 또 “우리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다른’ 사람들을 거기에 참여시키고자 하는 욕구”를 충족하고자 썼다고 덧붙인다.
청소년판 『이것이 인간인가』(1976)에 부록으로 실린 ‘독자들에게 답한다’에서 레비는 글을 쓰게 된 계기를 분명히 밝힌다. “내가 아우슈비츠의 시간을 경험하지 않았더라면 절대 글을 쓰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아마 글을 써야 할 동기를 찾지 못했을 것이다. 학생 때 내 이탈리아어 성적은 보통이었고 역사 성적은 형편없었다.”
“수용소의 경험이 나로 하여금 글을 쓰게 했다. 나는 게으름과 싸울 필요가 없었다. 문체 같은 건 내가 보기엔 우스웠다. 업무 시간을 단 한 시간도 침범하지 않고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을 기적적으로 마련했다. 이 책은 이미 내 머릿속에 다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저 밖으로 나오게 해서 종이 위에 쓰기만 하면 되었다.”
수용소 생활 일주일 만에 몸을 씻을 의욕을 잃고 세면장을 어슬렁거리는 프리모 레비에게 쉰 살이 다 된 그의 친구 슈타인라우프가 던진 충고가 감동적이다.
“수용소는 우리를 동물로 격하시키는 거대한 장치이기 때문에,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동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곳에서도 살아남는 것은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나중에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 똑똑히 목격하기 위해 살아남겠다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는 최소한 문명의 골격, 골조, 틀만이라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우리가 노예일지라도, 아무런 권리도 없을지라도, 갖은 수모를 겪고 죽을 것이 확실할지라도, 우리에게 한 가지 능력만은 남아 있다. 마지막 남은 것이기 때문에 온 힘을 다해 지켜내야 한다. 그 능력이란 바로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당연히 비누가 없어도 얼굴을 씻고 윗도리로 몸을 말려야만 한다.”
아름다운 소중한 우정 프리모 레비는 화학자다.
『이것이 인간인가』와 짝을 이루는
『주기율표』(이현경 옮김, 돌베개, 2007)는 형식이 독창적이다. 주기율표의 원소를 표제로 이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문다. 이 책의 첫 장인 「아르곤」에 대해 이탈리아의 여성작가 나탈리아 긴즈부르그는 “초상화 박물관 같다”는 찬사를 보냈다.
“멘델레예프의 주기율표는 퇇 편의 시이며, 우리가 중?고등학교에서 소화해온 그 어떤 시보다도 고귀하고 경건하다. 그리고 잘 생각해보면, 주기율표는 압운(押韻)까지도 들어맞는다!”(「철」) 그리고 화학과 물리학은 그와 내가 찾던 파시즘의 해독제가 되어주었다. 그러면, 여기서 그는 누구일까?
프리모 레비의 둘도 없는 친구 산드로 델마스트로다. “나는 산드로가 의식적으로 나를 고생과 여행 속으로, 겉보기만 어리석어 보이는 여러 모험 속으로 인도해준 데 대해 정말 고맙게 생각한다. 이 모든 것들이 훗날 내게 도움이 되었다고 확신한다.” 산드로는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다가 파시스트들에게 붙잡혀 목숨을 잃는다. 하지만 「철」은 두 사람의 우정이 관중과 포숙아, 마르크스와 엥겔스 못잖음을 보여준다.
이 “호전적인 화학이야기”는 때로 익살맞기도 하다. “저능한 사람들에게 부여되는 면책의 비호를 받으며 보르톨라소는 정원사의 직무를 극도로 태만하게 수행했다. 그 태만함은 거의 원시적인 교활함에 가까운 것이었다.”(「니켈」) 처음에는 화단 한가운데 설치된 우량계에 물을 뿌려, 나중에는 비가 온 뒤 늘 기구 아래쪽의 밸브를 열어 놓아 보르톨라소는 석면 추출비용 계산에 필요한 데이터를 엉망으로 만든다.
「바나듐」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왜 그렇게 불안해하느냐?”라고 물었던 가해자의 뒤틀린 기억이 핵심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꾸며낸 게 아니다. 현실은 허구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덜 정돈되어 있으며, 더 거칠고 덜 원만하다. 그것이 같은 차원에 놓여 있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프리모 레비의 책이 이제라도 한국어로 번역된 것은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드는 의문점이 하나 있다. 적어도 20년간 노벨문학상 선정위원회는 뭘 했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