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면 각종 시상식은 물론이고, 업계 관계자를 대상으로 그해 최고의 음반이나 배우 등을 물어 활자화하곤 한다. 대중성이나 상업성보다 작품성, 완성도 면에 역점을 둔 선별이라는 점에서 좀 더 신뢰가 가기도 한다. 그런 차원에서 필자도 (문화생활을 보통 이상으로 즐기는) 주위 사람들에게 2006년 최고의 공연을 물어봤다. 대다수가 프랑스 오리지널 팀의 내한공연인 <노트르담 드 파리(Notre-Dame de Paris)>를 꼽았다. 완벽한 춤과 노래에, 소름 돋을 정도의 감동까지 있었다는 평이다. 필자가 생각해도 환상의 몸놀림이며 천상을 울리는 가창력은 그 뒤 어떤 공연도 따라잡지 못했던 것 같다.
국내 뮤지컬 시장이 급성장하고 있지만, 이렇게 특출한 내한공연은 일대 바람을 몰고 간다. 성장과 함께 내실을 기해야 한다는, 더 분발해야 한다는 각성을 심어주는 것이다. 때문에 런던팀이 내한한다는 <토요일 밤의 열기(Saturday Night Fever)>는 공연 소식이 전해지면서부터 모두의 관심을 끌어 모았다. 게다가 비지스(Bee Gees)의 히트곡과 디스코를 만끽할 수 있는 뮤지컬이 아니던가?!
뮤지컬 <토요일 밤의 열기>
조명이 꺼지고 무대에는 공연 포스터와 같은, 한 남자가 검지로 하늘을 찌르며 서 있는 막이 쳐져 있다. 그 막에 핀 조명이 켜지자 무대 위에 역시 그와 같은 자세로 한 남자가 서 있음을 알 수 있다. 서서히 막이 걷히면서 핑크빛 반질거리는 셔츠에 몸에 딱 달라붙는 검은색 나팔바지를 입은 남자의 요염한 자세가 여실히 드러난다. 여기저기서 작은 환호가 터지는 순간, 무대 위 남자는 신나는 음악에 맞춰 돌리고 찌르고 골반과 엉덩이를 씰룩씰룩 강약 있게 흔들어 보인다.
비지스의 음악을 테마로 한 뮤지컬 <토요일 밤의 열기>는 아바의 <맘마미아(Mamma-Mia)>, 퀸의 <위윌락유(We'll Rock You)>와 함께 3대 팝 뮤지컬로 꼽히는 작품이다. 존 트라볼타 주연의 영화 <그리스>가 뮤지컬 <그리스>를 기본으로 한다면, <토요일 밤의 열기>는 역시 존 트라볼타 주연의 영화가 먼저다.
스토리는 간단하다. 1970년대 뉴욕 브루클린 뒷골목. 별 볼 일 없지만 춤 하나는 잘 추는 주인공 토니는 낮에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밤에는 디스코텍에서 화려한 조명과 뭇 여성들의 끈끈한 시선을 받으며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한다. 해마다 열리는 ‘댄스경연대회.’ 그는 자신을 좋아하는 아네트를 뒤로하고 첫눈에 반한 스테파니와 대회에 참가하게 되는데….
| 화려한 색감 감각적인 조명 돋보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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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브로 듣는 비지스의 신나는 노래
세계적인 팝 뮤지컬답게 공연 내내 비지스의 흥겨운 디스코 음악을 마음껏 들을 수 있다. 비지스가 전성기를 이룬 시대는 1970년대지만, 그래서 설령 그들을 모른다 하더라도, 일단 디스코 음악이라는 것이 신나고 흥겹기 때문에 듣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어깨춤을 추게 된다.
물론 비지스 특유의 얇은 고음과 쟁쟁거리는 바이브레이션까지는 기대할 수 없다. 그러나 ‘Staying Alive’ ‘Night Fever’ ‘You Should Be Dancing’ ‘Tragedy’ ‘How Deep Is Your Love’ 등을 국립극장을 가득 메우는 라이브의 큰 울림으로 듣는 맛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특히, 토니 역을 맡은 션 뮬리건(Sean Mulligan)은 춤도 잘 추지만 음색이 조지 마이클을 닮아 노래도 듣기 좋다. 또 아네트도 가창력이 뛰어나 ‘If I Can't Have You’를 색다른 느낌으로 소화해낸다.
열정의 춤 퍼레이드
비지스 음악에 맞춘 열정적인 춤! 토니를 필두로 모든 배우의 화려한 춤사위는 시종일관 눈을 뗄 수 없게 한다. 내한공연인지라 무대 옆 스크린에 자막이 나오는데, 자막을 보다 보면 무대의 세세한 부분을 놓치기 일쑤다. 그래서 처음 5분여 동안 고민한 끝에, 자막을 포기했다. 스토리는 놓치더라도 그들의 춤만은 포기할 수 없었다. 디스코에 살사, 탭, 라틴재즈까지 가미된 섹시하면서도 신나고, 관능적이면서도 흥겨우며, 요염하면서도 재밌는 댄스 댄스!
춤은 시각적인 자극인 만큼, 처음에는 배우들의 실루엣이 기대보다 짧고 예쁘지 않아 실망했다. 그러나 춤은 환상이었다. 토니 역의 션은 네 살 때부터 댄스 수업을 받았다는데, 동작은 물론 느낌 면에서도 정말 춤을 잘 춘다. 게다가 끈적이는 표정연기도 제 맛이다. 그 역시 중간에 웃옷을 벗고 화려하게 세팅된 근육을 보여줬는데, 객석의 여성들이 넋을 잃었다.
가장 멋있었던 무대는 토니와 스테파니가 연습실에서 서로 짜둔 안무를 얘기하며 맞춰보는 장면. 제자리에서 회전하던 스테파니가 토니를 축으로 그의 손을 잡고 크게 회전한다. 이해를 돕자면, 지구가 자전하면서 태양을 도는 것과 같은 모습이다. 그 모습이 어찌나 황홀하던지 여기저기서 탄성이 쏟아진다. 또 ‘댄스경연대회’에서 빨간 의상을 입고 묘기에 가까운 춤을 선사한 푸에르토리코 팀도 큰 박수를 받았다.
| 묘기에 가까운 댄스 선보인 푸에르토리코 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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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하고 강렬한 색채미
무대는 강렬한 원색으로 가득하다. 대부분의 장면이 디스코텍인 만큼 배우들의 의상이며, 화려한 조명은 눈이 부실 정도다. 1970년대를 되살린 무대. 그래서 전체적으로 다소 촌스러운 맛은 있지만 그 시절의 젊음도 그 무엇보다 빛나고 화려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무대를 압도하는 환상의 조명. 음악과 함께 완벽하게 장면을 이해한 조명은 다소 빈약한 무대를 풍성하게 채운다. 춤만큼이나 현란한 색감이며, 무대의 열기만큼이나 뜨거운 강렬함. 그뿐만 아니라 ‘댄스경연대회’ 때 흰색 옷을 입은 토니와 스테파니 무대에서는 은은한 은빛 조명으로 신비한 분위기를 연출하더니, 빨간 의상의 푸에르토리코 팀 무대에서는 그만큼 열정적인 빨간빛 조명으로 정열을 불태우는 센스를 발휘했다.
| 잊을 수 없는 장면 하늘로 검지 찌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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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르담 드 파리>를 눌렀을까?
다른 배경, 다른 느낌의 작품을 이렇게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억지로 점수를 매겨보자면 <노트르담 드 파리>를 뛰어넘지는 못했다. 노래나 군무는 정말로 다른 느낌이기에 제쳐놓고라도, 스토리 면에서 부족한 점이 많았다. 주인공을 둘러싼 삼각관계 외 친구나 가족 얘기가 엉성하게 연결돼 있고, 젊음의 고뇌도 억지스럽다. 때문에 가장 클라이맥스로 올라야 할 마지막 장면에 힘이 빠지고, 객석의 반응까지 미지근하다. 공연을 준비하는 측도 이에 일조했으니, 자막이 무대에서 너무 벗어나 있는 데다 대부분 읽기 어려울 정도로 빠르게 넘어갔다.
그러나 바로 이어진 커튼콜 무대에서는 이 같은 부족함을 만회하기라도 하듯 더욱 열정적인 춤사위를 펼쳐보인다. 객석에서도 모두 일어나 열띤 환호와 박수로 함께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모두가 일렬로 서서 하늘을 향해 ‘검지 찌르기’ 파도타기를 한다. 그 유치함, 그러나 그 유쾌함이란! 기대했던 이번 <토요일 밤의 열기> 내한공연은 외국인들 특유의 관능미와 열정이 드러나는 신나고 흥겨운 무대로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돌아오는 길에 내한공연을 좀 더 효율적으로 즐기는 방법을 생각해 봤다. 아무래도 자막을 봐야 하기 때문에 무대에 제대로 집중할 수가 없다. 그리고 그 자막이라는 것도 스토리의 반도 채 담아내지 못할 때가 많다. 그래서 말인데, 스토리를 미리 충분히 숙지하고 가는 건 어떨까? 그리고 공연장에서는 자막을 무시하고 무대에만 집중하는 것이다. 마치 팝 아티스트의 무대를 보는 것처럼, 멜로디와 사운드, 춤과 노래, 그 느낌만 100% 흡수하고 오는 것이다. 역시 많은 기대를 받는 <로미오 앤 줄리엣>은 이 방법을 써봐야겠다.
토요일 밤의 열기 - 런던 오리지널팀 첫 내한공연
2007년 1월 12일 ~ 3월 3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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