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오랜만에 나선 이대 앞은 낯설다는 말이 제대로 실감나는 곳이었습니다. 대학 때는 정말 친구들과 틈만 나면 쏘다니던 거리였는데 이제는 ‘여기가 어디야?’ 하며 두리번거리는 아줌마가 되었네요. 크리스마스 때 산타에게 ‘바비 인형 옷 만들기’ 세트를 선물 받은 둘째가 바비 카페에 가보자고 하도 졸라서 일단 바비 카페에 들렀습니다. 이제는 카페라기보다는 밥집이 되어버린 곳이지만 곳곳에 아직도 바비 인형이 빼곡히 들어찬 그곳에서, 아이는 눈을 반짝이며 이것저것 열심히 챙겨보더니 급기야는 맘씨 좋은 주인아주머니 덕에 드레스 입고 사진까지 찍고 나서야 카페 문을 나서더라고요.^^
사실 오늘 아이들과 가려고 한 곳은 이대 후문 쪽에 자리한 ‘그림책 정원 – 초방’이라는 곳입니다. 이대 후문 쪽에서 맞은편으로 길을 건너 금화터널 쪽으로 걷다가 다미 분식집 골목으로 들어가면 모퉁이에 북 카페인 ‘프린스턴 스퀘어’가 나옵니다. 이 프린스턴 스퀘어를 끼고 우회전해서 조금 올라가면 왼편으로 1층에 보이는 전망 좋은 갈색 건물이 바로 ‘그림책 정원 – 초방’입니다.
■ 그림책 정원 - 초방
“어? 나 여기 와본 적 있어, 기억나. 여기 물고기 사인 해준 아저씨 만난 곳이야.” 둘째는 예전에 이억배 님의 사인회가 열렸던 초방의 어느 날을 기억해내고는 신이 나서 초방의 문을 열고 들어가네요.^^
| 초방 입구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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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은 달려온다』『솔이의 추석 이야기』『만희네 집』『기차 ㄱㄴㄷ』 등 귀에 익은 그림책을 기획하고 출판하며 우리에게 익숙해진 초방은 우리나라 최초의 어린이 그림책 전문 서점으로, 2003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새롭게 원화전, 그림책전, 자료전, 생각전 등의 전시회와 그림책 기획, 연구, 출판 등 다양한 활동으로 어린이 그림책 창작에 활기를 불어넣는 문화공간으로 자리 잡은 곳이랍니다.
마침 우리가 간 날은 토요일이라 초방에서는 작은 벼룩시장이 열리고 있었어요. 벼룩시장이라고는 하지만 왠지 색다른 분위기라 학교에서 친구들과 왁자지껄하며 열었던 바자회나 다양하고 재미난 물건을 만나보았던 홍대 앞의 ‘희망시장’을 떠올린 아이들에게 약간은 낯선 분위기였다고 할까요? 마침 초방의 주인장인 신경숙 님을 만날 수 있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 초방 벼룩시장 물건들이 진열된 앞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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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숙 님은 초방을 ‘그림책 정원’으로 소개하고픈 이유로 “정원은 정원을 가꾸는 사람도 있지만 정원을 구경하러 오는 사람도 있고, 또 정원이 무얼 하는 곳인가 궁금해서 기웃거리는 사람도 있고 정원에 자신만의 터를 만들려고 땀을 흘리는 사람도 있고 정원에서 힘써 가꾼 것을 함께 나누는 사람도 있는 다양한 공간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어요. 그 과정의 하나로 기획된 것이 바로 ‘초방 벼룩시장’이라고 하네요. 그림책을 좋아하는 작가와 지인이 하나 둘 모여 그림책을 만드는 재능 외에 다른 재주를 펼쳐보이며 그림책 외에 다른 매체로 세상과 만날 수 있는 작업을 도모해 보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했습니다. 작년 11월부터 다시 시작한 벼룩시장은 올해에는 좀 더 다양하고 재미난 작업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하네요.
초방에 들어서면 전면에 어린이 책을 가득 메운 책장, 나지막한 아이 책상과 의자가 어쩐지 오래전 졸업한 초등학교 교실을 다시 찾은 느낌이 들게 합니다. 아이도 어느새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책 중 하나인
『구리와 구라』 시리즈를 골라서는 책 속으로 빠져들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책을 읽습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이곳에 오신 분이 책을 소홀히 다루는 모습을 보게 될 때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요.” 이야기를 마칠 때쯤 신경숙 님의 이 말씀은 책을 좋아하고 책이 있는 곳을 찾는 이라면 한 번쯤은 꼭 생각해 봐야 할 이야기 같았어요.
저도 꼭 필요한 책을 서점에서 구입하려고 했는데 마침 딱 한 권 남은 책은 돈을 주고 사기엔 너무 많이 훼손되어서 그만 아쉽게도 포기한 적이 있었거든요. 방학을 맞아 초방처럼 책이 있는 공간으로 책 나들이를 떠나는 부모와 아이를 자주 볼 수 있는데 당장 내가 구입할 책이 아니라고 해서, 또 내 책이 아니니까, 또 달리 감시하는 사람도 없으니까 함부로 책을 보거나 훼손을 하고도 그냥 나 몰라라 하고 가는 사람들도 있을 것 같거든요.
그렇지만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무심코 한 행동이 타인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보면 어떨까 합니다. 공공도서관은 그런 일이 너무 비일비재해서 서가에 꽂힌 책 중에는 연필로 줄이 그어져 있거나 책 모서리가 접혀있거나 팝업 북은 뜯겨 나가거나 페이지가 없어진 채 반납되는 일도 많이 보았거든요. 내 것보다 모두의 것에 더 소중한 가치를 둘 수 있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고 저부터도 반성을 하게 되었어요.
초방은 차를 마실 수 있는 휴식 공간도 함께 있어서 종종 북 카페로 소개되기도 하지만 그곳의 책은 열람과 함께 판매하기 위한 책이다 보니 더욱 소중히 다루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이곳에서는 요일별로 그림책을 만드는 작가나 일러스트레이터 분들이 돌아가며 하루씩 초방을 방문하는 분들에게 친절한 안내와 지킴이 역할을 한다고 하네요.
매주 토요일마다 열리는 벼룩시장 외에도 매주 수요일 오후 3시에는 ‘일본 그림책’을 읽어 보는 시간이 있다고 합니다. 그림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데 자신이 읽고 싶은 일본 그림책이나 번역된 일본 어린이 책 한 권을 가지고 와서 함께 읽어 보는 시간이라고 하네요. 참여하는 분 중에는 일본에서 한국에 유학 온 학생이나 그림책 작가지망생, 일반 독자 등 다양하다고 합니다. 저도 아이들과 재작년 일본 이와사키 치히로 미술관에 갔을 때 구입했지만 일어로 되어 있어서 그냥 책꽂이 한구석에 꽂아두었던 동화책이 생각나서 방학이 끝나기 전 아이들과 함께 그 책을 들고 참여해봐야겠구나 생각했답니다.^^
| 어린이 책이 빼곡히 진열된 책꽂이 앞에서 독서에 빠져있는 아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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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 사주세요’ 맘에 든 책을 고른 첫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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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방 내에 있는 차와 이야기가 있는 공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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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큰아이는 직접 만든 노트와 손뜨개 모자, 작은 기타, 팔찌, 장신구 등을 꼼꼼히 살펴보았고 둘째는 책을 읽고 나서는 한쪽에서 스크린으로 보여주는 동화이야기를 보았어요.
아이들은 벼룩시장에서 맘에 드는 물건이 있으면 구입하려고 각자 가져간 용돈으로 예쁜 노트 2권과 백지로 엮인 책을 샀습니다. 그 책으로 ‘나만의 책 만들기’를 해보겠다고 하며 밝게 웃는 아이들과 집으로 돌아가려고 초방을 나서는데 신경숙 님이 직접 만든 한지 책갈피를 아이들에게 주며 수줍게 웃으시네요. 덕분에 저와 아이들은 빨강, 파랑의 종이 리본이 달린 책갈피를 손에 쥐고 행복한 웃음과 함께 집으로 향했습니다.
“엄마, 다음번에 우리도 초방 벼룩시장에 참가해요.”
“어떤 걸로?”
“그때는 내가 만든 책을 가지고 올 거예요.”
“무슨 책을 만들 건데?”
“그건 비~밀~. 헤헤.”
뉘엿뉘엿 지는 해를 따라 하하 호호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려가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보며 어딘가 다시 가보고 싶은 공간이 있다는 게 고맙고 새해 새로운 꿈을 하나 더 가지게 된 아이가 부럽기도 하고 나도 뭔가 아이만큼 신나고 재미난 일을 올해는 꼭 하나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행복한 하루였습니다.
[TIP]
● 초방
- 홈페이지:
//www.chobang.com
- 전화번호: 02-392-0277
- 운영시간: 오전 10시~오후 10시
● 프린스턴 스퀘어
- 홈페이지:
//www.princetonsquare.co.kr
- 전화번호: 02-393-5171
- 운영시간: 오전 10시~오후 11시
● 바비 카페
- 전화번호: 02-313-98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