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오랜만에 읽은 두꺼운 책은 바로 무하마드 유누스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은행가』라는 책입니다. 작은 글씨의 압박뿐만 아니라 내용 또한 가볍게 읽을 것은 아니기에 며칠 동안 내내 책과 씨름하며 지냈는데 그 이유는 바로 이 책을 가지고 책 읽기 모임에 참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아이들과 책 읽기 모임에 참석하려고 땅거미가 어스름하게 질 때 이대역에 내렸습니다. “엄마, 오늘은 어디 가?” 아이들이 묻기에 오늘은 아름다운 가게에서 하는 헌책방에 간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지하철 2호선 이대역에 내려서 신촌 기차역 쪽으로 쭉 내려가다가 서대문 경찰서 신촌지구대 앞 건널목을 건너면 함평뚝배기집이 있습니다. 뚝배기집 골목으로 들어서면서도 도대체 어디에 책방이 있을까 하며 두리번거리는데 작은 아이가 “여기 있다!” 하고 소리친 곳을 보니 화살표 모양의 초록색 안내판이 전봇대 아래 빠끔 머리를 내밀고 있네요.
‘아름다운 책방 – 뿌리와 새싹’
화살표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골목길을 들어서니 책방이 나왔습니다. 한옥을 리모델링한 책방의 유리문을 밀고 들어서자 아늑하고 멋진 헌 책방이 우리를 반겨주었습니다. “우와… 여기가 헌 책방이야? 정말 정말 예쁘다”
| ‘뿌리와 새싹’ 안내 표지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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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뿌리와 새싹’ 앞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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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책방 - 뿌리와 새싹(roots & shoots)’은 아름다운 가게에서 운영하는 헌책방입니다. ‘뿌리와 새싹’은 제인 구달 박사가 ‘환경, 동물, 이웃을 위해 성심껏 살아가는 이들에게 제안하는 모임’의 이름이라고 하네요. 좋은 책에 뿌리를 내리고 그 안에서 철학과 행동의 새싹을 틔워낸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고 합니다.
회원들의 기증과 아름다운 가게를 통해 들어오는 책과 음반, 비디오 등 12,000점에 이르는 보물이 작은 공간 여기저기에서 새 주인을 기다리는, 참 아기자기하고 재미있는 공간이었습니다. “엄마, 여기 참 재미있어요. 화장실도 그렇고.” 아이의 말처럼 이곳의 인테리어는 참 독특하고 정감이 넘쳤습니다. 가로세로로 놓은 책장으로 어른 책과 아이 책을 구분하고 한쪽 공간에는 ‘House in the loft’라는 이름으로 박세현 작가의 멋진 도예작품을 책과 어울려 전시해놓았어요. 또 주방도 있었는데 이곳 책방지기님의 말씀에 따르면 각종 차와 유기농 커피 등이 300원에서 500원대라고 하네요. 우리가 도착했을 때 LP판이 수북이 쌓인 곳에서 멋진 음악을 틀고 계셨던 책방지기님은 이곳과 함께한 지 1년이 되었다며, 천천히 아이들과 둘러보라고 하시며 편안한 웃음으로 맞아 주셨습니다.
| 각종 비디오, CD, 만화책이 진열된 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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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시 공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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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구경하다가 보니 한쪽에 ‘뿌리와 새싹 도서관’이라고 쓰인 종이가 붙은 책장이 보였습니다. ‘환경, 생태, 동물, 평화, NGO’ 등의 관련 책을 책꽂이 하나에 모아두었는데 이 책들은 대여와 열람만 가능한 책으로 (도감류는 열람만 가능) 1인 2권까지 대여 가능하며 대여기일은 10일이고 한 권당 500원의 기부금을 받는다고 하네요. 도서관이라면 뭔가 공간이 필요하고 그럴듯한 책꽂이와 책이 많아야 한다는 생각을 한순?에 깨는 멋진 발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책꽂이 하나로도 간단하게 미니 도서관을 꾸밀 수 있다면 정말 재미있는 공간이 많이 늘어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니까 무슨 일이든지 작고 소박하게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리고 한옥만의 장점인 마당이라는 공간을 새롭게 되살린 곳이 있는데 바로 화장실이랍니다. 유리로 된 문을 밀고 나가면 있는 한 평 정도 남짓한 곳이지만 갑자기 밀려드는 찬 공기와 도시의 소음을 듣게 되면 순간 깜짝 놀라게 된답니다. 그리고 그제야 ‘아, 원래 이곳이 한옥이었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지요. 화장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또 재미있는 공간이 기다립니다. 숟가락과 젓가락을 꽂아 만든 비누받이, 병뚜껑을 이용해서 타일보다 더 예쁜 공간으로 바꾼 거울과 세면대를 보면 저절로 웃음이 지어집니다. 생활 속의 아름다움은 이런 아이디어와 실천하는 수고로 더욱 빛나지 않을까, 나는 여태 그런 수고로움을 대신할 더 쉬운 방법만을 찾으려 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작은 공간이지만 둘러보면 둘러볼수록 속속 새로운 공간을 찾는 재미 덕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구경을 하는데 어느새 책 읽기 모임을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뿌리와 새싹]은 평일 저녁, 책방 성격에 맞는 15인 내외의 문화적 모임에 한해 모임터를 제공한다고 하네요. 어른들이 책을 가지고 열심히 각자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듣는 동안 아이들은 마음껏 자신이 읽고 싶은 책을 읽고 책방 구석구석을 돌아보며 즐거운 책 여행을 하였습니다.
| 책 읽는 아이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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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뿌리와 새싹’에서 책 모임하는 어른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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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시간 정도의 책 읽기 모임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갈 시간, 책방과 아쉬운 작별을 하고 옹기종기 한옥이 모인 골목길을 돌아 나오는데 둘째가 “엄마, 헌책방 주인도 직업이야?” 하고 살짝 묻습니다. “그럼” 하고 제가 대답해주자 녀석은 활짝 웃으며 이렇게 말하네요. “나, 그럼 나중에 커서 헌 책방 주인 될 거야!!!” 아마 아이도 오늘 제가 [뿌리와 새싹]에서 느꼈던 기분… 오래된 것, 조금 느린 것, 그러나 왠지 오래 신은 신발처럼 편안하고 정겨운 무언가를 느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데요.
조용한 골목을 지나 성큼성큼 도시의 네온이 빛나는 거리로 걸어나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면서, 누구나 알 수 없는 미래겠지만 아이가 지금의 그 마음, 오늘의 그 느낌을 커서도 잊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TIP]
아름다운 가게 헌책방 [뿌리와 새싹]
- 홈페이지:
//cafe.naver.com/rootsandshoots.cafe
- 전화: 02-392-6004
- 운영시간: 월~토 오전 11시~7시(법정 공휴일 휴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