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널예스에서는 연말 특집 - ‘키워드로 보는 2006 출판 트렌드’를 12월 동안 매주 목요일 총 4회 연재합니다.
키워드는 2006년 출간된 도서 종수와 판매량을 근거로 추출되었으며, 각 키워드에 해당되는 책 중 출간 의의나 기획에 있어서 가장 주목할만하다고 평가되는 책을 한 권 선정, 해당 책을 책임 기획, 편집한 제작자를 만나 그 비하인드 스토리를 직접 듣는 것이 이번 특집의 내용입니다. 앞으로 한 달 동안 매주 목요일에 찾아갈 ‘채널예스 연말 특집 - 키워드로 보는 2006 출판 트렌드’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연재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12월 7일 : 자기 계발 (대표도서 - 『달란트 이야기』)
12월 14일 : 좋은 부모 역할 배우기(대표도서 - 『부모와 아이 사이』)
▶ 12월 21일 : 팩션 그리고 음모(대표 도서 - 『조선을 뒤흔든 16가지 살인사건』)
12월 28일 : 2030 여성(대표도서 - 『모든 여자의 인생은 이십 대에 결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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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변주하는 역사책
시대별로 주요한 사건을 주로 다루는 통사 형태의 한국사 기술에 새 바람을 몰고 온 책은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가 아니었던가 싶다. 그 후 이이화 선생의
『한국사 이야기』 시리즈가 속속 나왔고, 역사를 다루는 시각과 방법은 다양해져 갔다. 독자의 관심과 요구도 날로 다양하고 세분화해 갔다. 한국사는 아니지만 외부자의 시선으로 로마 제국의 흥망성쇠를 열정적이고도 흥미롭게 그린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도 역사 읽기의 새로운 즐거움을 안겨주며 많은 독자를 역사의 세계 속으로 초대했다.
역사를 위시해서 인문학서 전체에서 최고의 스타 작가 중 하나로 군림한 이덕일 교수와 그의 책도 읽기 쉽고 재미있는 대중 역사서 시장이 성장하고 풍부해지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다채롭고 새로운 실험이 꾸준히 이루어지는 가운데, 이러한 책의 출간과 그것이 독자에게 받은 반응은 독자가 역사책에서 사실뿐 아니라 이야기를 바란다는 점을 보여준다. 주요 사건 중심의 역사책이 백성의 옛 일상과 역사를 들여다보는 것으로 변화를 꾀하기 시작했다면, 그 가지는 여러 군데로 뻗어나갔다.
1990년대 중·후반에 풍미한 대중문화 혹은 하위문화에 대한 관심의 영향이 있겠거니와, 조선 말기에서 일제 강점기까지의 ‘건달’ 혹은 모더니스트를 그린 책도 적지 않게 쏟아져 나왔다. “경성에 딴스홀을 허하라” 같은 슬로건을 소개하며 소설의 상상력으로 그 시대를 그려냈던
『망하거나 죽지 않고 살 수 있겠니』 이후에는 ‘경성’을 제목에 넣어 환란 가득했던 시대의 잘 알려지지 않은 이면을 파헤치는 책이 여러 권 나왔다.
이번에는 음모다
2006년 역사서 시장은 바야흐로 음모와 스캔들에 주목하고 있다. 서구에서는 예전에
『장미의 이름』이 있었고, 최근에는
『다 빈치 코드』가 있었다. 사실로 확언하기 어려운 음모 이야기에 치밀한 추리를 입혀 독자를 흡입하는 책이 팩션faction이라는 형식으로 여러 권 출간되었다. 그러고 들자면 모든 것을 음모로 볼 수도 있지만, 바로 그 음모 때문에 역사의 무덤에 묻혀버린 사실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 그것을 추적해 가는 과정이 독자의 눈을 즐겁게 했던 해였다.
여기에 전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국내에서도 성공을 거둔 미국 TV 시리즈 〈CSI〉 덕분에 범죄를 푸는 법의학에 대한 관심이 국내 영화나 도서에 어느 정도 번진 측면도 있을 것이다. 본격적인 한국형 팩션을 표방하고 나선
『뿌리 깊은 나무』와
『경성기담』이 올해 출간되었다. 음모가 발 디딜 틈이 있을까 싶게 강력한 신분사회에서 일어난 음험한 사건들이 일부나마 쉬쉬 전해져 내려온 것에 픽션의 상상력을 보탠 팩션이 한 분야로 자리 잡아 가고 있다.
| ‘음모’가 팩션의 한 분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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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만 부가 팔린
『조선 왕 독살사건』에서부터 출간된 지 3개월 만에 3만 부 이상의 판매량을 올린
『조선을 뒤흔든 16가지 살인사건』의 다산초당을 찾았다. 편집자는 전에 있던 출판사에서
『핑거 포스트, 1663』『신곡』『군주론』 등을 작업했던 김계옥 대리다.
발걸음을 내디딘 팩션
“팩션은 정보와 자료 부족이라는 물리적인 이유 때문에 선택하게 되는 형식이기도 합니다. 더구나 살인이나 스캔들같이 은밀한 구석이 많은 사건에 대해서는 남아있는 자료를 찾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지요. 하지만 자료가 부족하다고 해서 무언가 일어났던 일에 대해 말하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그래서 더 재미있을 수도 있는 거니까요. 재미있는 역사책을 찾는 독자에게 새로운 소재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역사적 사실을 읽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야기 속에서 감동과 깨달음을 얻고 싶어 하는 독자가 정말 많다고 느껴요. 살인 사건은 조선 시대 사람도 욕망과 열정과 탐욕, 원한에 몸부림치며 살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그들의 아주 은밀한 부분까지 들여다보게 해주니까요.”
이랬으면 어땠을까, 저랬으면 어땠을까 하는 가정으로 지나간 역사가 바뀔 리는 없지만 이야기는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 색다른 역사책이나 추리문학을 좋아하는 독자 모두에게 이런 소재나 구성을 통해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었다는 얘기다.
“조선 시대 사람은 그런 범죄 사건을 어떻게 해결했을까? 당시에도 나름대로 과학 수사가 있었습니다. 수사관에 따라 가능한 조건에서 범죄를 해결하고자 특출한 창의력을 발휘하기도 했고요. 책에도 『무원록』이라는 책의 존재가 나오는데, 그 뜻이 억울한 백성이 없게 하는 것이니까, 주먹구구식으로 조사하고 문초를 하는 것만으로는 취지를 실현할 수가 없었겠지요. 부족한 사실로 역사를 재구성한 『조선을 뒤흔든 16가지 살인사건』도 그렇습니다. 그것도 작가의 머릿속에서만 주먹구구로 그려져서 나온 것이 아니라, 치밀한 조사와 추리를 통해서 그럴 듯한 이야기로 새로 태어난 것입니다.”
막강한 판매량을 올렸던
『다 빈치 코드』의 성공과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비슷한 드라마를 양산했던 〈CSI〉로 분위기가 조성된 것도 무시할 수 없다. 영화로는
<혈의 누>, TV 프로그램으로는 <별순검> 같은 국내 작품이 큰 인기를 얻기도 했다.
“팩션에 대한 수요도 커졌고, 여러 드라마나 인기가 얻은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혈의 누> 같은 한국 영화를 본 관객층과 우리의 독자층이 겹치는 부분이 더 많지 않을까 합니다. 『조선을 뒤흔든 16가지 살인사건』도 역사책과 추리문학을 좋아하는 30~40대의 남성 독자층이 많습니다. 시신 검시라든지 과학수사를 했다는 것도 신기하지만, 살인 사건 자체가 일어나고 그런 범죄를 풀려고 노력했다는 사실에도 독자가 많은 호기심을 가지는 것 같아요. 어떻게 살인자를 찾는지 좇는 가운데, 추리를 통해서 그 시대 사람들의 욕망을 목격하고 풀어보는 재미가 있는 거죠.”
아주 심하게 수직적이고 폐쇄적인 사회이다 보니, 전쟁이나 집단적인 싸움 외에 살인이 일어났다는 것이 일견 생소하게 보일 수도 있다. 양반에게 인간이라기보다는 재산 대접을 받던 천민이 죽임을 당한 것에 수사씩이나 했을까 싶기도 하다. 그리고 실제로 부리던 종을 죽인 양반이 고초라고는 전혀 받지 않고 버젓이 사는 일도 많았다. 하지만 시대가 언제이며 어느 곳이 되었든 사람 모이는 때와 곳에는 별별 일이 다 벌어지는 법임을 생각해 보면, 더 흥미로운 것은 지금의 상식과는 사뭇 다른 법과 정의에 대한 감각일 듯하다.
“조선조 초기에는 꼭 공인된 법기관을 통해서가 아니라고 해도 복수를 은연중에 허용하는 분위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현대의 법체계에서 사적인 복수는 있을 수가 없는 일이지만, 복수심이란 누구나 품을 수 있는 아주 인간적인 감정이 아닙니까? 게다가 피해자가 힘이 없는, 약한 쪽이라면 공공연히는 못해도 속으로 공감할 수 있는 것도 컸을 테고요. 또 옛날에는 정당방위의 개념도 없었다고 해요. 행실이 방정치 못한 여동생을 소위 ‘명예살인’하기도 했고요. 현대와는 다른 점이 많은 법과 정의의 개념을 다양한 각도로 해석해 볼 수 있는 여지도 이 책이 보여준 것 가운데 하나라고 봅니다.”
한국 팩션의 전망과 방향
| 『조선을 뒤흔든 16가지 살인사건』의 저자 이수광 씨를 발굴한 다산북스의 김선식 대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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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계옥 대리는 또 역사책을 좋아하는 독자는 기본적으로 사람과 사람살이에 관심이 많다는 특징이 있다고 생각한다.
『조선을 뒤흔든 16가지 살인사건』에도 저항할 힘이 없는 피해자가 많이 나온다. 그 억울하고 힘없는 사람들과 울분을 함께하고, 시대상의 아픔을 느껴보는 것이다. 저항해 볼 길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 정의를 찾고 원을 풀려고 어떻게 분투해 내는지 따라가 보면서 공감이 형성되는 듯하다고 김계옥 대리는 말한다.
그런 공감을 이끌어내는 책을 기획하면서, 김선식 대표가 눈여겨보던 저자가 있었다.
『나는 조선의 국모다』『천 년의 향기』 등으로 장쾌한 역사소설을 선보여 왔던 이수광 씨가 그다. 많은 역사소설을 써온 경험은 조선 시대에 벌어진 살인사건, 흔적이 눌려져 왔던 살인사건을 재구성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또 소설 형식에 설득력을 입히고자 자료 사진을 일일이 찍어서 싣는 공도 기울였다.
대중적 교양서라는 이름으로 정통 인문학보다는 가벼움만을 추구한다, 역사를 왜곡한다는 비난을 받는 것에 대해, 다가올 새해 역사서와 이제 본격적인 궤도를 향해 나아가는 팩션의 전망과 방향에 대해 김계옥 대리가 말한다.
“매일 독자의 반응에 촉각을 기울이고 사는 기획자는 독자의 바람이 얼마나 다양한지 피부로 느낍니다. 그러니까 물론 무게감 있는 인문서의 기획도 게을리 하지 말아야겠지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재해석과 재구성에 대해 독자가 날이 갈수록 관대해지고 있다는 것도 느낍니다. 재미있게 읽는다고 사실로 믿어버린다는 뜻이 아니고, 재미있고 가볍다고 해서 의미나 깊이가 없다고 볼 수도 없습니다. 이덕일 교수의 쟁점사 시리즈 『조선 왕 독살사건』이나 『조선 선비 살해사건』 같은 책만 해도 그렇고요. 2007년에는 소재를 다채롭고도 참신하게 세분화하면서 독자와 호흡을 맞추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CSI〉 등을 봤던 사람들이 좀 더 나이가 들어 같은 소재로 더 풍요로운 이야기를 쏟아낼 수도 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