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쓰러졌었다. 큰 수술을 받았다. 그런데 그때나 지금이나 내 몸 상태에 대해 의사에게 안 물어본다. 모르는 게 약이다. 겁이 나서 투병기도 잘 못 읽는다. 투병기의 주인공이 나와 비슷한 질환인 경우는 더 그렇다. 영국 BBC 기자의 투병기를 부들부들 떨면서 이곳저곳 넘겨보다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병명이 눈에 들어온다. ‘신경교종(glioma)’이다.
서둘러 집에서 가까운 도서관을 찾아가 의학사전을 뒤적인다. “뇌와 척수의 내부에 있으면서 신경조직의 결합, 지지, 영양 등의 작용을 하는 신경교의 종양. 특히 뇌수에 다발하며, 전체 뇌종양의 40%를 차지한다.” 그나마 보험사 제출용 진단서에서 옮겨 적어놨던 세부적인 병명은 BBC 기자와 다른 것 같아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다.
이건 바로 내 얘길세
『나는 침대에서 내 다리를 주웠다』(한창호 옮김, 소소, 2006)는 영국 출신 신경과의사 올리버 색스(Oliver Sacks, 1933- )의 병상일기다. 의사인 그의 환자 체험은 마치 내가 치른 일 같다. 색스는 환자가 겪는 일반적인 상황을 아주 실감나게 표현한다. 불의의 사고를 당하는 장면부터 한번 따라가 보자. 그리고 거기에 내 경험을 얹는다.
24일 토요일, 색스는 노르웨이에 있는 어느 외진 산을 오르다 발을 헛디뎌 왼쪽 다리를 심하게 다친다. 죽을 고비에서 순록 사냥꾼 부자에게 발견되어 구사일생으로 살아남는다. 그런데 “구조된 순간부터는 덜 생생하고 잘 떠오르지도 않는다.”
나도 그랬다. 13일 금요일 아침, 나는 발작을 일으켰다. 처음 있는 일이다. 다행히 곁에 아내가 있었다. 그날 일이 기억나지 않는다. 겨우 두 컷만 떠오른다. 한 컷은 내가 병원 응급실에 누워 있다. 다세대 주택의 계단을 걸어 내려가는 장면은 아내가 기억을 되살려 주었다. 내가 응급후송요원의 들것에 의지하지 않고 걷기를 자청했단다. 이튿날의 기억도 희미하다.
“거의 기적같이 지상으로 다시 귀환하는 행운을 누렸다. 그런데 뒤이은 나날들에 긴장과 연관성을 제공해 주는 이야기나 특별한 기분은 어떤 의미에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 뒤의 나날들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게 어렵고 심지어 생생하게 기억하기가 힘겹게 느껴진다. 나는 안전하다는 확신과 편안함을 느끼자마자 산 위에서의 생생하고 열정적인 감정들이 갑작스럽게 고갈되었다.”
나는 환자일기를 수술 전전날까지 썼지만 수술 후에는 쓰지 않았다. 수술을 받으려고 병원에 입원한 수술 전날은 아주 착잡했다. 앞서 수술에 필요한 각종 검사를 받으려고 사흘간 입원했을 때보다 훨씬 마음이 무거웠다. 발작 직후 8일간의 병원 생활에서는 육체적 충격 때문에 그런 기분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그날 늦은 시간에 예상치 못한 분들이 문병을 와주어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내가 아는 시민단체의 실무자 한 분이 군 복무 중 같은 증상으로 수술을 받고 지금까지 멀쩡하게 지낸다는 얘기에 큰 위로를 받았다. 늦은 밤, 형님과 함께 나를 맡은 의료진의 수련의에게 들은 섬뜩한 수술 부작용을 개의치 않을 정도의 평정을 얻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튿날 아침, 실체를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그 두려움 속에는 죽음도 분명히 포함되어 있었지만, 그것을 단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라고만 부를 수 없을 것 같다. 그것은 산에서 결코 경험하지 못했던 악몽 같고 불길한 어떤 감정으로, 음산하고 딱히 이름 붙이기도 어려운 내밀한 무언가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아침 8시, 수술실로 향하는 동안 음산하고 내밀한 두려움이 몰려왔다. 누운 채로 병원 복도의 천장을 물끄러미 봐서 그랬을까. 그런 기분이 전달됐는지 침대차를 밀고 가는 병원직원이 눈을 감으면 한결 나아질 거라 했다. 그렇게 하자 기분은 한결 좋아졌지만 이동거리는 훨씬 길게 느껴졌다.
“병실에 자리를 잡자마자 외과인턴과 기록계원이 방문했다. ‘병력(病歷)’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몇 가지 어려움이 있었는데, 그들은 특기할 사실만을 알고 싶어 했지만, 나는 일어난 모든 것을 말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나한테도 간호사와 수련의가 와서 병력을 물었다. 나는 특별한 것만 얘기하고 싶었지만, 그들은 모든 것을 알고 싶어 했다.
“나는 과도할 정도로 우울했다.” 검사를 위한 입원기간과 수술 전날의 나는 침착하고 담담한 명랑, 쾌활형 환자였다. 하지만, 수술 후에는 정반대였다. 간호사의 걱정을 살 정도로 나는 태도가 바뀌었다. 머리를 ‘열었다’는 자괴감 때문이었을까. “갑작스럽게 나는 쓸쓸하고 버림받은 처지가 되었고 병원에 입원한 이래 처음으로 환자로서의 근본적인 외로움을 느꼈”던 것이다. 나는 간호사의 걱정을 듣고 현실을 긍정하려 노력했다.
“나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무슨 일이 벌어질지를 알려주었고, 만일 운이 나빠서 수술을 받다가 사망하면 내 노트들과 출판되지 않은 글들에서 적절한 초록들을 택해 알맞다고 생각되는 글들을 출판해 달라고 유언을 남겼다.” 나는 환자일기에다 아직 책으로 묶이지 않은 기고문 목록을 1쪽 작성하다 말았다. 누군가 알아서 해주겠지, 라는 막연한 기대심리보다는 수술 받는 병원의 1%도 안 되는 수술 도중 사망률에 마음을 놨던 것 같다.
“이 장면과 더불어 나는 의식을 잃었다.” 나는 언제 의식을 잃었는지 모른다. 다만, 수술준비실의 분위기가 생각보다 더 칙칙하다는 기억은 남아 있다. “나는 병상에 누워 있었는데 누군가가 나를 흔들며 이름을 부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눈을 떠 보니 인턴이 내 쪽으로 몸을 기대고 있었다. ‘어떠세요?’ 그가 말했다.”
나를 맡은 의료진의 말번 수련의가 뺨을 때리자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수련의가 수술이 아주 잘되었다고 했다. 그 와중에도 나는 고맙다고 인사치레를 했다. 24시간의 마취에서 깨어난 느낌은 묘했다, 이상했다. 내가, 내가 아닌 듯했다. 수술환자를 깨우는 곳이 중환자실이어서 더 그랬을 것이다. 아버지와 둘도 없는 친구가 다녀갔다. 사람을 더 보고 싶지 않았다. 대학병원 중환자실은 살벌했다.
“나를 완쾌시켜 준 외과의사와 병원 직원들 그리고 나를 안전하게 후송시켜 주었던 노르웨이의 선량한 사람들에게 감사를 느꼈다.” 13일의 월요일, 이번에는 출판사 사무실에서 쓰러졌다. 병원으로 실려 가는 구급차 안에서 정신이 잠시 든 사이, 응급구조원에게 지난번에 못한 것까지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했다.
“한 달 정도 병원에 입원해야 하고 그다음 몇 달 요양을 해야 한다.” 나는 발작 직후 8일, 수술을 위한 검사를 위해 3일, 수술하고 나서 9일, 이렇게 20일간 입원했다. 요양은 집에서 한 셈인데 색스가 들려주는 영국의 병원과 요양원의 연결체계는 부러움을 살 만하다. 그런데 나는 병원에서도 찬밥 신세가 되었다. 수술이 잘된 게 탈이었다. 이제 나는 의료진의 주목 대상이 아니었다.
“정형외과의사들에 반대하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훌륭한 일을 하고 있죠. 그러나 그들은 결코 움직임과 자세에 대해 고려하는 것 같지는 않아요. 그들은 몸이 일단 제대로 자리를 잡고 난 뒤 어떻게 움직일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아요.” 색스를 돌본 물리치료사의 지적도 타당하나, 색스 이모님의 견해는 정곡을 찌른다.
“외과의사한테서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지 마라. 그가 선량한 사람이고 최고의 외과의사임을 확신한다만, 이런 일은 수술의 영역을 넘어서는 것이지. 그가 완전하게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화를 내선 안 된다. 그에게서 불가능한 것을 기대해서는 안 돼. 너는 한계를 예상해야 하고 존중해야 해. 우리 모두가 그렇듯이 그는 여러 한계를 지니고 있을 거야. 직업적 한계, 정신적 한계, 정서적 한계, 가장 특별하게는….”
색스가 예상한 보험회사 직원이 할 법한 말을, 나로선 상상하기조차 어려웠다. “이러한 증후군은 확률상 60퍼센트 정도로 관찰됩니다. 그것은 다양한 방식으로 x, y, z에 그 원인이 있습니다. 회복률은 이런저런 요인들과 다른 예측할 수 없는 요인들에 따라 다양하게 산출됩니다.”
쓰러지기 열 달 전,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보험에 들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가입한 민간보험이었다. 보험의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나는 여전히 보험을 불신한다. 가입 1년이 넘지 않았다는 이유로 보험회사 조사원이 찾아왔다. 그는 병원의 기록도 뒤졌다. 집까지 찾아온 보험회사 직원에게 나는 내 머리를 들이밀었다. 똑바로 보라고, 이게 보험 사기냐, 하고. 결국, 청구한 보험금을 받았지만, 보험 가입자의 꼬투리를 잡아 보험금을 안 주려는 보험회사의 태도가 몹시 불쾌했다.
“음악의 첫 마디와 더불어 다리에 생명력이 회복될 것이라는 희망과 암시를 느꼈다.” 집에 와서 육체적 회복은 빨랐으나, 정신적 회복은 더디기만 했다. 그저 멍하기만 했?. 수술 3주 후 아들이 태어났다. 갓난 아들을 보자 정신이 들기 시작했다. “회복은 완만하게 경사진 길이 아니라 이전 단계에서는 생각하기 어렵고 불가능하게 보이는 일련의 급격한 단계들로 이루어진 과정이다.”
“이제 수간호사가 실을 뽑을 겁니다.” 나는 의사가 뽑아줬다. 어떻게 자기네 병원에 왔느냐는 의사의 질문에 나는 집에서 가까운 종합병원이고 신경외과가 있어서, 라고 대답했다. 덜 뽑힌 실밥 하나를 병원 화장실에서 직접 뽑았다. 시원섭섭했다. “환자로서 3주라는 길지 않은 기간 동안 공포에 떨며 실제 세상을 완전히 망각해 버렸던 것이다.”
마취에서 깨어난 날, 나는 침대에 누워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래야 하는 줄 알았다. “당신에게 가장 적절한 치유책은 수영하러 다니는 겁니다.” 담당의사는 내게 걷기를 강조했다. 괴상한 몰골로 병원 복도를 걸어다녔다. 복도에서 다른 환자들과 자주 마주쳤다. 걷기가 수술환자의 일반적인 회복책인 모양이다.
“환자들 모두 몹시 병원을 떠나고 싶어 했으며, 바깥으로 나가고 싶어 했으며,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그러한 기대는 이미 익숙해 있는 돌봄과 길들여진 유아적 상태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했다. 환자들은 모두 의식적으로는 젖을 떼고 싶어 했지만 무의식적으로는 두려워했고, 젖떼기를 중단하려 하면서 응석받이로 자란 특별한 처지를 연장하고자 애썼다.” 또한 “이 모든 것에 대해 쓰는 것은 몇 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어렵다.”
“병은 인간이 처한 본질적인 조건이다”올리버 색스는 1938년 여름, 그러니까 여섯 살 때 나선형으로 된 작은 통꽃들이 소수(素數)의 배수가 된다는 것을 발견하고서, 훗날 경험할 모든 과학적 경이와 즐거움의 원형이 될 세상에 대한 질서와 미적 시각을 가질 정도로 조숙했다.
『엉클 텅스텐』(이은선 옮김, 바다출판사, 2004)은 ‘꼬마 올리버의 과학 성장기’이자 로버트 보일부터 닐스 보어까지 약 2세기에 걸친 화학의 역사를 돌아본 개인 회고록이다. 올리버는 자손이 번성한 유대인 집안 출신이다. 그의 어머니는 18남매 중 열여섯째였고, 그는 4형제 중 막내다. 사촌들은 거의 100명에 육박한다. 정작 그는 아직 미혼이다.
이외에 그의 단독 저서 두 권은 임상보고서다. 한국어판 부제목이 ‘뇌신경과의사가 만난 일곱 명의 기묘한 환자들’인
『화성의 인류학자』(이은선 옮김, 바다출판사, 2005)는 신경병이 원인이 되어 변화한 사람들의 기록이다. 대안의 존재 방식, 새로운 생활 모습, 전혀 다른 인간으로 변화한 사람들의 기록이다.
“이 책에는 자연과 인간의 의지가 뜻밖의 충돌을 빚은 일곱 편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투렛증후군에서부터 자폐증, 기억상실, 전색맹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신경병의 습격을 받은 일곱 명의 주인공은 의학계의 전통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일종의 ‘사례’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나름의 세계관을 구축한 독특한 인간이기도 하다.”
책의 주제를 질병의 역설적 측면과 숨겨진 ‘창의력’으로 설정한 색스는 그가 만난 환자들에게서 본 질병의 이면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신경학자들이 신경 손상과 파괴로 말미암은 모든 질병에 주목하는 까닭은 이를 통해 신경계의 구조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뇌색맹은 뇌가 어떤 식으로 색채를 ‘인식’하는지 알려주는 열쇠가 된다. 그런데 조너선 I.의 경우는 색이 그의 생활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데다가 그가 눈앞의 현상을 정확히 표현하고 그릴 줄 아는 화가이기 때문에 대뇌색맹의 생소함과 고통과 실체를 완벽하게 전달할 수 있다는 점에서 두 배로 호기심을 자극했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조석현 옮김, 이마고, 2006)에는 어느 날 갑자기 사람 얼굴과 사물의 형태를 분간할 수 없게 된 음악선생, 과거는 기억하되 현재는 기억하지 못하는 남자, 오른쪽을 못 보는 여자, 밤마다 침대에서 떨어지는 남자, 바흐 전 곡을 외우는 백치 등이 등장한다.
‘병력’ 기록이 개인과 그 개인의 ‘역사’에 대해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고 비판하는 색스의 임상체험기는 다분히 서사적이다. 수전 그린필드의
『브레인 스토리』에 드문드문 나오는 사례가 다소 차갑게 느껴진다면, 색스의 구체적 서술은 정감 어리고 따뜻하다. 그러면서도 객관적이다. 환자의 내부로 들어가려 하지만 일정한 선은 넘지 않아서다.
“우리의 인지과학 역시 P선생과 마찬가지로 시각인식불능증에 걸려 있는 것이다. 따라서 P선생의 사례는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에게 던져진 하나의 경고이자 우화일 수도 있다. 판단이나 구체적인 것, 개별적인 것을 등한시하고 완전히 추상적이고 계량적으로만 변해가는 과학이 장차 어떻게 될지에 대한 경고 말이다.”
시각인식불능증에 걸린 P선생이 바로 ‘아내를 모자로 착각하는 남자’다. 로버트 B. 실버스가 엮은
『숨겨진 과학의 역사』(김종갑 옮김, 해냄, 1997)에 실린 올리버 색스의 글은 어떻게, 왜 그러한 일이 과학사에서 일어났는가에 초점을 맞춘다.
“과학은 역사적, 인간적 배경과 무관한 비인격적인 ‘순수 사유’라는 말이 있다. 이러한 과학관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과학은 철저하게 인간적인 작업이다. 과학은 유기체처럼 진화하고 인간과 더불어 성장하며, 갑자기 눈부신 혁명을 일으키기도 하고 정체하기도 하며 때로는 곁길로 빗나가기도 한다. 과학은 과거의 토양에서 자라기 때문에 과거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가 없다. 우리가 어린 시절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