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끈적한 필름 누아르, <보디 히트>
애초에 ‘필름 누아르(Film Noir)’는 미국에서 시작된 단어가 아니다. 프랑스의 누벨바그 평론가들은 ‘B급 영화’라고 치부되던 4,50년대의 미국의 범죄 영화를 ‘재발견’하고 영예로운 이름을 붙였다.
끈적한 필름 누아르
일단 죽으면 어디에 묻혀 있는지가 중요할까? 더러운 구정물 웅덩이든, 높은 언덕 꼭대기의 대리석 탑이든 그게 중요한 문제일까? 당신이 죽어 깊은 잠에 들게 되었을 때, 그러한 일에는 신경 쓰지 않게 된다. 기름과 물은 당신에게 있어 바람이나 공기와 같다. 죽어버린 방식이나 쓰러진 곳의 비천함에는 신경 쓰지 않고 당신은 깊은 잠에 들게 되는 것뿐이다.
『빅 슬립』의 서문에 레이먼드 챈들러가 쓴 경구는 단적으로 하드보일드 소설, 또 필름 누아르의 세계를 정확하게 표현한다. ‘죽음은 죽음일 뿐’이라는 냉혹한 낭만성, 그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뒷골목에서 펼쳐지는 어른들의 몽환적인 원더랜드인 필름 누아르의 세계다. 그곳은 화사한 원색 대신 무채색과 중간색으로 가득하고 낙관적인 희망 대신 비관과 배신 같은 악덕(惡德)으로 가득하다.
애초에 ‘필름 누아르(Film Noir)’는 미국에서 시작된 단어가 아니다. 프랑스의 누벨바그 평론가들은 ‘B급 영화’라고 치부되던 4,50년대의 미국의 범죄 영화를 ‘재발견’하고 영예로운 이름을 붙였다. ‘필름 누아르’는 그 장르의 개성이 소재와 이야기뿐 아니라 스크린에 비춰진 양식적인 스타일로 규범화된 몇 안 되는 장르다. 독일 표현주의의 조명 감각을 받아들인 필름 누아르의 세계는 중절모를 쓴 고독한 주인공, 음모를 꾸미고 있으나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금발의 팜므 파탈, 살인과 욕망이 뒤엉킨 복잡한 이야기 구조, 음영이 짙게 드리워진 영상 스타일로 채워져 있다.
존 베리의 조금은 느끼한(?) 재즈-발라드가 흐르는 타이틀 시퀀스.
영화의 첫 장면에서 네드는 유년기에 가족과 함께 찾던 식당이 불타고 있는 광경을 보게 된다.
‘필름 누아르’의 전성기는 대쉴 해미트와 레이먼드 챈들러의 소설이 영화화된 40년대다. <말타의 매>를 필두로 한 이 장르에서 험프리 보가트는 그 스스로가 장르를 대표하는 아이콘이 되었고 그의 그런 이미지는 로맨틱한 정서의 영화인 <카사블랑카>에서도 계속된다. 필름 누아르의 주인공은 아웃사이더지만 나름의 도덕을 유지하고 있는 외로운 남자다. 하지만, 미국에서 필름 누아르는 풍요로운 50년대로 들어서면서 급속히 사라졌다. 컬러 필름이 보편화되면서 칙칙한 필름 누아르 영화는 사라져 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필름 누아르의 후계자들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누벨바그 세대의 프랑스 평론가들은 필름 누아르를 완벽하게 구원해낸다. 고다르와 트뤼포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필름 누아르에 오마주를 바친다. 이후 장 피에르 멜빌 등은 알랑 드롱과 장 가뱅이 출연하는 프렌치 누아르 영화를 만들었고 80년대의 홍콩에서는 오우삼, 임영동 등이 홍콩 누아르의 짧은 전성기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흔적은 세계를 돌고 돌아 프랭크 밀러의 그래픽 노블과 그가 로베르토 로드리게즈와 연출한 영화 <씬 시티>, 데이빗 핀처의 <세븐>, 커티스 핸슨의 〈LA 컨피덴셜〉 그리고 코엔 형제의 <블러드 심플>과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 등으로 종종 등장한다.
여기 소개할 1981년작 <보디 히트>는 어떤 영화보다 필름 누아르 장르에 영향을 크게 받은 영화다. <실버라도>와 <와이어트 어프> 같은 웨스턴, <우연한 방문객>, <프렌치 키스> 같은 로맨틱 코미디, <드림 캐처> 같은 SF 호러물까지 다양한 장르에 손댄 할리우드의 장인(匠人) 로렌스 캐스단의 감독 데뷔작인 동시에 현재까지 그의 최고 걸작이기도 한 <보디 히트>는 짙은 음영이 드리워진 흑백 세계인 필름 누아르의 세계를 뜨거운 열기가 뒤덮은 플로리다의 어느 소도시로 고스란히 옮겨 놓았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막 정사를 끝낸 네드 라신(윌리엄 허트)는 모텔 방에서 자신이 어린 시절 자주 찾았던 식당이 불타는 광경을 구경한다. 그가 자신의 어린 시절의 추억이 불타버리는 것을 방관하며 아쉬워하는 동안 그와 섹스를 나눈 여자는 “그게 무슨 상관이지?”라며 일침을 놓는다. 불타고 있는 현실의 구경꾼이었던 네드지만 자신이 의도한 바와 달리, 그는 결국 불타버리는 자신의 인생을 지켜보게 될 처지다. 즉 영화의 첫 장면은 네드의 불행한 운명을 암시한다.
네드와 메디는 뜨거운 밤 거리에서 첫 만남을 갖는다. 그리고 메디는 홀연히 사라진다.
두 번째 만남으로 급속히 가까워지는 네드와 메디는 육체적인 관계를 맺게된다.
하지만, 네드의 예고된 운명이 비극적으로만 느껴지지 않는 것이 <보디 히트>의 묘한 매력이다. 이 영화에서 살인까지 저지르는 네드를 결코 선한 인물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가 분명히 달콤한 유혹에 정신없이 빠져든 것은 분명하다. <보디 히트>를 감싸는 몽환적인 분위기와 존 베리의 로맨틱한 재즈-발라드 스코어는 괴상한 열기에 젖은 이 영화의 분위기를 한층 에로틱한 방향으로 끌고 간다.
<보디 히트>는 ‘체열(體熱)’을 뜻하는 제목처럼 온통 열기로 끈적거린다. 고전 필름 누아르가 갑갑한 도시의 뒷골목을 자신의 영화적 터전으로 한정지었던 것처럼, <보디 히트>의 주인공은 뜨거운 열기가 내뿜는 플로리다의 열기에 휩싸여있다. 시각적으로 로렌스 캐스단과 촬영 감독 리처드 H. 클라인은 필터를 사용해서 낮 장면을 뿌옇게 색을 번져놓아 그 더위의 느낌을 살리려고 했다. 또 각 공간에는 전혀 시원해 보이지 않는 구형 선풍기가 돌아가고 등장인물이 입고 다니는 셔츠의 등 쪽은 땀으로 젖어있다(뜨거운 열기를 내뿜는 영화지만 영화는 차가운 바람이 몰아치는 겨울에 촬영되었다고 한다. 영화의 마술.) 온통 더위에 감염되어 한없이 늘어져버린 도시, 그 곳은 영화 속 형사 오스카(J.A.프레스턴)의 말처럼 ‘누군가를 죽여 버리고 싶을 정도’다.
그 뜨거운 열기 안에서 네드 라신과 메디 워커(캐슬린 터너)는 격정적인 만남을 이어간다. 캐스단은 냉혹한 필름 누아르의 정서를 끈적거리는 욕망으로 바꾼다. 네드와 메디는 욕망에 눈이 멀어 있다. 네드는 메디의 육체를 탐하다가 어느덧 욕망의 정도를 넘어서 버리고 메디는 자신의 육체를 이용해 네드를 자신의 음모에 끌어들인다.
메디가 준 모자. 이 모자는 40년대 유행했던 중절모로, 필름 누아르 영화의 주인공들이 많이 쓰던 것이다.
메디의 남편 에드먼드(리처드 크렌나)와 만나는 네드. 둘은 사실 닮아 있다.
무엇보다 <보디 히트>에서 인상적인 것은 캐슬린 터너의 압도적인 팜므 파탈 연기다. ‘각선미’가 아름다운 것이 캐스팅의 주요인 중 하나였다는 터너는, 메디를 고전 필름 누아르의 주인공처럼 전형적인 금발 미인의 특성을 지니면서도, 좀 더 욕망에 충실한 인물로 표현해 낸다. 메디는 우아한 동시에 공격적이다. 자신의 성적 매력을 무기로, 네드를 철저하게 교란하고 자신이 쳐놓은 거대한 덫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계획하는 치밀함을 지니고 있다.
<보디 히트>는 과거의 필름 누아르가 은폐하고자 했던 것, 즉 성적인 은유는 담았으나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없었던 것을 직접적으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당대에 논란이 된 영화이기도 한데, 이런 성애 묘사는 메디의 공격성을 더욱 부각하는 동시에 영화에 좀 더 자극적인 분위기를 담아낸다. 사실 <보디 히트>의 성애 묘사는 최근 관객들이 접하는 영화에 비해 그다지 노골적인 분위기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DVD 메이킹 필름에 수록된 편집자 캐롤 리틀턴의 인터뷰대로, 이 영화가 담고 있는 적절한 수위의 표현은 관객의 상상력을 더욱 자극하여 실제 표현보다 더 많은 것을 보았다는 착각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메디는 서서히 네드의 감정을 뒤흔들어 놓는다.
결국 일을 치르고 만 두 남녀. 하지만 범죄에 대한 고뇌보다 만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더 크다.
결국 <보디 히트>는 파멸로 나아가는 영화다. 이 영화에서 구체적으로 파멸에 다가서는 것은 네드 라신이다. 그는 완벽하게 메디 워커의 덫에 걸려버린다. 부유하고 안락한 미래를 열겠다는 비전은 애초에 메디의 것이었지만 어느덧 자신도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네드에게 전이된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네드는 정념과 욕망에 뒤덮였던 자신의 행위를 뒤돌아보며 음모의 전후 맥락을 파악하고 자신이 완벽한 덫에 걸려 버렸음을 깨닫는다. 하지만 그는 그저 이해했을 뿐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영화는 그가 뒤늦게 모든 것을 깨달았음을 알려주고 이 영화의 진정한 승리자 메디의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국적인 섬에서 일광욕을 즐기는 메디 역시 그다지 행복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녀는 자신이 의도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었지만, 유혹과 치밀한 범죄 계획을 만들어 낸 그녀의 거대한 욕망은 의도하지 않은 사랑의 감정을 품게 만든다. 결국 그녀는 모든 것을 얻은 듯 보이지만, 뒤늦게 자신이 네드와 나눈 것이 (욕망을 넘어) 사랑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녀 역시 많은 것을 잃어버린 것이다.
<보디 히트>는 매우 영리한 현대적 필름 누아르 영화다. 장르적인 클리셰의 요건을 잘 유지하면서도 결코 투박하지 않고 세련된 감각을 유지한다. <보디 히트>는 '에로틱 스릴러'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섹시한 분위기가 영화의 주요 요소며 캐스단이 직접 쓴 각본의 대사는 유머와 위트가 풍부하며 개봉 후 25년여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이 영화만의 끈적거리는 로맨틱 무드는 매력적이다.
★★★☆
메인 메뉴와 장면 선택
영화의 후반부에서 네드는 일이 점점 잘못 되가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다.
네드와 메디의 관계 역시 악화된다. 하지만 네드는 음모의 실체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
사라져 가는 메디. 어두움을 배경으로 하얀 옷을 입은 메디의 존재가 두드러져 보인다.
1981년에 발표된 본편의 영상은 완벽한 수준은 아니다. 간혹 필름 스크래치가 발견되기도 하고 배경의 세밀한 표현력이 두드러져 보이지도 않는다. 초반부에는 특히 화면이 뿌옇게 보이는데, 이는 열기를 강조하기 위한 제작 당시의 의도로 보인다. 전체적으로 밤 장면이 많은 편이라 재생 난이도가 높은 편인데, 평균적인 영상을 선보인다. ★★★☆
언어 메뉴
영어 돌비 디지털 5.1 채널을 지원하는 음향은 원본 트랙에 충실하게 디자인되었다. 대사음은 대부분 센터로, 음악은 프런트 스피커로 배치되었으며 리어 스피커의 활용도는 거의 없다. 오래된 영화지만 들뜬 듯한 느낌은 거의 없고 존 베리의 부드럽지만 강렬한 스코어가 주위를 감싸는 안정적인 사운드를 구현한다. ★★★
스페셜 피쳐 메뉴
삭제 장면
‘들어내진 장면(Lifted Scenes)’은 최종 편집에서 잘려나간 필름 클립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본편과 별 차이가 없는 깨끗한 영상에, 아나몰픽을 지원한다. 가장 주목이 가는 장면은 네드가 살인을 기도하는 장면으로, 본편에는 살인을 한 번에 성공한 것으로 나오지만 애초에는 첫 번째 시도가 실패한 것으로 나온다. 메이킹 필름에 따르면 본편의 살인 장면은 잘려나간 살인 시도 장면과 살인 성공 장면을 편집해 만들어 냈다고 한다.
Body Heat Documentaries
DVD 출시 시기에 맞추어 제작된 메이킹 다큐멘터리다. 40여분 분량으로 프리 프로덕션, 제작 과정, 포스트 프로덕션의 영화 제작 단계에 맞추어 3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다. 인터뷰와 본편과 삭제 영상, 스틸 컷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미 제작 후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큰 성공을 거둔 작품답게, 로렌스 캐스단 감독 등의 관련 인물들은 비교적 상세하게 제작 과정을 설명해준다. 이미 <레이더스>와 <스타워즈: 제국의 역습>의 각본가로 명성이 높았던 로렌스 캐스단은 자신의 연출 데뷔작으로 장르 필름을 계획하였으며, 캐스팅 역시 기존의 유명 배우보다는 뉴욕 브로드웨이 출신의 연극배우 윌리엄 허트와 캐슬린 터너를 캐스팅하게 되었다고 한다. 애초 영화는 뉴저지에서 촬영할 계획이었으나 추위 때문에 플로리다에서 촬영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실제 촬영 당시에는 플로리다에도 겨울이 닥쳐 칼바람이 몰아쳐 꽤 추웠다고….
1981 Interview Footage with Kathleen Turner & Willam Hurt
영화 개봉 당시의 홍보용 인터뷰 클립이다. 10분 정도의 분량으로 배우들의 젊은 모습을 볼 수 있다.
1장으로 구성된 <보디 히트 DE>는 제작 후 오랜 시간이 지났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꽤 충실한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메인 메이킹 필름인 Body Heat Documentaries는 어떤 점에서는 최근작 DVD에 포함된 메이킹 필름에 비해 더 뛰어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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