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박식한 학자라도 ‘언어’와 ‘행복’이라는 두 주제에 대해 일가견이 있기는 쉽지 않다. 인류학자라면 그게 가능할지도 모른다. 영국의 인류학자 다니엘 네틀(Daniel Nettle)처럼 말이다. 네틀이 지은 책의 한국어판 두 권은 각기 ‘언어’와 ‘행복’을 다룬다.
“당신이 사용하는 언어가 바로 당신이다”
네틀이 언어학자 수잔 로메인과 함께 쓴
『사라져 가는 목소리들』(김정화 옮김, 이제이북스, 2003)은 세계의 언어와 문화가 맞닥뜨린 위협을 학계와 독자에게 알리는 것이 목적이다. 또한 무슨 이유로, 어떻게 언어가 사라져 가는지 이야기한다.
이 책의 중심 논제는 ‘생물언어적 다양성’이다. “생물언어적 다양성이란, 인간의 문화와 언어를 비롯하여 지구상의 모든 동식물종을 망라하는 풍부한 생명체들의 범위를 가리킨다.” 생물언어적 다양성이 가장 높은 지역은 토착민 거주 지역이다. 세계 인구의 4%를 차지하는 그 지역에선 적어도 세계 언어의 60%를 사용한다.
생물언어적 다양성은 다양한 생물종이 분포하는 지역과 다양한 언어가 퍼져 있는 곳 사이에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음을 시사한다. 언어의 소멸은 생태계 붕괴의 일부다. 언어는 ‘광부의 카나리아’ 또는 ‘잠수함의 토끼’라고나 할까. 언어들이 사라질 조짐은 환경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신호가 된다.
“사멸 위기에 처한 언어들과 멸종 위기에 처한 생물종 사이에는 많은 유사점이 있는데, 그 중 가장 명백히 두드러지는 점은 이들이 대체 가능하지 않다는 점이다.” 그런데 생물언어적 다양성을 유지하는 데 결정적 구실을 하는 토착 원주민들의 운명마저 경각에 달려있는 것이 현실이다. 다시 말해, 희귀 언어 사용자는 멸종 위기에 처한 생물과 같다.
종의 개체가 하나만 남은 생물은 말을 못하지만, 소멸 직전의 언어를 마지막으로 쓰는 이의 심정은 어떨까? 알래스카 코르도바의 최후의 에야크 인디언 마리 스미스는 에야크어를 사용하는 유일한 사람이 된 기분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게 왜 나인지, 그리고 왜 내가 그런 사람이 된 건지 나는 몰라요. 분명히 말하지만, 마음이 아파요. 정말 마음이 아파요. (…) 지금은 내가 추장입니다. 내가 코르도바로 가서 우리 땅에서 행해지는 벌목을 중지시켜야 합니다.”
언어의 소멸 양상은 참으로 심각하다. 지난 5백 년간 우리에게 알려진 세계의 언어 가운데 거의 절반이 사라졌다. 그리고 언어의 사멸은 고대 제국이나 낙후된 오지에서만 벌어지는 현상이 아니다. 지금 우리 눈앞에서도 일어나는데 켄 로치 감독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에서 귀동냥한 아일랜드어가 좋은 예다.
기원후 1000년경까지 아일랜드어는 공격적으로 확산해 가는 언어였다. 유럽에서 라틴어와 그리스어 다음가는 오래된 문헌을 갖고 있기도 하다. 아일랜드의 거의 모든 아이들이 학교에서 아일랜드어를 배웠으나, 집에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결국 아일랜드어는 시골 농부들의 언어로 쇠락을 거듭했고, 1990년 당시 아일랜드어에 애착을 가진 사용자는 9천 명 미만이었다.
언어 소멸의 유형은 세 가지가 있다. 첫째, 그 말을 사용하던 사람이 사라지는 것이다. 이러한 인구 소멸에 따른 언어 소멸은 지난 500년 동안 빈번하게 있었다. 둘째, 인구 소멸과 무관하게 말이 없어지는 것이다. 영국 서남부 콘월 지방 사람들은 여전히 건재할 뿐더러 인구가 더 늘었지만 언어는 잃어버렸다. 이제 그들은 콘월어 대신 영어로 말한다. 이것은 한 언어가 다른 언어로 교체되면서 언어가 소멸되는 경우다. 셋째, 한 사회에 속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말보다 다른 말을 쓰는 편이 더 이롭다고 여길 때 발생하는 경우다. 인구 소멸, 강제적 교체, 자발적 교체 등 언어 소멸의 세 가지 유형은 서로를 구분하는 것이 명확치 않고, 대체로 세 유형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언어들이 사라져가는 현상에 대한 위기의식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만약 타이압어가 희귀 조류이고 우비크어가 죽어가고 있는 산호초라면, 아마도 더 많은 사람들이 이들의 곤경에 대해 알게 되고 걱정하게 되었을 것이다.” 언어가 곤경에 처한 상황이 무시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언어들의 멸종은 전 세계적인 생태계 붕괴 현상의 일부로 볼 수 있지만, 인간이 지구 생태계와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해서다. 다음으로는 “언어가 많이 있으면 의사소통, 경제 발전, 그리고 보다 일반적으로 현대화에 장애가 될지도 모른다는 잘못된 생각 때문이다.”
이러한 잘못된 생각은 “살아남기 위해 자신들의 언어를 포기하는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국문과 강의마저 영어로 하게 하겠다는 모 대학 총장의 천박한 사고가 그렇다는 것이다. “오랜 세월 동안,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다중 언어의 사용이 대세인 세계에서, 영어만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대개 자신들의 상황이 표준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언어의 사멸이 무시된 또 다른 이유는 그것이 대체로 제3세계만의 문제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환경 파괴는 언어의 사멸과 마찬가지로 전 세계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이로 인해 지금 당장 가장 큰 짐을 떠맡게 되는 것은 고도의 생물언어적 다양성을 보유하고 있는 개발도상국들이다.”
네틀과 로메인은 “언어를 보존하는 것은 우리 자신과 우리가 지닌 다양한 유산을 보존하는” 거라 말한다. 그러면서도 “이것이 궁극적으로 이기적인 목표라는 점은 인정한다.” 그런데 정작 “언어의 다양성은 문화적 다양성의 척도”라는 관점에 반발하는 이들의 포용력은 보잘 게 없다.
“다양성에 대한 근거 없는 우려와 얄팍하게 감추어진 인종 차별주의가 미국 내에서 이루어지는 이중 언어 교육에 대한 반발의 배경에 깔려 있는 것이다. 많은 유럽 국가들이 이주 노동자 자녀들의 모국어 교육을 거부하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이중 언어 교육에 반발하는 것에 관한 또 하나의 역설은 미국과 영국에서 외국어 구사 능력의 안보 효과를 중요시하면서 이에 대한 능력 부족을 우려하는 와중에 반대가 불거졌다는 점이다. “주류 학교에서는 세계의 주요 언어들에 대한 교육이 경제적, 문화적으로 중요한 요소로 인식되어온 반면, 소수민족 학생들의 이중언어 교육은 빈곤과 비주류 문화에 대한 충성심과 동일시되었다.” 그런데 하필 이에 대한 사례가 한국어 교육이다.
“캘리포니아의 몬터레이에 있는 국방부 언어연구소는 6천 명의 학생들에게 40개 이상의 언어를 가르치고 있으며, 47주 과정의 한국어 강좌에 만 2천 달러 정도를 소비하고 있다. 그러나 이 과정을 이수한 사람에게서는 고작 다섯 살짜리 원어민보다 낮은 수준의 문법 구사 능력만 기대할 수 있다. 1986년 당시에 캘리포니아의 한 공립학교에는 만 명의 한국인 학생들이 있었는데, 이들에게는 자신들의 모국어 능력을 키워 나갈 수 있는 기회도, 그것을 권장하는 사람도 없었다. 이들은 대부분 성인이 되기도 전에 자신의 한국어 지식을 잃어버릴 것이다.”
언어 차이에 대한 외면적 우려 속에는, 많은 중산층 백인들이 그들의 지위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숨어 있다. 한편, 언어의 다양성을 보존하기 위한 전략에는 언어의 보존을 전반적인 환경보호 활동의 일부로 만드는 것과 전반적인 정부 계획과 자원 관리의 일환으로 지방, 지역, 그리고 국제적 차원의 언어 정책을 수립하는 것이 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이중 언어 사용을 억지로 강요할 수는 없다고 여러 차례에 걸쳐 강조했다. 명령에 의해서든 소극적 방임 정책에 따라서든, 단일 언어 사용도 마찬가지다. 지난 몇 년간 세계의 여러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들이 보여주듯이, 우리 지구촌에는 진정한 다문화주의와 다중 언어 사용이 뿌리내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이 사라질 것이다.”
“행복은 푸짐한 식사를 한 후 느끼는 식욕과 같다”『행복의 심리학』(김상우 옮김, 와이즈북, 2006)은 과학으로 행복에 접근한다.
『행복의 심리학』에서 네틀은 지난날 주관적이고 불명확하며 모호하다는 이유로 행복이란 개념이 심리학에서 무시되었지만, “행복과 행복추구에 대한 생각은 인류사의 자연스러운 한 부분이며, 따라서 과학적 관심을 받을 가치가 있다”라고 주장한다.
“행복의 가장 직접적인 의미는 기쁨이나 즐거움 같은 감정 혹은 느낌을 말한다.” 이런 느낌은 일시적이고 분명하며 특별한 현상을 갖는다. 비유적으로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행복은 푸짐한 식사를 한 후 느끼는 식욕과 같다.”
네틀은 행복을 세 단계로 나눈다. ‘1단계 행복’은 앞서 말한 행복의 가장 직접적인 의미에 가깝다. 그런데 누군가 ‘행복하다’라고 할 때, 행복은 보통 그가 즐겁거나 기쁘다는 걸 뜻하진 않는다. 다시 말해, 1단계 행복만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이 때의 행복은, 살면서 느낀 즐거움과 고통을 비교해보고 장기적으로 삶이 더 즐거웠다는 의미다. “이런 의미의 행복은 기쁨이나 즐거움 같은 구체적인 느낌이 아니라, 느낌들의 전체적인 균형상태에 대해 종합적인 판단을 한 것이다.” 이러한 ‘2단계 행복’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공리주의의 기율과 상통한다.
‘3단계 행복’은 스스로 선택한 자기실현의 삶을 구현한 상태다. 예컨대, “불우한 삶을 산 한 예술가가 온갖 고난 속에서도 자신이 추구하던 예술적 목표를 성취했다면, 2단계 행복은 누리지 못했을지라도 3단계 행복을 얻었다고는 할 수 있다.”
행복은 일반적으로 긍정적인 상황을 말한다. 이는 기쁨이나 즐거움 같은 1단계의 행복에서 특히 그렇다. “따라서 우리는 행복 또는 기쁨을 우리에게 좋은 변화를 추구하는 하나의 프로그램, 다른 관심과 목적을 제쳐두고 우리로 하여금 좋은 일에만 초점을 맞추게 하는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행복에 관한 가장 믿을 만한 연구 중 하나는 결혼한 사람이 결혼하지 않은 사람보다 행복하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