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와 여자가 바뀐 책, 봤습니까? -『이갈리아의 딸들』 & 『셀프』
『이갈리아의 딸들』을 만난 건 그로부터 꽤 시간이 지나서였다. 도서관에서 자료를 찾다가 우연히 기억해 낸 그 책, 무슨 내용이 있나 하는 마음으로 책 주변을 기웃거렸다.
“너, 그 책 봤니?”
이 말을 들었던 건 5년 전, 그러니까 대학교 2학년의 벚꽃 지는 계절의 어느 날이었다. 남녀평등에 관한 토론수업이 끝난 뒤 여선배가 이 말을 했었다. 그때 나는 코웃음을 쳤다.
지금 생각해도 얼굴이 홧홧해지는 일이지만, 그 말을 듣기 전에 있었던 토론에서, 나는 검색 자료를 철저하게 준비한 덕분에 상대방 조의 의견을 묵살해버렸고 그 결과 ‘오늘의 남녀는 평등하다’라는 결론을 이끌어냈었다. 당시 반대편 조에 있었던 선배는 토론 중에 감정에 복받쳐서 그랬는지 말을 제대로 못하고 쩔쩔맸었고 어느 순간 “네가 여자를 알아?”라는 말을 하고는 침묵했다. 그런 뒤에 한 그 말, 나는 귀담아 듣지 않았었다.
그 책은 게르드 브란튼베르그의 『이갈리아의 딸들』이었다.
『이갈리아의 딸들』을 만난 건 그로부터 꽤 시간이 지나서였다. 도서관에서 자료를 찾다가 우연히 기억해 낸 그 책, 무슨 내용이 있나 하는 마음으로 책 주변을 기웃거렸다. 책이 낡기도 했을 뿐더러, 겉표지가 상당히 촌스러웠다. 몇 페이지 읽어보고는 내용도 참 기괴했다고 느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남’과 ‘여’가 바뀐 세상이라니, 그게 말이 되는가?
그럼에도 책을 놓을 수가 없었다. 남과 여과 바뀐 세상, 정확히 말하면 젠더의 권력이 전복된 그 세상을 실감나게 그려서 그랬을까? 솔직히, 모르겠다. 다만, 막연하게 하나는 알 수 있었다. 책을 읽는 내내, 그리고 책을 읽고 나서 ‘남자로 태어나서 다행이다’라는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선배의 얼굴을 떠올리며, 반대의 생각을 하게 됐다. 나는 남자로 태어나서 다행이지만, 여자로 태어난 그녀는, 그녀들은 어떨까?
『이갈리아의 딸들』은 뜨거운 책이다. ‘페미니즘 유토피아’를 구현하는 이 책은 시종일관 역설적인 방법으로 ‘여자의 고통’을 그리고 있다. 책 속의 인류는 남자와 여자가 아니라 ‘움’과 ‘맨움’이라고 불린다. 단어의 뉘앙스에서 느낄 수 있겠지만 움은 ‘여성’이고 맨움은 ‘남성’이다.
그 세상은 현실과 정반대다. 움이 권력을 지녔는데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하느님, 어머니!”다. 처음 이것을 보고는 피식 웃어버렸던 걸로 기억한다. 작가가 억지를 부리는 것이 아닌가 했는데, 이게 그렇지가 않았다. 너무나 신성한 의식, 즉 생명을 탄생하는 데 임신시키는 것 말고는 아무런 기여도 못해서 아이를 맡게 된다는 맨움, 젖꼭지가 없어서 직업을 구할 수 없다는 맨움, 뱃사람이 되고 싶지만 신체 때문에 나갈 수 없는 맨움, 바다에 나가봤자 거친 움들의 욕망을 풀어주는 노리개가 될 것이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고 실제로 그럴 처지에 빠진 맨움, 강간한 이는 즐거워하는데 강간당해도 침묵해야 하는 맨움….
도대체 이 맨움은 무엇인가? 주인공 페트로니우스가 평등을 얻기 위해 펼치는 ‘맨움해방운동’은 무엇인가? 흔히들 ‘역지사지’의 중요성을 자주 언급하는데, 실제로 그걸 체험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갈리아의 딸들』만큼은 그것을 체험하게 해준다. 여성의 처지가 된 남성을 통해 여성이 당했고, 당해야 했으며, 앞으로도 당할 불편부당한 것들을 적나라하게, 소름 끼칠 정도로 생생하게 보여준 것이다. 뜨겁게, 아주 뜨겁게.
그 뜨거움 때문인지 모르겠다. 남자로서 내가 했던 말들, 내가 느꼈던 생각들 때문에 부끄러워서 얼굴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이갈리아의 딸들』을 만난 뒤, 몇 년이 흐른 몇 달 전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파이 이야기』로 색다른 즐거움을 줬던 얀 마텔의 『셀프』가 번역됐다는 것이다. 『파이 이야기』를 즐겁게 봤던 터라 당연히 책 설명을 찾아봤는데, 놀랍게도 그 작품 역시 ‘남’과 ‘여’가 뒤바뀐 것이었다.
『이갈리아의 딸들』의 뜨거움을 기억하며 『셀프』를 펼쳤다. 그런데 『셀프』는 차갑다. 아니, ‘차갑다’라는 말로는 어감이 정확히 전해지지 않는다. ‘얼음장 같다’라는 말이 더 그럴 듯하다. 작가의 재치 있는 입담이 중간 중간 웃음을 짓게 하지만, 그것은 위장일 뿐, 본질은 시쳇말로 뼛속까지 시리게 할 정도로 싸늘했다.
완전히 바뀐 『이갈리아의 딸들』과 달리 『셀프』는 주인공인 ‘그’가 ‘그녀’가 됐다가 다시 ‘그’로 변한다. 주인공이 바뀌는 계기는 슬픈 일이 있을 때다. 그렇다면 이 작품으로써 얀 마텔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이 물음은 제쳐놓고 싶다. 그가 무엇을 말했는지보다, 이 책에서 내가 무엇을 봤는지가 더 중요한 일일 테니까.
강렬한 장면이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갈리아의 딸들』처럼 ‘강간’ 장면이다. 『이갈리아의 딸들』의 그 장면은 화산이 폭발하는 듯 뜨겁게 분노하게 한다. 반면에 『셀프』는 ‘행위’를 무미건조하고 평범하게 그리고 있다. 하지만 활자의 구성이 독특하게도 이단으로 된 탓에, 느껴지는 감정은 평범할 수가 없다. 왼쪽에서는 일상적인 행위가 나오지만, 오른쪽에서는 임신하여 행복했던 ‘그’이자 ‘그녀’의 고통이 잔인할 정도로 생생하게 다가와 몸을 얼어붙게 한다. 글자를 읽어가는 것이 두렵다는 게 무엇인지 체험할 정도로….
그때 난 ‘나쁜 놈’이라고 생각했다. 얀 마텔을 향한 것이었다. 그러나 어찌 그가 욕먹어야 하는가. ‘나쁜 놈’은 말 그대로, 나쁜 놈에게 향해야 하겠지. 책 속의 그, 일시적인 감정에 악마적인 행동을 하는 ‘그’가 욕먹어야 하는 것이 맞다.
『셀프』에서는 ‘성의 정체성’이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하지만 『이갈리아의 딸들』과 함께 선다면, 간간이 표현되는 그것, 즉 여성이 됐을 때 남성이 겪는 심리가 더 주요하게 보이고 더 와 닿는다. 그리고 그것이 더 필요한 것이라고 믿는다.
그 믿음으로 나는 여선배에게 들었던 말을 나지막하게 따라해 보려고 한다.
“이 책들 봤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