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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샌 텔레비전으로 영화를 안 보는 이유

요샌 텔레비전으로 영화를 거의 보지 않습니다. 예외가 있다면 EBS의 주말 영화프로그램과 KBS의 독립영화관 정도죠. 독립영화관이 없어졌으니 남은 건 EBS밖에 없습니다. 이유는?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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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샌 텔레비전으로 영화를 거의 보지 않습니다. 예외가 있다면 EBS의 주말 영화프로그램과 KBS의 독립영화관 정도죠. 독립영화관이 없어졌으니 남은 건 EBS밖에 없습니다.

이유는?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어요. 공중파에서 하는 영화들은 대부분 다 본 것들입니다. 많이 자르고요. 한국 영화인 경우는 욕을 감추기 위해 삽입하는 삑삑 소리에 정신이 나갈 정도입니다. 엔드 크레디트를 잘라 분위기 깨는 건 말할 필요도 없고요. 유일한 장점은 종종 HD로 방영한다는 것인데, 그렇다고 화면 비율이 제대로 반영되는 것도 아닙니다. 요새처럼 스코프 비율이 유행인 때엔 갑갑하긴 매한가지죠. 케이블은? 공중파보다는 선택의 여지가 있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많은 것도 아닙니다. 적어도 케이블 초기가 지금보다 선택의 여지가 있었어요. 당시엔 고전 영화들이나 제3세계 영화들을 꽤 많이 했었죠. 지금처럼 케이블 방송이 비디오방 비슷하지는 않았어요. 물론 화면 비율이나 엔드 크레디트 끊어먹기 문제는 여전히 남습니다.

여기서부터 글을 회고조로 끌어가야 할까요? 그러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전 7,80년대를 조금 기억하기 때문에 당시 텔레비전 외화 프로그램의 레퍼토리가 지금보다 훨씬 재미있었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당시엔 영화가에 볼 영화들이 많지 않기도 했습니다. 가끔 80년대 잡지나 신문들을 보면 어떻게 이런 영화들을 보고 갈증을 견뎠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도 그 때 갑갑했던 기억이 나요. 정말 온갖 종류의 영화들이 무더기로 쏟아졌던 60년대를 체험했던 어느 정도 나이가 든 영화광들은 진짜로 숨 막힐 지경이었을 겁니다. 하여간 지금 제가 아무리 텔레비전 영화 선정에 불평을 한다고 해도 외화 레퍼토리가 쬐끔 좋았던 당시로 돌아갈 생각은 꿈에도 없습니다. 그 때도 망가진 화면 비율로 영화 보는 건 마찬가지였고 외화는 몽땅 더빙이었다고요. 전 지금 훨씬 다양한 영화들을 보고 있어요. EBS 혼자 일주일에 세 편씩 제공하는 영화들의 질도 7,80년대 공중파 전체를 합친 것보다 낫고요. 아마 기술이 조금 더 발전한다면 우리가 보다 다양한 영화를 좋은 화질로 접할 수 있을 겁니다. 불평할 일이 아니에요. 적어도 저에게는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요즘 분위기가 맘에 안 드는 건 부인할 수 없습니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케이블은 온갖 다양한 프로그램들의 보물창고처럼 느껴졌습니다. 한쪽에서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를 하면 다른 한쪽에서는 대니 케이의 할리우드 영화들이 시리즈로 방영되었죠. 게임이나 과학, 목공 관련 프로그램들도 만만치 않게 많았고요. 하지만 요새 텔레비전을 틀면 나오는 건 <상상 플러스>나 <해피 투게더>의 재방송뿐입니다. 제가 이 프로그램들에 유감이 있느냐? 그건 절대로 아닙니다. 하지만 트는 곳마다 <상상 플러스> 재방송이 나온다면 문제가 있는 게 아닙니까? 초기엔 분명한 자기 개성이 있었던 코미디 채널이나 이채널의 성격을 구별하는 건 지금으로선 불가능합니다. 더 웃기는 건 저 자신도 게을러져서 생각 없이 <상상 플러스> 재방송에 채널을 맞추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그 프로그램을 보긴 하느냐? 그것도 아닌 것 같아요. 전 그냥 틀어놓기만 합니다. 내용을 제대로 보지도 않아요.

도대체 누가 문제일까요? 시청자들이 점점 게을러지고 있는 걸까요? 아니면 게을러지는 건 방송국 쪽일까요? 아니면 이 모든 건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엔트로피 증가의 과정으로, 세월이 조금만 더 흐르면 세상에 존재하는 몇 백 개의 채널들은 다 비슷비슷한 하나의 버라이어티 채널로 수렴될 수밖에 없는 걸까요? 과연 우린 과거의 우리가 기대했던 것만큼 주체적이고 개성적인 존재에 가까워졌나요?

쉽게 답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의 이 상황이 가까운 시일 내에 쉽게 변하지 않을 거라는 것도 그만큼 분명한 사실이지요. 좋아요. 케이블이나 텔레비전은 유일한 출입구가 아닙니다. 요즘처럼 세계가 인터넷으로 연결된 시대엔 아무리 취향이 독특해도 노력과 의지와 검색 실력과 약간의 돈만 있다면 그 취향 대부분을 만족시킬 수 있죠. 하지만 특별한 취향이나 관심이 없는 보통 사람들에게도 세상은 더 넓어야 마땅합니다. 그건 사람들의 권리이기도 하지만 의무이기도 해요. 결국 세상을 지탱하고 성격을 정의하는 건 보통 사람들이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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