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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 소설 속의 ‘상무들’

상무(常務)의 사전적 의미는 ‘일상적인 업무’이거나 그러한 일을 맡고 있는 사람, 즉 ‘상무이사’를 일컫습니다. 그러나 김훈 소설에서 상무는 통상적인 직책의 의미를 초월한 일종의 상징이며, 그것은 고스란히 소설의 주제, 계급의식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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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 엉뚱한 데서 이야깃거리를 끄집어내곤 합니다. 딴엔 발랄한 상상입니다만 그다지 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저는 설혹 본질이나 핵심을 벗어난 것이거나 더러 구차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라 해도, 일단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글로 옮겨보는 습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올렸던 ‘공지영과 연대 출신들’이 바로 그러한 습성을 반영한 글이었습니다. 이번 주, 한 번 더 핵심이 아닐뿐더러 별로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는 걸 글의 모티브로 삼아볼까 합니다.

김훈의 소설집 『강산무진』을 읽다가 문득 발견한 게 있습니다. ‘상무’ 이미지입니다. 그의 소설에는 다양한 상무들이 등장합니다. 「화장」에는 화장품회사 상무가 등장하고, 「언니의 폐경」에선 사고로 죽은 형부(언니의 남편)가 상무로 재직 중이었고, ‘나’의 남편 역시 기업의 중역으로 나옵니다. 「강산무진」의 ‘나’는 중소업체의 상무로 근무하다 간암 말기 판정을 받고 명예퇴직을 신청합니다.

더 있습니다. 상무로 표현되지는 않았지만 상무 이미지와 다를 바 없는 다양한 캐릭터들이 김훈 소설 속에서 숨 쉽니다. 「항로표지」의 대기업 경영진 출신의 중년 사내, 「뼈」의 화자인 교수, 「배웅」의 부도난 하청업체 사장 출신 택시운전사 ‘김장수’ 역시 상무이미지의 변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상무(常務)의 사전적 의미는 ‘일상적인 업무’이거나 그러한 일을 맡고 있는 사람, 즉 ‘상무이사’를 일컫습니다. 그러나 김훈 소설에서 상무는 통상적인 직책의 의미를 초월한 일종의 상징이며, 그것은 고스란히 소설의 주제, 계급의식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습니다.

우선 김훈의 상무는 ‘중산층’ 이미지와 부합합니다. 또한 그것은 표면적 권위와 내면의 허무를 동시에 지닌 쓸쓸함과 허위의식의 ‘중년’ 이미지이기도 합니다. 사회적 의미, 즉 직책으로서의 상무 역시 소설 속 이미지와 별반 다를 게 없습니다. 예리한 촉수를 지닌 김훈이 그 이미지의 동일성을 포착, 활용하고 있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합니다.

김훈의 상무는 그 외에도 다양한 이미지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 신입사원으로 출발해 임원의 자리에 올랐다는 건 분명한 ‘상승과 발전’의 이미지입니다. 그러나 더 이상의 상승을 기대하기 힘들며 서서히 퇴각을 준비해야 할 시기를 맞고 있다는 점에서는 ‘하강과 퇴보’의 이미지입니다. 또한 인생항로의 획기적 변화를 추구하기보다는 주어진 현실에서 묵묵히 일했을 때라야 오를 수 있는 고위직이라는 점에서 상무는 변화가 아닌 ‘뚝심과 안주’의 이미지이기도 합니다.

그 중 김훈 소설이 차용하고 있는 이미지는 주로 쓸쓸하고 차갑고 우울하며, 체념상태에 빠진 상무이미지입니다. 안 그래도 툭 건드리면 그대로 터져버릴 것 같은, 오줌이 꽉 차 탱탱하게 불은 중년의 방광을 가차없이 윽박지르고, 짓누르는 김훈의 유려한 문체는 차라리 폐부를 찢고 들어오는 칼날입니다.

「간호사가 물러갔다. 도뇨관을 따라서 오줌은 장난감 물총을 쏘듯 간헐적으로 흘러나왔다. 쪼르륵 쪼르륵… 침대 밑 오줌통으로 오줌이 떨어져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방광의 압박이 서서히 줄어들면서, 몰아쉬는 숨이 쉬어졌다. 병원 유리창으로 아침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 쪼르륵… 쪼르륵… 오줌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는 멀고도 선명했다. 그 분홍의 바다 저쪽 끝으로 죽은 아내의 상여가 흘러가고 있었다.」(「화장」 중에서)

한편 허물어져 가는 마음 밑바닥에 달라붙어 있는 마지막 정염의 불꽃을 아스라이 바라보며 한숨을 쉬듯 젊은 여직원의 육체를 탐닉하는, 그러면서도 정작 어쩌지는 못하고 환상으로 마음에 가둬둔 채 혼잣말을 반복하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는 모습은 차마 애처롭다 못해 외면하고 싶은 처연함입니다.

「당신의 이름은 추은주(秋殷周). 제가 당신의 이름으로 당신을 부를 때, 당신은 당신의 이름으로 불린 그 사람인가요. 당신에게 들리지 않는 당신의 이름이, 추은주, 당신의 이름인지요.」(「화장」 중에서)

거듭, 소설이 보여주는 상무(혹은 중년)의 현실은 처량합니다. 반평생 가족부양에 대한 부담으로 버거운 노동에 투신하다 허무하게 생을 마감하는 모습(「언니의 폐경」의 상무), 간암 말기라는 진단을 받고 나서 우선 이혼퇇 아내에게 밀린 위자료를 지불하려 서두르고, 나머지 재산 역시 아들에게 물려줄 요량으로 병든 육신을 비행기에 실은 채 타향살이의 쓸쓸함을 담담하게 준비하는 모습(「강산무진」의 상무) 등등.

그렇듯 김훈 소설 속의 상무들은 삶의 덧없음에 제대로 맞서보지도 못하고 체념의 심연으로 침잠해 들어가고 있습니다. 간혹 체념과 허무의 블랙홀을 벗어나려 발버둥치는 모습도 있긴 합니다만(「언니의 폐경」에서 사장으로 승진하는 ‘나’의 전 남편), 그것은 - 작가의 생각에도, 독자들의 눈에도 - 성취나 발전이기보다 더 큰 포기이며 더 깊은 체념일 뿐입니다. 사회적 성공에 걸맞은 화려함을 좇느라 아내를 버리고, 입사 동기에 대한 연민쯤 양복소매에 달라붙은 먼지쯤으로 여기며 툭 털어내는 결단과 집착이 낳은 부산물일 뿐, 결코 삶의 내용을 채워가는 모습은 아닙니다.

우리네 인생이라는 게 그렇습니다. 나이 든다는 건 권위에 살이 붙는 것 같지만 실은 영향력의 축소이며 실존의 결핍일 따름입니다. 그래서 김훈의 상무들은 더러 돈으로 핍진한 삶을 달래보려고 애쓰기도 합니다. 그것 역시 종래 자신을 위한 자리 마련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때로 사납금을 채우기도 버거운 형편없는 경제(「배웅」의 김장수)이기도 하지만, 중년의 경제력은 대체로 남은 아내와 자식에게 원망을 사지 않을 만큼은 됩니다.

「8월 중순에 명예퇴직을 신청하면 일 년 치 보너스 천오백만 원을 포기하는 대신 명예퇴직 위로금 팔천오백만 원을 받을 수 있었다. (…) 산소에서 돌아온 날 저녁에 아들의 편지가 도착해 있었다. 편지의 요점은 퇴직금과 주식과 아파트를 처분한 돈을 모두 가지고 LA로 와서 미국의 요양시설에 입원하라는 것이었다. (…) 출국 전에 아파트가 팔린다면 내가 미국으로 가져갈 수 있는 돈은 칠억 오천만 원쯤이었고 LA에서 주정부가 운영하는 공공요양시설에 입원하게 된다면 그 돈은 결국 아들의 몫이 될 것이었다.」(「강산무진」 중에서)

그럼에도 “왜 당신은 더 많이 남기지 않았느냐”라고 푸념하는 아내나 자식이 있습니다. 그럴 땐 화를 낼 것도 없습니다. 그저 조용히 삶의 뒤안길로 물러서면 그만입니다. 김훈의 상무들이 그런 모습입니다. 그런데 굳이 그 물러나는 사람의 등에 대고 구제불능의 마초라는 둥, 노회한 권위주의자라는 둥, 합리적인 삶을 살지 못한 답답한 인생이라는 둥 생뚱맞은 비난을 퍼부을 일은 무엇입니까. 김훈의 상무들에게는 그저 서서히 시야에서 멀어져가는 ‘강산무진도’를 바라보며 실제의 「강산무진江山無盡」속으로 들어가는 길만 남아있을 뿐입니다.

이전의 김훈 문학에서도 역시 상무의 결기가 느껴지곤 했습니다. 한국문학의 기념비적 성취라는 『칼의 노래』에서 보여주는 ‘상무(尙武)’는 앞서 언급한 것과 다르긴 해도 그 나름 일맥상통하기도 합니다. ‘무(武)를 숭상’하는 충무공 이순신의 내면을 관류하는 ‘상무(尙武)정신’과 버겁지만 쉬 내려놓지 못하고 끝내 『밥벌이의 지겨움』을 짊어져야 했던 ‘상무(常務)들’의 모습은 그다지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이제 김훈은 상무이미지를 벗어나려 하는 듯합니다. 소설집 말미의 ‘작가의 말’을 보면 그런 예측이 가능해집니다.

「교정 원고를 겨우 읽었다. 내 팔목을 움직여서 쓴 글이었다. 서둘러 이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벗들아, 이제 헤어져야 할 시간이다. 늙은 江의 下流에서 나는 너무 오랫동안 주저앉아 있었다. 그러므로 벗들아, 이제 헤어지자. 나는 강을 거슬러서 上流로 가려 한다. 모든 낱말과 시간이 다시 새롭게 태어나는 그 始原의 물가로.」(『강산무진』 ‘작가의 말’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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