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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날, 가장 먼저 떠오르는 분 신영복 선생님

책에 대해 별 관심을 갖지 않던 시절엔 책의 날이 있는지조차 몰랐지만, 작년서부터 ‘세계 책의 날’이라는 말에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올핸 특히 책의 날을 맞아 뭔가 기념할 만한 일을 해야 할 것만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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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히 관심을 갖지 않는 한 그런 날이 있었는지조차 모르고 지나치는 기념일들이 있습니다. 여성의 날(3월 8일), 물의 날(3월 22일), 부부의 날(5월 21일), 인권선언기념일(12월 10일) 등이 그런 날들입니다. 생각해 보면 더 할 나위 없이 소중하고 중요한 기념일들이지만 언론에서 호들갑을 떨지 않으면 대부분 의미는커녕 존재조차 알지 못하고 지나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저 역시 그런 축에 속하는 사람이고요.

그러고 보니 지난주엔 기념일들이 유난히 많았습니다. 수요일부터 일요일까지 내리 기념일이 이어졌으니 말입니다. 4·19혁명 기념일을 필두로 장애인의 날(4월 20일), 과학의 날(4월 21일), 지구의 날(4월 22일), 그리고 4월 23일 ‘세계 책의 날’까지.

책에 대해 별 관심을 갖지 않던 시절엔 책의 날이 있는지조차 몰랐지만, 작년서부터 ‘세계 책의 날’이라는 말에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올핸 특히 책의 날을 맞아 뭔가 기념할 만한 일을 해야 할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막상 닥쳐서는 책을 읽는 것조차 중단해야만 했습니다. 마침 전날이 ‘놀토’(초·중고등학교가 격주로 휴업하는 토요일)였던 데다 모처럼 화창한 봄날씨였으니, 아이들 성화를 이겨낼 도리가 없었던 거죠.

저하곤 상관없이 이곳저곳에서 책의 날을 기념하는 다채로운 행사가 열렸던가봅니다. 언뜻언뜻 행사 이모저모가 TV 화면에 잡히고 있는 걸 보면 말입니다.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니 약간 서운하기도 하네요. 명색이 책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으로서 정작 책의 생일날 아무런 힘도 보태지 못했다는 게 말입니다.

대신 저 나름대로 책의 날을 기념해 볼까 합니다. 우선은 ‘책이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라는 제법 진지한 질문을 던져보는 것으로 말입니다. 그리고 그 진지한 질문의 해답을 찾기 위해 마침 책의 날을 맞아 가장 먼저 떠오른 분이기도 한 신영복 선생님의 말씀과 글을 따라가 보는 겁니다.

지난주 신영복 선생님이 경기지역의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을 대상으로 ‘우리 시대의 현실과 전망’이라는 주제의 특강을 해주셨습니다. 선생님의 강의는 아직껏 전망을 고민하고 있는 저에게, 그리고 160여명의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에게 새삼 실천적 삶의 의미와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신영복 선생님의 강의를 직접 들은 건 그날이 처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날 강의는 마치 오래전부터 들어왔던 걸 다시 듣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유는 물론 선생님의 책들 때문입니다. 평소 책을 통해 접해왔던 선생님의 사색과 단상들을 눈과 귀를 통해 직접 확인하는 즐거움은 이만저만한 게 아니었습니다.

특강을 기획한 측에서는 ‘우리 시대의 현실과 전망’이라는 다소 거창하고 무거운 주제를 정해두었지만 선생님은 “제가 감히 말할 있는 주제가 아닌 듯하다”면서 “평소 신념으로 삼고 있던 관계론에 대해 말씀드리겠다”며 차분하게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강의 내내 선생님은 자신의 저서 『강의, 나의 동양고전독법』의 행과 행간들을 종횡무진 하셨고, 더불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더불어 숲』, 그리고 『나무야 나무야』의 단상을 다시금 떠올리게 해주셨습니다.

강의 중간 중간 선생님은 구체적인 설명을 필요로 하는 대목이 나오거나 무거워진 강의분위기를 반전시킬 필요가 있을 때마다 예의 ‘징역살이의 경험’을 풀어놓곤 하셨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같은 내용을 책으로 읽었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감동을 받곤 했습니다. 징역살이라는 극단적인 고통 속에서 오롯이 길어 올린 촌철살인의 단상들을 담담하게 들려주시는 선생님의 표정은 자못 비장했지만, 때로 헛웃음을 자아내게 할 정도로 편안한 느낌을 주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 헛웃음 뒤엔 못내 가슴 아리는 뭉클함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말입니다.

‘일하는 사람의 그림은 다릅니다. 제가 징역살이를 할 때 만났던 한 노인 목수는 집을 그릴 때 지붕이 아니라 주춧돌부터 그립니다. 그가 집을 그리는 순서는 집을 짓는 순서였습니다. 제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관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현실을 산 사람은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부터가 이렇게 다릅니다.꾡(『나무야 나무야』 90~91쪽)

강의의 전체적인 주제는 『강의』에 대한 설명이라고 볼 수 있을 듯합니다. 그것은 다시 ‘관계론’으로 정리됩니다. 『강의』에 대해서는 마침 제가 오래전에 써두었던 ‘리뷰’가 있어 부분적으로 인용해 봅니다.

「새삼 화두는 '관계론關係論'이다. 서구의 근대사상인 존재론存在論과 대비되는 동양고전의 관계론에 주목하는 것이야말로 현실의 준거準據를 찾는 일이며, 미래의 대안代案을 모색하는 일이다. ‘근대’로 표현되는 서구의 사상은 개인의 성취동기가 역사발전의 주요한 동인으로 작용하는, 그래서 필연적으로 경쟁과 탐욕과 착취와 소외의 고리를 형성할 수밖에 없었던데 반해 동양고전에 담긴 관계론적 사상은 사회통합과 개인 간, 집단 간, 그리고 개인과 집단 간 조화와 균형의 필요성을 일깨우는, 그래서 ‘탈근대’의 사상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오래된 미래’라는 역설적인 표현 속에 담긴, 그러니까 ‘오래된 과거로부터 현재와 미래를 위한 지표를 세울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하고 그것은 곧 동양고전에 대한 재해석을 통해 가능한 일이다.

서양의 철학이 ‘지혜를 사랑하는 것’이라면 동양의 도道는 ‘길’이다. 길은 혼자가 아닌 여러 사람이 밟고 지나야만 만들어지며 그 길은 자연 속에 있다. 따라서 동양에서는 자연이 최고의 가치이며 질서다. 자연은 ‘스스로 그러한 것’(self-so)이며, 글자 그대로 ‘자연自然’이다.

자연은 ‘질서’다. 질서는 시스템이라기보다 ‘장場’이다. 장은 구성하는 모든 것이 조화·통일되어 있다. 모든 것이 조화·통일됨으로써 장이 되고 그래서 최고의 어떤 질서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곧 ‘관계들의 총화’(the ensemble of relations)다.

인간은 ‘인간관계’다. 인간이란 존재 자체를 인간관계라는 ‘관계성의 실체’로 보는 것은 인간이 기본적으로 사회적 인간이며, 이 사회성이 바로 인성의 중심내용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동양의 인간주의는 유가의 인본주의적 인문세계와 도가의 자연주의의 적절한 견제와 균형의 논리 속에서 상호 보완적으로 발전을 거듭해 왔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동양사상은 과거의 사상이면서 동시에 미래의 사상이다. 따라서 우리가 동양의 고전을 읽어야 하는 이유와 근거는 분명하다. 첫째, 근대사회의 기본적 구조를 새로운 구성 원리로 바꾸어 내고자하는 담론을 형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둘째, 우리나라의 통일과정에 대해서도 심도 있게 논의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셋째, 이것은 철학적 주제로서의 화和(공존과 평화의 논리)와 동同(지배와 억압, 흡수와 합병, 존재론, 강철의 논리)에 관한 논의이기도 하다. 더불어 이것은 20세기를 성찰하고 21세기를 전망하는 일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민족문제를 세계사적 과제와 연결시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덧붙여 강의 내내 강조하신 것은 바로 ‘자기인식’과 ‘성찰’의 중요성이었습니다. 올바른 사회적 실천이 올바른 사회인식에 기초해야 하듯이 올바른 인식을 위해서는 먼저 우리사회와 우리시대에 대한 냉정한 성찰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은 다시 <논어>의 지知의 개념으로 정리됩니다. ‘知는 곧 知人’(인간을 아는 것)이라는 것이지요.

존재론에서 관계론으로,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올바른 성찰과 인식을 바탕으로 늘 낮은 자세로 사회적 실천을 고민해야 한다는 선생님의 죽비와도 같은 말씀에 저는 그만 넋을 놓고 집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강의의 결론은 ‘실천적 관계론으로서의 연대(連帶)의 중요성에 대해 깊이 인식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는 물’(水善利萬物而不爭)처럼,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처해야’(處衆人之所惡)만 비로소 실천적 삶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라는 선생님의 말씀이 일주일이 지난 지금까지도 제 정신을 얼얼하게 합니다.

문득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의 퇇 대목이 마음에 밟힙니다.

“이 모든 사색이 머릿속의 관념으로서만 시종(始終)하는 것이고 보면, 앞뒤도 없고 선후도 없어 전체적으로는 공허한 것이 되고 맙니다. 그렇지만 나는 나의 내부에 한 그루 나무를 키우려 합니다.(중략) 이 나무는 나의 내부에 심은 나무이지만 언젠가는 나의 가슴을 헤치고 외부를 향하여 가지 뻗어야 할 나무입니다.”(59쪽)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선생님의 내부에 심은 나무가 어느덧 자라나 가슴을 헤치고 외부를 향하여 가지를 뻗은 데다 이미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도 그와 같은 묘목이 분양돼 조만간 더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서도 나무들이 돋아날 것이라고.

그리고 다시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신영복 선생님이 자신의 내부에 심은 나무야말로 진정한 시대의식이며 진정한 책의 의미가 아니겠냐고. 그 모든 사람들의 가슴에서 돋아난 나무들이 자라나 ‘더불어 숲’을 이룰 때, 그때가 바로 살맛나는 참 세상이 아니겠냐고.

이것으로 제 나름의 ‘책의 날’ 기념은 충분히 되었습니다. 책의 날, 저절로 떠오르는 살아있는 ‘책의 정신’이자 ‘시대의 스승’이 있고, 그의 정신을 직접 확인하고 새삼 음미할 수 있었으니, 이보다 확실한 책의 날 기념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제부턴 기념이 아니라 실천입니다. 어느덧 제 가슴에 심은 한 그루 나무를 올곧게 키우기 위한 실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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