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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기차 여행

일주일에 두 번 기차를 타고 수원과 서울을 오르내린다. 기차를 고집하는 이유는 버스나 전철과 달리 편안하게 책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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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에 두 번 기차를 타고 수원과 서울을 오르내린다. 기차를 고집하는 이유는 버스나 전철과 달리 편안하게 책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요철이 심한 버스나 정차가 잦고 번잡한 전철에선 책 읽기에 집중하기 어렵다. 잠시나마 여행하는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것 역시 기차여행의 묘미 중 하나다.

거의 모든 열차가 멈춰 선다는 수원역과 거의 모든 열차의 종착역이랄 수 있는 서울역, 그 사이를 오르내리며 목격하는 광경은 한결같이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들이기 쉽다. 개중엔 생경하면서도 친숙하고 정감이 묻어나는 광경들이 있는가 하면, 때로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광경도 있다.

쪽진 백발 위에 임을 이고 종종걸음을 걷는 시골할머니, 금연푯말이나 역무원의 만류에도 아랑곳없이 아무데서나 담뱃불을 붙이는 할아버지의 어이없는 당당함, 영화 <남과 여>의 배경음악을 읊조리게 하는 연인들의 애틋한 이별 모습, 장시간 여행에 지친 여행객의 곯아떨어진 모습, 쉴 새 없이 조잘대는 수다스런 아저씨 아줌마들, 객차 사이에서 상념의 구두점을 찍어내는 청년들….

특히 서울역 대합실에서 종종 벌어지는 일들은 곧바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것이기도 하다. 국가적으로 중요한 이슈나 전 국민적 관심의 대상이 되는 뉴스(스포츠경기, 이벤트 등)가 있을 때면 어김없이 각 방송의 TV카메라가 ‘서울역’을 생중계한다. 그만큼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고, 저마다 곡절을 가진 여행객들이 오가는 곳이 서울역이기 때문이다.

그날 표를 끊고 대합실 한중간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순간 “촬영에 협조해 달라”라는 말과 함께 거친 손바닥이 가슴께를 막아섰다. 뒤로 물러나 사위를 둘러보니 카메라와 배우들을 중심에 놓고 겹겹으로 구경꾼들이 몰려있는 있는 게 보였다.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때였다. 촬영장소의 구름관중 너머 어딘가에서 가녀린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단말마처럼 울려 퍼진 외마디 외침이 호기심을 부추긴 건 당연했다.

“정규직 요구 정당하다. 철도공사는 약속을 이행하라.”

내쳐, 걸음을 옮겼다. 드라마 촬영장 너머 한복판에서 KTX 여승무원들이 연좌농성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들의 행동은 일사불란했고 표정은 차분해 보였다. 지치거나 괴로운 기색은 적어도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았다. 웃는 낯이었고 활달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다. 그저 자신들에게 주어진 그날의 업무를 차분하게 처리하고 있는 듯했다. 시위라기보다 질서정연한 캠페인에 가까웠다. 그 모습을 보면서 일순 숙연한 느낌마저 들었다.

놀라운 건, 바로 옆 드라마 촬영현장에 구름관중이 몰려 있는 것과 달리 그들에게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너무도 대조적이었다. 분칠한 배우들의 연기에는 관심을 보이면서도 맨얼굴과 온몸으로 삶의 활기와 고뇌를 동시에 보여주고 있는 리얼한 현실에는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는 사람들, 미디어에는 열광하면서 정작 그 미디어의 알맹이는 외면하는 아이러니한 모습, 그 어이없는 역설과 모순이 당혹스러웠다.

그들은 섬이었다. 서울역 대합실의 드넓은 공간을 휘감고 있는 무관심과 냉소로 채워진 바다 한중간에 외롭게 떠있는 섬이었다. 그 섬의 외로움과 단절감, 안타까운 현실을 누군가 필설로 혹은 언설로 위로해 주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주변 어디에도 언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피켓에 담겨 있는 그들의 요구는 단순했다. 정규직으로 채용하겠다던 애초의 약속을 지켜달라는 것. 그것은 이 땅 대다수 여성노동자의 공통적인 주장이자 절규이기도 하다. 실제 우리나라 여성경제활동 인구의 60% 이상은 여전히 비정규직이라는 굴레를 벗지 못하고 있다. 월 급여가 300만 원 이상인 여성노동자 비율은 전체 여성경제활동 인구 중 1.4% 남짓에 불과하다. 그래서 여성가장 가정은 거의 대부분 절대빈곤상태를 모면하지 못하고 있다.

열차출발을 알리는 안내방송에 어쩔 수 없이 몸을 일으켰다. 뒤돌아보니 드라마 촬영현장의 구름관중은 여전했고, 상대적으로 KTX 여승무원들의 시위는 예의 조용했고 사람들의 무관심도 여전했다. 그 모습 그대로가 어쩌면 그들이 비집고 들어가려는 비좁은 현실의 틈, 기필코 넘어서야 하는 사회적 냉대의 벽을 표상하고 있는 듯해 마음이 아팠다.

기차에 몸을 싣고 습관처럼 책을 꺼내들었지만 시선은 차창 밖을 향할 수밖에 없었다. 승·하차장은 사람들로 분주했다. 시선은 이내 초점을 잃고 생각의 파편을 좇아 허공으로 휘발되어갔다. 어느새 ?의 의식과 시선과 관심은 KTX 여승무원들의 시위현장 언저리를 배회하고 있었다. 열차가 출발한 뒤에도, 집에 도착해서도, 몇 날 며칠이 지나서도 그 잔영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다시 돌아온 내 의식의 뒷다리를 옭아매고 있는 건 빌어먹을 무기력증이었다. ‘때로 책 읽기를 포기하고라도 버스나 전철을 이용해야겠다.’

얼핏 보아 신화 속의 시시포스는 매양 헛수고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도로(徒勞)는 새삼 노동의 의미를 일깨워주기도 한다. 언제 굴러 떨어질지 모르지만 끝없이 바위를 밀어올려야만 하는 시시포스처럼 우리네 인간 역시 유한한 삶의 과정을 끝없는 노동으로 채워야만 하는 운명을 짊어지고 있는 게 아닌가.

인간의 노동의 질과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이 이데올로기라는 허위와 허상의 가면을 쓰고 나타나 거리를 활보한다면, 나는 당장 그 이데올로기의 가면을 벗겨버리고 싶다. 그 허위와 허상 앞에서 우리는 왜 그토록 나약하며, 왜 그토록 순종적인 노예로 전락하고 말았는가. 발생론적 오류라는 개념은 이 대목에서도 유효한 게 아닌가. 여성노동자는 비정규직, 단순노무직이어야 한다는 발상과 편견 말이다. 그들의 저항은 왜 이다지도 무관심과 무시와 냉대의 대상으로 전락해야만 하는가. 그들이 바로 우리의 누이, 우리의 딸, 우리의 연인인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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