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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날려버린 『프랑스적인 삶』

책의 운명은 일차적으로 제목이 좌우한다고 생각합니다. 제 아무리 책에 대한 다양하고 구체적인 정보가 흘러넘치는 세상이라 해도, 결국 선택의 주요 동기는 제목이 주는 일차적 느낌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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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운명은 일차적으로 제목이 좌우한다고 생각합니다. 제 아무리 책에 대한 다양하고 구체적인 정보가 흘러넘치는 세상이라 해도, 결국 선택의 주요 동기는 제목이 주는 일차적 느낌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디 책뿐입니까. 영화든, 노래든, 하물며 사람의 경우에도 ‘이름’이 갖는 힘은 실로 대단합니다.

제목으로 인해 운명이 바뀐 책도 있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가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애초 몇몇 출판사에서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원제를 그대로 사용해 출간했다가 재미를 못 보자 '문학사상사'는 당시 국내의 사회분위기에 맞게 제목을 ‘상실의 시대’로 바꿔 출간합니다. 결과는 대박이었습니다.

반면 책제목 때문에 오히려 거부감이 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빈약한 내용에 제목만 거창하게 지은 책이 왕왕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함부로 예를 들기는 곤란하지만 그런 경우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최근 제목만 보고 책에 대한 편견을 가졌다가 낭패를 본 일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장폴 뒤부아의 『프랑스적인 삶』입니다. 애초 ‘제목이 너무 거창한 거 아냐? 감히 누가 한 국가의 이름에 걸 맞는 삶을 살았단 말이지’하고 비아냥대다가, 읽고 난 뒤 생각이 다소 바뀌었습니다. 물론 소설 『프랑스적인 삶』에는 ‘프랑스적인 삶이 어떤 것인지’ 혹은 ‘대체 누가 그런 삶을 살았다는 것인지’에 대한 설명은 없습니다. 단지, 한 개인의 삶의 여정을 담담하게 그리고 있을 뿐입니다.

어쩌면 그게 바로 ‘프랑스적인 삶’에 대한 다분히 ‘프랑스적’인 설명일지 모릅니다. 이념의 스펙트럼이 다양한 ‘철학의 나라’ 프랑스에서, 그것이 사물이든 관념이든, 어떤 것에 대한 특정 관점의 세세한 설명이란 의미도 없을 뿐더러, 위험천만한 일일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소설은 주인공인 폴 블릭의 형, 뱅상의 죽음으로부터 출발합니다. 동생 블릭은 형의 죽음을 확인한 순간 슬퍼하기 보다는 곧바로 방으로 뛰어가 평소 갖고 싶었지만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하던 형의 장난감 사륜마차를 차지합니다. 블릭에게 형의 죽음은 ‘무언가를 얻는다는 건 곧 무언가를 잃는 것이기도 하다’는 걸 체득하는 일이었습니다.

이어지는 블릭의 삶은 방황과 일탈, 상실과 허무, 자유와 권태로 점철됩니다. 인생의 후반부에는 죽은 아내의 배신에 치를 떨고, 끝내 사랑의 허무를 깨달으며 고통스럽게 삶의 의미를 반추하게 됩니다. 어린 시절 할머니의 비뚤어진 계급적 우월의식과 권위의식에 대한 저항으로서 반항과 일탈을 일삼고, 오랫동안 계속되는 성적 방황을 통해 사랑의 허무와 덧없음을 깨닫게 되고, 드골정권으로부터 시작된 제5공화국의 정치행태와 ‘68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아나키스트적 기질을 체득하고, 아내의 갑작스런 죽음과 배신에 당혹스러워하고, 딸 마리의 정신병을 치유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 새삼 진실한 사랑의 의미를 깨닫게 되고...

작가는 끝내 ‘프랑스적인 삶’에 대해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지만, 독자들은 책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프랑스적인 삶의 단면들을 확인하게 됩니다. 폴 블릭의 삶을 채우고 있는 사유와 생활의 방식, 삶에 대한 자세 등을 들여다보면, 거기에 고스란히 프랑스인들의 독특한 삶의 양식이 묻어있음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지요.

성에 대한 도착적 집착과 자유분방함, 이념백화점을 방불케 하는 이념과잉의 사회분위기, 그 속에 면면히 흐르고 있는 좌파적 전통, 전방위적인 자유를 표방하는 삶의 자세, 문화적 자부심과 어우러진 부르주아적 생활방식, 세대 간의 갈등, 일상화된 토론문화 등등. 그것들이 바로 ‘프랑스적인 삶’의 편린들입니다.

소설의 내용 중 특히 관심을 끄는 건 ‘68혁명’을 바라보는 주인공의 독특한 관점입니다. 혁명하면 대개 격정적이며 열렬한 투쟁이 있고, 울분과 분노가 있고, 치열한 이념갈등과 사투가 있으리라는 일반의 예상을 간단히 전도해 버리는 작가의 발상이 인상적입니다. 청년기에 혁명을 맞닥뜨린 폴 블릭은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격정적이기 보다 오히려 담담합니다. 그렇다고 지나치게 방관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도 아니며, 그저 시니컬한 반응을 보일 뿐입니다.

여기서 잠시 저의 생각이 멈춥니다. 앞서 언급했던 책제목에 대한 저의 편견은 혁명에 대해 그간 가지고 있던 편견과 오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던 셈입니다. 소설 『프랑스적인 삶』은 바로 그 부분을 건드려줌으로써 저를 옴짝달싹 못하게 하고 말았습니다.

역사 혹은 관념적으로 이해했던 ‘68혁명’은 매우 충격적이며 흥분되는 세계사의 대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과연 당대 젊은이들에게도 그랬을지는 의문입니다. 물론 일부 전위들에겐 그랬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다수는 단지 혁명의 전사가 아니라 무심한 관찰자였을 것입니다. 혁명은 언제나 소수의 열정이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따라서 당대의 대다수 젊은이들에게 ‘68혁명’은 그저 방관자적 자세를 유지하게 했을 것입니다.

장폴 뒤부아가 얘기하고자 했던 게 바로 그것이었을 겁니다. 혁명에 대한 작가의 냉정하고도 무신경한 자세야말로 역설적으로 당대인, 특히 아나키들의 정서를 정확하게 묘사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프랑스적인 삶』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의 분위기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비슷한 시기, 혼란의 소용돌이에서 혹은 상처받았거나 혹은 상실감에 빠져든 젊은이들의 심리를 묘사하되 지나치게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흥분하지 않으면서 허무와 상실감을 개인의 삶 속에 오롯이 내면화시키는 것. 소위 우리네 90년대의 후일담 소설들과는 사뭇 다릅니다. 한 발짝 더 나가서 문화혁명의 혼란기를 관통했던 중국 젊은이들의 심적 갈등을 탁월하게 묘사한 다이 허우잉의 『사람아 아, 사람아』와 비교해 보는 것도 의미 있을 듯합니다.

혁명적이든 반혁명적이든 이념 과잉의 시대는 언제나 냉소주의와 허무의식을 낳게 마련입니다. 시대의 분위기를 놓고 볼 때,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과 일본의 6,70년대와 우리의 8,90년대는 닮은꼴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우리에겐 『상실의 시대』『프랑스적인 삶』과 같은 시대의 분위기를 차분하게 정리해낸 소설이 없다는 것입니다. 1990년대 초반 김영현, 박일문, 이인화, 안재성, 공지영 등이 다양한 후일담 소설들을 썼고 나름의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만, 아쉬움은 여전합니다.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 혼란과 변화의 8,90년대를 보다 차분하게 정리해줄 누군가의 수고가 필요합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상실의 시대』 한국어판 서문에서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초반에 이르는 나날은 이른바 ‘멀미나는 시대’였다”고 말합니다. 더불어 “그 격렬한 시대를 탄생시킨 변화의 에너지는, 도대체 지금 이 시대에 무엇을 가져온 것인가?”하고 묻습니다.

우리의 80년대와 90년대 역시 ‘멀미나는 시대’라 할 만합니다. 그러나 당시엔 속 쓰린 멀미 끝에 마침내 희망의 싹이 틀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이제 우리도 “그 멀미나던 시대에 품었던 열정과 에너지가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할 때입니다.

장폴 뒤부아가 지극히 개인적인 삶의 과정을 정리하는 것으로 『프랑스적인 삶』의 의미를 형상화해낸 것처럼, 우리 역시 과거의 ‘멀미나는 시대’에 대한 새로운 성찰을 통해 ‘한국적인 삶’의 의미를 되새겨야 합니다. 그러고 보니 『프랑스적인 삶』이야말로 제목과 내용이 기가 막히게 어울린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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