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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래 평전’인지 ‘서울법대 평전’인지...

그러나 며칠 후 『조영래 평전』을 읽은 뒤 생각이 다소 뒤엉켰습니다. 이전에 읽었던 『체 게바라 평전』등과는 사뭇 다른 내용과 형식이라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평전은 저자의 주변 인물들과 주제 인물의 개인적 인연을 반추하는 에세이여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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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경쟁자는 고 조영래 변호사입니다. 너무 큰 인물이어서 따라가기 힘들지만 저는 내 친구 조영래를 경쟁자이자 스승으로 여기며, 늘 그와 같은 삶을 살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지난달 열린우리당 당의장후보 TV토론회에서 김근태 후보가 시민 논객의 질문에 답한 내용의 일부입니다. TV토론회라는 게 늘 그렇듯, 그날 역시 ‘형식이 내용을 잡아먹는’ 알맹이 없는 토론이 되고 말았습니다만, 오랜만에 듣게 된 ‘조영래’라는 이름은 퍽이나 반가웠습니다.

그러나 며칠 후 『조영래 평전』을 읽은 뒤 생각이 다소 뒤엉켰습니다. 이전에 읽었던 『체 게바라 평전』등과는 사뭇 다른 내용과 형식이라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평전은 저자의 주변 인물들과 주제 인물의 개인적 인연을 반추하는 에세이여서는 안 됩니다. 평전의 저자는 자신을 드러내기보다 주제 인물과 그의 가족들, 지인들의 내면으로 깊숙이 파고 들어가 온전히 그들의 입장에서 그들의 삶에 얽힌 사건들의 연관성을 재구성해야 합니다.

『조영래 평전』은 제 생각과 많이 달랐습니다. 대략 살펴보면 이런 식입니다. 조영래가 어떤 과정을 거쳐 서울법대에 수석으로 입학하게 되었는지. 법대생 조영래의 모습은 어떠했는지. 민주화운동의 과정 속에서 서울법대의 역할과 위상은 어떠했으며, 그 속에서 조영래는 어떤 역할을 담당했는지. 한발 더 나아가서 서울법대에 대한 일반의 관심과 오해는 어떤 것들이며 그 이유는 무엇인지. 한 발짝 더 나아가서 우리나라 법조계는 어떤 변천과정을 거치며 진화해 왔는지, 그 속에서 조영래는 어떻게 자리매김 되고 있는지. 인권변호사 조영래가 각종 시국 사건 등에서 어떻게 활약했는지.

결론적으로 이 책은 『조영래 평전』이 아니라 ‘서울법대 평전’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왔어야 할 것이었습니다. 물론 ‘서울법대’의 무게감과 의미는 ‘조영래’의 그것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지만 말입니다. 아무튼 제 이름을 달지 못한 책의 운명은 불운할 수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자기 이름을 달고 있으면서도 정작 자신의 삶과 생각을 제대로 알릴 기회를 확보하지 못한 주제 인물은 또한, 실제 삶의 말로가 불운했던 것에 더해, 다시한번 불운을 겪는 것에 다름 아닌 일입니다.

조영래 평전 출간의 의미와 목적은 자칫 특정 시대와 공간 속에 박제될 우려가 있는 조영래를 공시적으로 재조명함으로써 그의 삶과 사상이 우리의 역사와 현실에 어떻게 투영되었으며, 그 가치와 의미가 무엇인지를 재평가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책은 그와 정반대로 가고 있습니다. 시대의 거인, 조영래를 좁디좁은 서울법대와 법조계의 울타리 안에 가둔 채 몇몇 동문들과 동료 변호사들로 하여금 그와의 관계를 추억하게 하고, 더불어 저자 역시 그들 간의 관계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끌어가고 있으니 말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서두에 소개한 김근태 의원의 표현 또한 옹색해 보입니다. 가다머는 “(어떤 것을)정의하는 순간 그 의미는 경직되고 개념의 범위는 좁아진다”고 충고합니다. 김 의원이 공적 매체를 통해 조영래를 ‘내 친구’로 정의하는 순간,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조영래의 보편적 이미지 - 즉, 시대를 뛰어넘는 통합적 지성의 소유자이며 민주운동의 주요한 축이었던 시대의 상징으로서 - 는 순식간에 휘발돼버리고 대신 그 자리를 정치인 김근태의 친구 이미지로 대체될 개연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조영래는 김근태 의원의 친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모든 약자들의 친구, 모든 노동자들의 친구, 모든 민주세력의 친구입니다. 특정인 혹은 특정 집단에 의해 조영래가 전유(專有)되는 것은 그에 대한 예의가 아닐뿐더러 자칫 그와의 우정과 신의에도 반하는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몇몇 지인들에 의해 전유된 조영래의 기억은 고스란히 세상의 무관심이라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새삼 반성해야 합니다. ‘세상을 바꾼 아름다운 열정’을 가졌던 조영래가 후세에 의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말입니다. 책의 말미에 나오는 ‘조영래 연보’를 보면 그에 대한 기념과 추모가 단지 특정집단(서울법대)에 의해 겨우 명맥만 유지되고 있을 뿐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조영래를 기념하고 그의 정신을 계승하는 일은 특정집단이 아닌 범민주, 범양심세력 모두의 것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평전으로서의 문제점과 한계에도 불구하고 『조영래 평전』자체는 전혀 의미가 없거나 수준이 떨어지는 책은 결코 아닙니다. 앞서 지적한 문제만 차치하고 본다면 이 책은 저자의 인문학 전반에 대한 웅숭깊은 소양과 탁월한 필력이 돋보이는 보기 드문 훌륭한 인문교양서입니다. 특히 다양한 사건들에 대한 구체적이며 수준 높은 법조 지식과 자료에 근거한 정확한 설명은 훌륭한 법률교과서 이상의 역할을 해주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책을 통해 새삼 확인한 조영래의 삶과 정신은 독자들로 하여금 무한한 존경과 사랑을 느끼게 합니다. 조영래는 통합적 지성을 갖춘 실천하는 지식인이었습니다. 조영래는 앞날을 내다보는 통찰과 혜안의 소유자였습니다. 조영래는 불교의 실천철학을 체득한 사람이었습니다. 조영래는 투철한 인권의식과 자유와 평등의 자유민주주의 사상을 실천하는 대표적 인권변호사였습니다. 더구나 조영래는 논리와 감성을 아우르는 수려한 문체를 가진 수준 높은 문장가였습니다.

이제 모두가 차분하게 ‘시대의 거인 조영래’의 부활을 준비를 해야 할 때입니다. 우선해야 할 일은 그와의 동지적 연대의식을 강화하기보다 오히려 발전적으로 해체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동안 온갖 인연으로 묶여 있던 지인들이 우선 그를 놓아주어야 합니다. 뒤로 물러나 그 자리를 보통 사람, 그를 잘 모르지만 그의 정신에서 새로운 것을 배우려는 사람들에게 물려주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멀찍이 떨어져서 조용히 응원해야 합니다. 바야흐로 인권, 자유, 평화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조영래의 커다란 가슴 안으로 모여들게 될 때, 그때가 바로 모든 사람이 조영래의 친구가 되고, 조영래가 모든 사람들의 진정한 친구로 거듭나는 때입니다.

그때쯤 우리 모두가 나서서 ‘조영래 인권상’ 하나쯤 운영해 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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