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안의 ‘또 다른’ 우리들의 비판
근래 우리의 현실 혹은 역사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 책들이 속속 출간되고 있다. 특이한 것은 그것들 대부분이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아는 ‘또 다른 우리’의 비판이라는 점이다.
비판은 ‘때로’ 아프다. 아니, ‘언제나’ 아프다. 그러나 견뎌야 할 아픔이다. 더구나 애정이 깃든 비판이라면 기꺼이 수용하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아픔을 핑계로 비판을 회피한다면, 어느 순간 그보다 훨씬 강도가 센, 그래서 종래 존립 자체를 위태롭게 하는 가공할 고통이 찾아올지 모른다.
비난은 화가 난다. 비판이 이성의 산물이라면 비난은 감정의 표출이어서 그렇다. 비판은 대안모색의 단초가 되지만 비난은 맹목적 딴죽걸기일 뿐이다. 따라서 비난과 비판을 구분해야 하는 건 주체와 객체 모두에게 필요한 일이다.
근래 우리의 현실 혹은 역사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 책들이 속속 출간되고 있다. 특이한 것은 그것들 대부분이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아는 ‘또 다른 우리’의 비판이라는 점이다. 한편 국외자이면서 동시에 내부자이기도 한 다중 정체성의 소유자들, 그들의 비판은 우리를 여지없이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넣는다.
지난 1999년 일약 베스트셀러에 오르며 우리 사회를 일대 충격에 휩싸이게 했던 이케하라 마모루의 『맞아죽을 각오를 하고 쓴 한국, 한국인 비판』, 2001년에 이어 최근 같은 제목으로 두 번째 책을 낸 박노자의 『당신들의 대한민국1, 2』, 예의 치열한 학문적 열정을 통해 우리 학계에 신선한 자극을 주고 있는 정수일의 『한국 속의 세계 상, 하』가 그 주인공들이다.
가장 최근에 나온 박노자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2』는 우리사회의 환부를 여지없이 드러내놓고 적나라하게 비판하고 있다. 책의 주된 내용은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허위의식과 정치한 이중성(극심한 경제적·사회적 양극화, 기득권층과 기층 간의 지나친 차별구조, 외국인 노동자를 보는 이중적 시각 등등)에 대한 비판이다.
저자의 비판의식은 책의 서문에 압축적으로 표현돼 있다. 그리고 그것은 종래 독자들로 하여금 저절로 고개를 숙이게 한다. 그것은 부끄러움이면서 동시에 반성이다. ‘이토록 자명한 현실을 우리는 그동안 왜 그토록 철저하게 외면해 왔던 걸까?’
“삼성이나 LG 전자제품의 멋진 모양과 저렴한 가격에 놀라는 외국 구매자는 이들의 하청 업체에서 노동자들이 받는 월급과 대우가 어떤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황우석의 ‘성과’를 한때 흠모의 눈으로 바라봤던 일부 외국학자들은, 황우석 팀의 박사급 연구자가 최저 생계비도 안 되는 70만원의 월급을 받으면서 하루 12~13시간 동안 일한다는 사실을 알고나 있었을까? ‘바깥’에서 보기에 우리의 ‘성공’을 가능케 한 것은 제대로 된 노동생산성의 향상이나 기초과학 성과의 장기적 축적, 내수시장의 원만한 성장이라기보다는, 노동자로 하여금 말도 안 되는 대우를 감수하며 죽도록 일하게 만드는 ‘생존 공포’의 분위기다.” (‘서문’에서)
노동자에 대한 말도 안 되는 차별과 착취가 우리 사회에서 그대로 용인되거나 가능할 수 있었던 원인을 그는 교육에서 찾는다. “노동자들을 ‘저주받은 자’로 만든 것은 비참한 현실적 문제 외에도 학교 교육을 통해 재생산되는 담론이기도 하다. 우리는 툭하면 일본과 중국의 역사 왜곡에 분노하지만 우리 자신의 역사교과서도 한번 노동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해 보자.” (172쪽)
한 가지 덧붙일 게 있다면, 보수언론과 부르주아 정객들의 의제 왜곡이다. “우리의 역사 역시 노동과 농민, 수공업자, 기술자, 노동자 그리고 피지배민의 문화 및 투쟁의 관점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래야 부르주아 정객들이 들먹이는 소수를 위한 ‘기업하기 좋은 나라’가 아닌, 다수를 위한 ‘노동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173쪽)
그동안 우리는 그 의미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채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는 보수언론과 보수정객의 입방아를 거의 맹목적으로 따라 부르고 다녔다. 그래서 더욱 ‘노동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는 박노자의 탁견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한편 저자는 우리의 역사 속에서 높은 가치를 부여할 만한 전통도 있음도 새삼 일깨워준다. “조선조가 중국 왕조의 평균 집권 기간인 200~250년보다 거의 두 배나 되는 기간을 채울 수 있었던 배경은 조선이 중국에 비해 왕권이 상대적으로 약했던 반면 신권臣權이 훨씬 더 강했던 것이, 역으로 사회에 안정성을 기하고 왕조의 수명을 늘렸다.”
그러나 그와 같은 역사의 교훈은 오늘의 세태를 꼬집는 아픈 충고에 다름 아님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조선 선비의 최고의 덕목은 직간直諫, 즉 자기 생명도 돌보지 않고 바른 말로 임금과 국가의 허물을 바로 잡아주는 일이었다. 직간으로 벼슬을, 심지어는 생명까지도 잃은 이들이 적지 않았지만 결국 그 희생 덕분에 사회 전체가 모순을 그 체제 안에서 그 나름대로 극복해가면서 안정적인 발전을 할 수 있었다.” (280쪽)
책의 말미에서 박노자는 하워드 진의 『20세기』를 읽으며 눈물 흘렸던 사연을 공개하며 그가 진정으로 꿈꾸는 세상이 어떤 세상이며, 그러한 세상이 보여주는 인류애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굶주림과 구타 속에서 생존과 인권을 위해 파업하는 얼굴 모를 여공의 아이를 인종·종족·종교적 배경과 무관하게 같은 노동자로서 같은 인간으로서 봐주겠다고 나서는 정신이야말로 사회주의적 노동운동의 본질일 것이다. 노동운동이 사회를 이끌어가자면 이론이나 전략이라는 올바른 머리도 필요하지만, 이와 같이 서로를 걱정하고 생각하는 연대의식이 없다면 결국 제자리걸음인 것이다. (중략) 인간의 동병상련에 바탕을 둔 연대를 빼버린 어용 반쪽 역사가 미국을 지배하게 된 것은 결국 체제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수많은 민중의 참혹한 파탄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319쪽)
결국 그가 내린 결론은 노동자들의 연대를 통해 사회주의적 이상을 실현하고, 그 과정 중에 우리가 견지해야 할 자세로서 내부의 비판기제를 건강하게 가동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박노자는 그러나 우리나라가 개선의 여지가 없는, 그래서 더 이상 회복이 불가능한, 완전히 글러버린 나라는 아니라고 본다. 조선조의 내부 비판의 전통이 올바로 계승된 사례로서 외부의 비판에 대한 유연한 자세를 높이 평가하기도 한다.
“자국 문화를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국내외 필자들의 책이 잘 팔리는 지역이 세계에 없다. 미국 같으면 『맞아 죽을 각오로 쓴 미국, 미국인 비판』이 베스트셀러의 대열에 올랐겠는가? (중략) 전통적인 자기비판의 정신과 독자층의 비교적 높은 교양적 인문학에의 지향도 크게 작용한 듯하다.” (230쪽)
그러나 박노자가 언급한 이케하라 마모루의 『맞아죽을 각오를 하고 쓴 한국, 한국인 비판』은 우리를 정말로 아프게 했던 책이기도 하다. 그만큼 우리를 분명하게, 제대로 비판했다는 얘기이기도 하겠거니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독 얄밉게 보였던 건 IMF 관리체제라는 극단적 경제위기 직후 온 나라가 혼란에 휩싸여 있을 무렵, 기습적으로 치고 들어와 항복할 기회마저 주지 않은 채 쏜살같이 연속 펀치를 휘둘러 그로기상태에 빠뜨린 후 마치 시혜를 베풀 듯 책의 말미에서 위로의 말을 남기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케하라는 책의 말미에 ‘그래도 한국의 미래가 밝은 이유’라는 소제목을 달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첫째, 한국 사람들은 머리가 좋다. 아쉬운 건 지식은 풍부한데, 지혜는 별로 없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둘째, 한국 사람들은 인정이 많다. 한국 사회에는 아직도 서구의 합리주의라는 잣대로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훈훈한 인간미가 살아 있다. 셋째, 한국 사람들은 뭐든지 빨리 해치운다. 분명한 목표가 설정되고 자발적인 동기만 유발되면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 한국 사람들의 가장 큰 장점이다. 아주 작고 사소한 일부터 하나하나 실천에 옮기면 한국은 분명 지금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21세기를 열어 갈 것이다.” (232~237쪽)
우리의 마음을 가장 무겁게 하는 건 정수일의 『한국 속의 세계 상, 하』이다. 책은 단순히 세태비판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그렇기로, 우리의 유구한 반만년 역사에 대한 찬양이나 위대한 떿광의 순간에 대한 단순한 동경을 드러낸 것도 아니다. 책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이 책은)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세계와 고립시켜 통시적通時的으로만 보아오던 구폐舊弊를 벗어나 세계와 상관시켜 공시적共時的으로 눈높이를 맞추어보는 현장이었다. 그것은 세계 속에서의 한국의 위상과 더불어 우리 속에 들어와 있는 세계를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그 확인된 세계가 바로 한국의 세계성을 대변해주고 있다. 이러한 세계성은 교류를 통해 세계와 보편적 가치를 공유함으로써 비로소 실현 가능했다는 것을 우리의 ‘문명교류여행’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하권 248~249쪽)
50회에 걸친 문명교류의 여정(책에 나오는 여정은 49회, 1회는 결론)에서 맞닥뜨린 우리 문화의 우수성은 실로 감탄해 마지않을 수 없을 정도다. 13,000여 년 전의 볍씨로 추정되는 ‘소로리카’ 볍씨가 충북 소로리에서 발견된 것의 문명교류사적 의미, 세계의 금관문화를 주도한 것이 바로 우리의 가야와 신라의 문화(전 세계에 있는 10개의 금관 중 우리나라의 것이 7개나 된다)였다는 사실, 유민이라는 신분적 한계를 극복하고 당의 장수로서 동서문물교류의 장을 연 고선지 장군의 활약상, 한국인 최초의 세계인으로서 세계 4대 기행문 중 한권인 『왕오천축국전』의 저자인 신라 고승 혜초, 동북아 3국의 국제관계를 일변시켰으며 해상강국 고려의 건국기틀을 마련했던 해상왕 장보고의 무역활동 등등.
책의 내용만 놓고 보면 우리 문화의 우수성에 대한 찬양일색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우리 학계의 학문적 게으름에 대한 통렬한 비판과 우리의 일천한 역사의식과 역사에 대한 획일적, 단편적 사고방식에 대한 준열한 충고이기도 하다. 이 책을 통해 앞으로 우리가 수행해야 할 과제로 떠오른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래서 더욱 마음이 무거워지는지 모르겠다.
일본인이지만 한국에서 26년간이나 살아왔던 준(準)한국인 이케하라 마모루, 귀화한국인인 박노자와 정수일, 그들은 한편 ‘우리들’이면서 여전히 ‘당신들’이다. 그래서 ‘그들’의 ‘우리’에 대한 면밀한 관찰과 그에 따른 문제제기와 비판은 아프고 무섭다. 우리 중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었지만 아무도 하지 않았던 문제제기여서 그렇고, 방식이나 수준에 있어서 아무나 할 수 있는 차원을 뛰어넘는 면밀함과 정확성, 일관성, 학문적 깊이까지 두루 갖춘 비판이어서 더욱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