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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이순원의 이유 있는 변신 『유리의 노래』

그런 이순원이 신작 『유리의 노래』(‘맑은내소설선’ 창해)를 통해 이미지 변신을 시도하고 나섰다. 여자의 변신이 무죄라면 작가의 변신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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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이순원을 따라다니는 이미지들이 있다. 순수, 비관, 고독, 별, 강원도, 수색, 우주의 시원을 향한 구도적 열정... 그러고 보면 이순원은 확실한 자기 캐릭터를 갖고 있는 우리 문단의 몇 안 되는 작가 가운데 한 명인 셈이다. 그런 이순원이 신작 『유리의 노래』(‘맑은내소설선’ 창해)를 통해 이미지 변신을 시도하고 나섰다. 여자의 변신이 무죄라면 작가의 변신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변신을 얘기하기에 앞서 등단 이후 지금까지의 작가에 대해 살펴보는 게 순서일 듯하다. 이순원은 우선 늦깎이작가다. 박완서 못지않다. 단순히 나이 몇에 등단했느냐를 놓고 하는 말이 아니다. 인생의 어느 시기에 작품 활동의 절정을 이루느냐가 관건이다. 이순원에게 굳이 늦깎이 딱지를 붙이는 의미는 설명이면서 딴엔 바람이기도 하다. 이순원은 또한 90년대 중반 문단의 청일점이었다. 박경리, 박완서를 필두로 양귀자, 최윤, 김형경, 은희경, 공지영, 신경숙 등이 독자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그 시기, 아직 윤대녕, 성석제, 김영하는 독자들의 뇌리에 이름 석자를 각인시키지 못하고 있었을 때, 이순원이라는 존재는 그야말로 문단에 홀로 선 (강원도의)힘이었다. 그러나 누이 많은 집 외아들의 심성이 대개 그렇듯, 이순원 역시 ‘마초’라기보다 오히려 여성적 감수성과 섬세한 필치를 표방한 작가였다.

신작 『유리의 노래』를 보고 있노라면, 등단 이후 지금까지 작가 이순원이 형상화했던 다양한 이미지들과 그것들의 뒤엉킴과 뒤틀림을 한눈에 조감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때론 『19세』『순수』로, 때론 비관적 절규로서 『압구정동엔 비상구가 없다』고 외치는 모습이며, 억겁의 우주적 시간 속에서 단지 찰나적 감상일 뿐인 사랑의 덧없음을 환기하는 『은비령』의 허무까지.

그러나 뜻밖에도 『유리의 노래』에는 이전 작품들의 다양한 이미지를 한데 모으는 ‘수고’ 이상의 새로운 ‘시도’가 담겨있다. 그 시도는 하마 이미지 변신을 위한 지난한 몸부림이었을 테다. 기존의 이미지들을 털어내려는 작가의 시도는 힘겨운 도전이면서 또한 자기문학에서의 홀연한 가출이기도 한 셈이다. 변신은 다소 생뚱맞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일단 재미있고 통쾌하고 흥미진진하다. 이쯤에서 결론을 내리자면, 작가의 변신 역시 무죄다.

『유리의 노래』는 단순한 구성에도 불구하고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다. 우선, 세상을 보는 시각이 남다르다. 대개 아무런 여과 없이 날것의 세상사에 부닥치며 사는 보통의 사람들과 달리 작중 고층건물 유리창닦이라는 직업을 가진 주인공은 ‘유리’라는 여과장치를 통해 세상을 바라본다. 그렇게 걸러져 드러나는 세상사는 주인공에게 온통 안개 낀 대기처럼 뿌연 회색으로만 보인다. 하여 주인공은 세상사에 구체적으로 개입할 의사가 없다.

그러나 유리를 통해 들여다보는 일상사들 중에는 주인공의 연민을 자극하는 것도 있다. 종종 일을 나가는 서진그룹의 엘리베이터 안내원 안미은이 바로 연민을 자극하는 여인이다. 연민은 곧 사랑의 다른 이름이다. 사랑이야말로 세상에 대한 마음의 문을 굳게 닫고 있는 유리창닦이를 일상으로 끌어들이는 유일한 매개이다.

어느 날 가련한 여인 안미은이 뜻밖의 위험에 처한다. 천애고아인 미은은 자신이 처한 고통스런 상황을 하소연 할 데가 없다. 그저 창밖을 향해 누가 알아듣건 말건 혼잣말로 푸념을 늘어놓는 수밖에. 그러나 창밖의 주인공은 안미은의 말을 알아듣는다. 말 못하는 누이를 통해 입 모양만 보고도 상대의 말을 알아듣는 법을 터득하고 있었기 때문. 미은이 위험에 처한 사실을 알게 된 주인공은 그녀를 구출해내기 위해 한시적이나 현실 세계의 문제에 개입하게 된다. 때로 냉혹한 킬러처럼, 때로 온화하고 다정한 오빠처럼.

그가 유리 안의 세상으로 들어왔을 때, 그의 역할은 더 이상 단순한 유리창닦이의 그것이 아니다. 비겁함과 치졸함, 약한자에 대한 폭력을 일상적으로 휘두르는 부자라는 이름을 가진 벌레들을 일소하는 집행자 혹은 심판자의 모습으로다.

가진자들의 부에 대한 맹목적 맹신이 빚어낸 어처구니없는 음모를 파헤치고 그들의 치졸함을 까발리는 유리창닦이의 활약은 가히 압권이다. 특수부대 출신인데다 죽은 형에게서 전수받은 표창던지기 기술로 냉혹하리만치 차분하게 악을 응징하는 모습은 흡사 할리우드 영화의 액션히어로를 연상케 한다. 이 부분에서 독자들은 쾌재를 부르짖게 된다. 이처럼 통쾌하고도 속 시원한 일은 영화가 아니라면 좀처럼 보기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 이순원의 소설을 통해서도 그와 같은 대리만족과 희열을 만끽할 수 있게 되었다.

생각해 보면, 이순원의 새로운 시도 혹은 문학적 변신은 흡사 누군가의 그것과 닮아있다. 순간 떠오르는 작가가 바로 칠레의 망명 작가 ‘루이스 세풀베다’다. 순수와 감성의 작가 이순원이 난데없이 할리우드 영화 기법을 차용하고 있는 것이나 생태·환경문제를 비롯해 독재 권력의 부정부패를 파헤치며 과거 청산을 주장하던 루이스 세풀베다가 어느 날 갑자기 느와르영화기법과 추리기법의 소설(『감상적 킬러의 고백』, 『핫라인』 등)들을 잇달아 발표하고 있는 것은 매우 흡사한 모습으로 보인다.

루이스 세풀베다 소설의 주된 주제가 독재 권력의 만행에 대한 고발이라면, 이순원의 신작 『유리의 노래』는 가진 자들의 치졸함과 비겁함에 대한 적나라한 까발림이면서 동시에 가난한 자들의 순수성에 대한 연민이다. 주제와 소재에서 약간의 차이가 엿보이지만 문학적 변신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주제를 다루는 색다른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둘은 영락없이 닮은꼴이다.

우리 문학이 줄곧 독자들로부터 외면 받고 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테다. 우리 소설들이 지나치게 무겁거나 지나치게 가볍게 느껴지는 것 역시 그 이유 가운데 하나일지 모른다. 그런 면에서 적당한 무게와 적당한 가벼움을 그럴듯하게 버무려놓은 이순원의 솜씨는 눈여겨 볼만하다. 진정한 재담꾼은 말하기에 앞서 목에 힘부터 뺀다고 한다. 어느덧 문단의 중견이 된 이순원 역시 농익은 이야기꾼의 기질을 본격 발휘하기에 앞서 펜을 잡은 손과 어깨의 힘을 빼기 시작했다. 반갑고, 기대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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