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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위기, 그리고 식지 않는 신춘문예 열기

순간 후배 한 명이 조용히 자리를 털고 일어나 머리를 조아린 뒤 나가버렸다. 내 알기로 해마다 어김없이 ‘신춘문예 열병’을 앓고 있는 후배였다. 후배는 올해도 심혈을 기울여 쓴 단편소설을 들고 신문사 주위를 배회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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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일요일 아내와 함께 아이들을 데리고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대학 후배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짧은 거리나마 아이들에게 기차여행을 시켜주고 싶어 부러 차를 놔두고 올라가기로 했던 것. 예상대로 난생 처음 기차에 오른 아이들은 마냥 즐거운 표정이었다.

거리가 짧은 게 못내 아쉬웠다. 수원을 출발한 기차는 불과 30여 분만에 서울역에 도착했다. 곧 택시로 갈아타고 식장으로 향했다. 결혼식은 한 시간 가까이 남아있었지만 나는 서둘러야 했다. 보통의 하객과는 사뭇 다른 입장이었던 것. 결혼식의 주례사를 맡기로 돼있었다. 신랑 신부와 나이 차이도 10년 안쪽인 데다 결혼초년병인 주제에 결혼식 주례를 선다는 게 스스로도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 진심으로, 그리고 이해할만한 이유와 명분을 내세우며 진실 되게 부탁하는 후배의 마음을 외면할 수 없었다.

내 결혼식 때만큼이나 긴장했던 결혼식이었다. 애초 편안한 마음으로 차분하게 진행하자고 몇 번이나 다짐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막상 수백 여명의 하객 앞에 서자 이내 온몸에서 땀이 비오듯 쏟아지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도시당최 내가 하는 말을 나 자신도 알아듣지 못할 정도였다. 그나마 별 탈 없이 식을 집례하고 주례사까지 마친 게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지...

“결혼은 결코 사랑의 완성이 아닙니다. 새로운 시작이면서 도전입니다. 12년의 연애 끝에 드디어 결혼식을 올리는 이 순간, 다시 긴장해야 합니다. ‘인간 조건의 부조리’를 상징하는 시지푸스의 신화를 기억하십시오. 결혼이라는 형식의 어깨로 밀어올린 돌덩이는 언제든지 아래로 굴러 떨어질 수 있습니다.(후략)” 덕담보다는 충고에 가까운 주례사였다. 나의 생각이기도 했고, 근래 읽은 인문학적 연애심리보고서 『남자는 왜 여자의 왼쪽에서 걸을까』(필리프 튀르셰 저/ 권나영 옮김)에서 길어 올린 말이기도 했다.

뒤풀이에서 속이 좀 상했다. 오랜만에 만난 후배 중에 마침 사법시험에 합격한 녀석이 있어 덕담 한마디 한 게 화근이었다. 공부하느라 고생했으니 이제 차분하게 인문학 책 좀 읽으라는 나의 충고에 대한 후배의 대답이 가관이었다. “읽을 만큼 읽었거든요!” 요즘 유행하는 말로 바꿔보면 “됐거든요!” 혹은 “너나 잘하세요.” 정도였던 셈이다. 합격증에 잉크도 마르지 않은 터, 벌써부터 겸손을 상실해 버린 녀석이 심히 걱정스러웠다.

과거 내 모습이 떠올랐다. 봉사 문고리 잡은 격으로 순전히 운으로 신춘문예에 당선된 뒤 마치 대단한 일이기라도 한 양 꽤나 우쭐댔던 기억이다. 곧 영화가 만들어지고(시나리오로 당선됐으니까), 책이 나오고, 돈이 굴러들어오고, 세상의 관심이 나에게로 집중될 것만 같았었다. 5년이 지난 지금, 남은 것이라곤 남루한 감상과 헛헛한 허탈감뿐이다.

결혼을 축하하기 위한 뒤풀이 자리였으나 화제의 중심은 단연 사법시험에 합격한 녀석의 고생담이었다. 대화는 연신 미래의 검사 혹은 변호사의 모습을 상상하는 얘기들로 채워지고 있었다. 듣고 있던 나는 가슴 저 밑바닥에서부터 부아가 치밀었지만 꾸욱 눌러 참고 연신 술잔만 기울였다. 이따금 되뇌이는 상념이 또다시 고개를 들이밀었다. ‘얼어 죽을 신춘문예 대신 사법시험이나 볼걸.’

순간 후배 한 명이 조용히 자리를 털고 일어나 머리를 조아린 뒤 나가버렸다. 내 알기로 해마다 어김없이 ‘신춘문예 열병’을 앓고 있는 후배였다. 후배는 올해도 심혈을 기울여 쓴 단편소설을 들고 신문사 주위를 배회할 것이다. 그런 후배에게 그 자리는 몹시 불편했을 터다. 더구나 후배 옆에는 해마다 고배를 마시는 모습을 안타깝게 지켜보던 연인이 함께 있었다.

해마다 신춘문예 열병을 앓는 후배의 퇴장 이후 갖가지 상념들이 점점 더 빠른 속도로 더 깊이 머릿속으로 틈입해왔다. 그러고 보니 지난 세월이 덧없고 허망하게만 느껴진다. 애초 계획대로라면 신춘문예에 당선되고 이듬해에 소설 한편을 완성했어야 했다. 그리고 그 소설과 시나리오를 한데 묶어 책도 내고 영화제작도 타진했어야 했다. 마침 작품을 심사했던 감독이 같이 영화 일을 해보자는 제의를 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난 섣불리 덤벼들 수 없었다. 아내 혼자 힘으로 어렵사리 살림을 꾸린지 3년째 되던 해였다. 더 이상 책임과 의무를 방기할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하기 싫은 논술강의를, 팔자에 없는 직장생활을 시작해야 했었다.

먼저 자리를 뜬 후배가 상처받지 않았길 바란다. 아니, 차라리 상처를 받았기 바란다. 치유하기 힘든 깊은 상돃를 받아서, 그 상처에서 꾸욱꾸욱 쥐어짠 피고름으로 원고지를 채워나가기를 바란다. 그런 원고라면, 깊은 상처의 뿌리에서 뽑아낸 그런 문장들이라면 마침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게 분명하다. 하마 심사위원도 사람이다.

마침 후배의 블로그에 들어가 보니 이즈음의 고민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글이 눈에 들어온다.

「겨울이 온다는 이야기는, 언제나 처럼 가슴 한구석에 매달린 돌덩어리가 이리저리 흔들리기 시작한다는 의미다. 그 돌덩어리는 일년 내내 웅크리고 있다가 겨울만 되면 정신 못 차리고 이리저리 가슴 벽을 쳐댄다. 나는 알고 있다. 이미 십 수 년 전부터 그렇게 웅성대던 돌덩이를 나는 끝내 평생 간직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나는 등단이 가진 의미를 잘 알지 못한다. 그게 과연 뭘까. '글'에 있어서 소위 전문가 집단에게 나의 글이 '가치가 있는 글'이라고 인정받는 것. 대충 그 정도로 생각할 뿐이다. 사실 그 이상의 다른 의미라고는 아무리 생각해 내려 해도 잘 알 수가 없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정받는다’라는 사실일 텐데, 간혹 갈등을 겪는 이유는 사실 ‘인정받는다’는 것이 그토록 중차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느냐라는 일말의 자존심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저런 이유와 핑계를 거세게 회피하고나면, 내 가슴속에 남는 것은 '써야 한다는 열망'이 뭉쳐진 돌덩어리의 존재감이라는 사실이다.

무엇 때문에 나는 글을 써야하는 것일까. 왜 나는 쓰고 싶어 하는가. 도대체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아주 심각하게 고민해 본적도 없이, 어느새 '글'이라는 것에 내 인생의 무게가 절반쯤은 푹 빠져 있더라는 말이다.

그래저래 올해도 단편소설 하나는 썼지만, 아직도 고쳐야 할 곳 투성이인 데다, 가슴벽을 치고 돌아다니는 돌덩어리는 자꾸만 신춘문예 마감기한이 얼마 남지 않았다며 난리소동을 펼치고 있다.

대관절 신춘문예가 뭐란 말인가. 신춘문예 이전에 나 자신이 내가 쓴 글에 한번이라도 만족스러웠던 적이 있던가. 진실에 다가갈수록 나는 자꾸만 부끄러워지고, 내 열망이 혹여 거짓욕망은 아닌지 자신이 없어진다. (중략)

상념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깊어가는 겨울밤의 바람 소리는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흔히 문단이나 언론에서 문학의 위기를 위무하는 말로 자주 인용하곤 하는 게 해마다 식을 줄 모르고 되풀이 되는 ‘신춘문예 열기’다. 올해도 그 열기는 재연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위기의 문학이 되살아나는 건 아닐 터다. ‘소설가가 소설을 쓰지 않고, 시인이 시를 쓰지 않는’ 그런 어이없는 현실이 진정한 문학의 위기가 아닐까 싶다. 즉 문학의 위기는 문학외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문학내부에서 곪아 터져 문드러진 상처인 셈이다.

“왜 자기 안에 절을 못 짓고 산으로 가는가. 왜 자기 집 안에 고산준령을 품고 강을 보듬어 바다를 끌어안을 생각을 못하고 떠나기만 하는가.” 유용주 산문집 『쏘주 한잔 합시다』에 나오는 이와 같은 탄식은 곧 우리 문단을, 아니 시인이면서도 정작 시집은 뒤로 물리고 산문 몇 조각 모아놓은 책이나 연거푸 내고 있는 그 자신을 향한 말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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