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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기념일에 읽는 『결혼은, 미친 짓이다』

왠일입니까. 결혼기념일, 그것도 불과 두 번째 결혼기념일에 읽은 책이 하필 『결혼은, 미친 짓이다』라니요. 이쯤 읽으시곤 이런 짐작을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시라노, 당신의 결혼생활도 참 고달프고 권태롭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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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우리 집엔 왜 엄마·아빠 결혼사진이 없어?”
“응, 그게 말이지...”

유치원생 다정이(큰딸)의 느닷없는 질문에 저는 말문이 막혀버렸습니다. 그날 저녁 아내와 상의했습니다. 전 다짜고짜 결혼식을 올리자고 했고, 아내는 돈이 어딨냐며, 사진관에 가서 사진이나 한 장 박아오자고 했습니다.

제 고집이 아내의 우려를 눌렀습니다. 인간관계가 무난했다면 비용 제하고도 남는 장사(?)가 될 거라는 주변 사람들의 부추김에 귀가 솔깃했고, 나름대로 믿는 구석도 있었습니다. ‘그동안 뿌린 게 얼만데?’

결혼을 앞두고 갑자기 악재가 겹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미뤄왔던 결혼이었습니다. 그러니 부끄러울 것도 없다 싶었습니다. 까짓 아예 당당해지자는 뜻에서 청첩장의 ‘모시는 글’부터 아주 솔직하게 썼습니다.

「어느날 딸아이가 물었습니다. 엄마·아빠 결혼사진은 왜 없어? 아내와 저는 상의 끝에 아이들에게 결혼사진이 아니라 엄마·아빠의 진짜 결혼식을 보여주기로 했습니다. 뒤늦은 결혼이지만 부디 오셔서 축하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엄마·아빠의 결혼식은 곧 자신들의 결혼식이기도 합니다. 아이들 역시 결혼식의 주역이었거든요. 예쁜 드레스에 화장까지 하고 웨딩마치에 맞춰 꽃가루를 뿌리며 앞장서 행진하던 아이들의 모습이란... 결혼식 후 아이들은 대학 후배들이 부른 축가(동물원의 ‘널 사랑하겠어’)를 한동안 입에 달고 다녔고, 혹여 누군가의 결혼식장에 가는 날이면 어김없이 품평회를 하곤 했습니다. “엄마, 00삼촌 결혼은 우리 결혼식보다 손님이 더 많네. 아빠, 우리 결혼식에서도 케이크 자르는 거 하지 그랬어?”

꼭 2년하고 하루 전의 일입니다. 그러니까 어제가 바로 저희 부부, 아니 저희 가족 모두의 결혼기념일이었습니다. 연애 6년, 함께 산지 6년. 만난지 꼭 12년 만에 올린 결혼식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아이들은 어느새 8살, 6살이 되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인 큰애는 받아쓰기 숙제를 겨우겨우 끝내고 잠자리에 들었고, 아빠를 닮아 늘 잠이 안 온다며 늦게까지 돌아다니는 작은애는 결국 할머니에게 한차례 꾸지람을 듣고 마지못해 할머니 젖꼭지를 쥔 채 잠이 들었습니다.

작년에도 올해도 결혼기념일이라고 특별히 한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평소보다 애틋한 마음으로 아내의 얼굴을 한 번쯤 더 쳐다보는 것,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어도 용케 결혼기념일을 기억해낸 아이들이 저마다 결혼기념일 축하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것, 그 정도가 전부였습니다. 새벽 1시, 아내 역시 잠자리에 들었고, 언제나처럼 저는 문간방에서 혹은 책과 혹은 자판과 씨름 중입니다.

이번 주 독자칼럼은 뭘 쓸까, 꽤 고민했습니다. 고작 3회짼데 벌써부터 얘깃거리가 떠오르지 않으니 앞으로는 대체 어떻게 이어나갈지 걱정이 태산입니다. 언제까지 성프란시스대학만 우려먹을 수도 없지 않겠습니까. 고민 끝에 문득 떠올린 게 2년 전의 결혼식이었던 거죠. 마침 결혼시즌인 듯 합니다. 여기저기서 청첩장이 답지하는 걸 보면 말이죠. 그럭저럭 여기까지 자판을 두드리고 보니 어느새 화면의 페이지가 바뀌어 있습니다. 2쪽 1단 3줄 76칸, 벌써 써야할 분량의 반 이상이 해결된 셈입니다.

엔터 키를 연거푸 두 번 누른 다음, 화면에서 눈을 떼 옆에 놓인 책을 바라봅니다. 단발머리 여자의 굵은 다리 사이로 하얀 팬티가 살짝 드러나 보입니다. 양 손으로 책을 높이 받쳐 들고 있지만 시선은 엉뚱하게도 늘어진 넥타이만큼이나 추레하게 잠들어 있는 옆 사내를 향하고 있습니다. 독특한 표지의 이 책은 『결혼은, 미친 짓이다』(이만교 저, 민음사 간)의 개정판입니다.

왠일입니까. 결혼기념일, 그것도 불과 두 번째 결혼기념일에 읽은 책이 하필 『결혼은, 미친 짓이다』라니요. 이쯤 읽으시곤 이런 짐작을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시라노, 당신의 결혼생활도 참 고달프고 권태롭군요.’

그러나 아닙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오해하게 만든 것에 대해선 사과드리겠습니다. 요는 이렇습니다. 뭘 쓸까 고민하다, 결혼기념일을 떠올렸고, 그렇다고 내 결혼 얘기만 늘어놓으면 안 될 것 같아서 ‘결혼’이라는 말이 들어간 책을 찾게 잵었고, 그때 마침 영화 『결혼은, 미친 짓이다』가 떠올랐고, 그러고 보니 여태껏 원작 소설을 읽어보지 못했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던 것입니다.

간혹 혼동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읽지 않은 책을 읽었다고 착각하는 것 말입니다. 순전히 착각만은 아닐 테지요. 슬쩍 알은체, 읽은 체하면서 우쭐대고 싶었던 때가 있었던 게지요. “어, 그거? 당연히 읽었지.”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게 어디 한 두 권이랍니까. 『닥터 지바고』, 『부활』, 『죄와 벌』... 참나 막 쏟아지네요. 주워들은 건 많아가지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양철북』 등등. 기왕지사, 치부를 다 드러내 볼까요? 읽지도 않고 읽은 체 떠벌였던 것들, 그래서 늘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을 갖게 하는 책들... 『토지』, 『혼불』, 아뿔싸 『25시』, 『파우스트』... 제기랄.

대체로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접했던 것들입니다. 그래, 간혹 읽은 것으로 착각하거나 은근슬쩍 읽은 것처럼 행세했던 것들이기도 하고요. 이만교의 『결혼은, 미친 짓이다』 역시 영화로는 족히 너댓 번 이상이나 봤으니 그런 착각을 할만도 하지요. 그러고 보니 영화조차 극장에서 본 게 아니네요. 비디오, 케이블TV 등등.

책을 읽어보니까 확실히 다르네요. 확실히 영화보단 책이 낫습니다. 깊이도 볼륨도 훨씬 깊고 크게 느껴지네요. 세태에 대한 작가의 ‘냉소’와 ‘조롱’도 더 확연하게 드러나는 것 같고요. 제목에 대한 새로운 이해도 생겼습니다. 앞으론 절대 그냥 ‘결혼은 미친 짓이다’라고 쓰지 않을 겁니다. ‘결혼은’ 다음에 반드시 < , >를 찍어서 이렇게, ‘결혼은, 미친 짓이다’라고 써야 맞거든요. 그래야만 소설의 의미가 제대로 살아나는 겁니다.

뜻인즉, 이래요. 「결혼이 사랑의 완성이라는 등의 철지난 거짓말, 이젠 더 이상 하지 말자. 결혼은 그저 주위 눈치 보느라 어쩔 수 없이, 조건 맞춰가며 현실과 타협하는 것뿐. 학교에 들어가는 것이나 회사에 취직하는 것처럼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는 전형적인 입사식일뿐...」

소설은 물론 결혼을 비롯한 모든 ‘패턴화된 삶’에 대한 ‘냉소’와 ‘조롱’이 주를 이룹니다. 따라서 제목의 ‘결혼은’ 곧 ‘정의는, 진리는, 사랑은’으로 환치할 수 있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지점에서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되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이 소설이 규격화된 삶에 대한 ‘냉소’와 ‘조롱’일망정 결코 ‘부정’이나 ‘거부’는 아니라는 사실 말입니다.

이쯤에서 작가의 말을 한번 들어볼까요? 소설의 의미를 한마디로 응축하고 있거든요. “나는 모든 독점적인 것, 권위적인 것, 성스러운 척하는 것이라면 어느 것이든 어느 계층이든, 웃음과 농담의 대상으로 삼아보고 싶다. 나는 그들을 웃기거나 비웃어주고 싶다. (중략) 너무 많은 사람들이 결혼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다. 그래서 각자의 결혼생활을 거짓으로라도 미화시키거나 편협한 도덕론으로 묶어놓기에 바쁘다. 특히, 경제적 손익계산표를 바탕으로 한 거래이면서도 마치 순수하게 사랑하는 척하는 위선이 젊은이들 사이에서 만연되고 있다. 그런데도 결혼이 아주 성스러운 것인 양 치장된다. 결혼에 대한 이러한 환상은 우리를, 도리어 억압하는 기제로 작용하는 게 아닐까.”

그런데 말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결혼을 비롯한 모든 사회적 규범들에 대한 지나친 냉소는, 따지고 보면, 앞서 제가 고백했듯 ‘읽지 않은 책에 대한 알은체 혹은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섣부른 예단’이 아닐까 하는 의문 혹은 의혹 말입니다. 물론 작가 역시 기혼자라는 걸 알고 훀기는 합니다만 기혼자라고 해서 결혼의 의미를 모두 혹은 온전히 알 수 있는 건 아닐 테니 말입니다.

그런 혐의가 부담스러웠던 걸까요? 시종 결혼을 냉소와 조롱의 대상으로 삼던 소설에 느닷없이 그러한 냉소와 조롱은 어쩌면 현실에 맞설 용기가 부족했기 때문에 생긴 것일지도 모른다는 ‘반성’의 말이 등장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제야 나는 깨닫는다. 사진 속의 삶은 그녀가 가보고 싶어 했던 또 하나의 길이라기보다는, 그녀와 내가 갔어야 했던 길임을. 그러나, 우리에겐 그 길을 갈 용기가 없었다. 가야했는데 가지 못한 비겁함, 가고 싶었던 길을 가지 않은 죄책감, 이 행복에 겨워 보이는 사진들 뒤에 정말 가려져 있는 것은 바로 그런 쓸쓸함, 그런 뉘우침이 아닐까? 그것이 그녀가 굳이 자신과 나의 모습을 현실적으로는 백해무익하기만 한 사진이라는 형식으로 남겨두려 한 이유가 아닐까?”--p.233

자고 일어나니 아이들이 그려놓은 그림 두 장이 머리맡에 놓여있습니다. 어쩜 엄마·아빠를 이리도 우스꽝스럽게 그렸는지요. 아이들의 그림에는 일정한 패턴이 없습니다. 그저 보고 느낀 대로 그릴 뿐이죠. 진중권의 『미학 오딧세이』에 나오는 말이던가요? 아이들은 본 것을 그리지만 어른들은 관념을 그린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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