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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마중의 꼬마와 김동성님 |
서양적 사고의 결핍이 동양인의 사고와 해석으로써 완벽하게 표현된 작품 - 『나이팅게일』
안데르센의 이루지 못한 짝사랑
누구나 한 번쯤은 안데르센 원작의
『나이팅게일』을 읽어본 것 같이 느껴질 것입니다. 하지만 정작 이야기가 어떻게 되느냐고 묻는다면, 구수한 입말로 재미나게 풀어낼 수 있는 사람은 드물 거예요. 우리 기억의 정확성을 떠나, 안데르센이 쓴
『나이팅게일』은 사랑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것도 원작자인 안데르센이 이루지 못한 자신의 사랑을 노래한 슬픈 이야기입니다. 그가 살았던 19세기 덴마크에서는 ‘예니 린든’이라는 소프라노 가수가 유명했다고 합니다. 당시 유행하던 화사하고 기교적인 벨칸토 창법과는 달리 꾸밈없는 목소리로 소박하고 진실 되게 노래하는 예니 린든의 목소리는 북유럽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습니다. 바로 그 예니 린든이 평생을 독신으로 살아간 안데르센이 사랑했던 여인이었죠.
안데르센의 원작 속의 나이팅게일은 바로 자신만의 소박한 창법으로 노래를 부른 예니 린든의 분신입니다. 화려하지만 틀에 박힌 노래만 부를 줄 아는 ‘태엽 감는 새’가 당시의 여가수들을 상징하는데 반해, 자신만의 사랑과 진심으로 죽음까지 극복하게 해주는 노래를 부르는 나이팅게일처럼 예니 린든은 어린이를 위한 작품 창작 활동에 일생을 바친 안데르센의 고독을 위무하고 창작의 원천이 되어준 ‘뮤즈의 여신’ 같은 존재였습니다.
안데르센의 원작에 동양의 옷을 입히다
그림책
『나의 사직동』에서의 글과 판타지
『두로크 강을 건너서』를 통해 아동문학 평론가로서뿐 아니라 작가로서의 재량을 보여준 김서정님이 안데르센의 원작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놓은 이 책은
『나의 사직동』에서 보여준 인간미와 전통적인 것에 대한 향수와,
『두로크 강을 건너서』에서 보여준 그녀만의 판타지적 상상력을 엿볼 수 있게 해주는 글맛만으로도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든 독자층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섭니다. 그런데 까다로운 글 작가인 김서정님은 마찬가지로 작품에 있어 까다로운 그림책 작가인 김동성님의 그림과의 만남을 통해, 원작을 우리말로 옮긴 이야기가 주는 의미의 다층성을 더욱 풍윤하게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좋은 글 작가가 멋진 그림책 작가를 만나 함께 작업한다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 중요하다 할 수 있겠지만, 본 편에서 제가 다루는 것은 그림책이므로, 오늘은 김서정님이 아닌 김동성님이
『나이팅게일』에서 ‘무엇을’, ‘어떻게’ 그림으로 표현하고자 했는지에 초점을 맞추어 다루어 보려 합니다.
‘
『나이팅게일』
이 나오기까지’라는 제목의 인터뷰 기사(<어린이와 문학>, 2006년 7월호)에는 김동성님이
『나이팅게일』을 소재로 그림을 그리기까지 그가 흥미를 느끼고 매혹되었던 점들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이러합니다.
“
『나이팅게일』은 글도 좋지만 그림의 소재로도 아주 매력적인 작품입니다. 또한 판타지의 특성상 그 상상의 폭과 기이를 무궁무진하게 펼칠 수 있다는 점도 작가에겐 큰 즐거움이기 때문에 일러스트레이터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도전해 보고 싶은 멋진 텍스트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이 오래된 고전 안에는 서양적 사고방식과는 사뭇 다른 동양적 사고방식, 즉 자연에 대한 예찬이나 권력에 대한 허무와 모순, 인위적인 것에 대한 거부감 등이 풍자적으로 표현되어 있어 우선 흥미롭습니다.(p.116)"
『나이팅게일』을 통해 전달하고자 했던 키워드
작가의 말대로
『나이팅게일』은 중국을 배경으로 자연과 인공, 진실과 위선이 대립되어 있습니다. 김동성님은 그 대립을 통해 전자들의 위대함을 표현하는 방법으로써 우선은 주인공인 황제와 나이팅게일의 캐릭터를 연구하고 다양한 미학적 방법으로 그림에 접근하고 있지요. 작지만 영원한 것, 본질적인 것에 대한 가치를 알고 있는 나이팅게일은 자연과 진실의 표상입니다. 반면 거대한 몸으로 표현된 황제는 세상의 군주로서 온갖 부와 명예를 갖고 있으되, 가변의 것, 가식적인 것에 의해 마음이 흔들리는 인간군상의 대리인으로 등장합니다. 김동성님이 밝힌 것처럼 거구의 몸으로 표현된 황제의 위엄 뒤에는 나이팅게일의 노래에 눈물 흘릴 만큼 섬세하고 여린 구석이 있습니다. 김동성님은 황제가 점점 자연과 진실의 참 진리를 깨우쳐 가는 과정을 첫 장의 거대한 체구의 황제가 뒷장으로 갈수록 작아지는 모습으로 처리함으로써 시각적으로 은유하고 있습니다. 진실로 소중한 것은 사람들의 눈에 그다지 쉽게 띄지 않습니다. 진실과 자연을 상징하는 나이팅게일의 몸집이 작은 것도 바로 그 비범한 능력을 숨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노골적으로 진리를 처음부터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노력하는 자들에게만 자신의 참모습을 드러내는 셈인 거지요.
미술적 기법 - 영화의 카메라워크 방식을 빌려오다
제목이 나오기 전의 겉표지를 넘기면 영화의 도입부에서처럼 속표지가 4면이 나옵니다. 바닷가로 이어진 숲, 숲 속의 궁전, 그리고 클로즈업되어 열린 궁궐 문 안에 조그맣게 앉은 황제가 등장합니다. 이렇게 쭉 원경에서 근경으로 좁혀 들어가는 진행 방식은 독자들의 시선을 자연에서 인위적인 궁궐이라는 무대로 이동시킵니다. 이 때 예리한 독자라면 자연과 인위적이고 세속적인 장소 사이에는 무시할 수 없는 연결 고리가 반드시 등장하리라는 것 정도는 예측할 수 있겠지요. 그럼 김동성님의 다음 이야기를 들어볼까요?
“‘옛날 옛적에......’로 시작하는 이야기는 대부분 기승전결이 뚜렷한 시간진행형의 시제 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글 내용에 나이팅게일과 황제가 공간적으로 근거리에 있다는 점에 착안해서 영화에서 사용하는 롱 샷과 팬 무빙의 방식을 빌려 독자가 자연스레 이야기에 들어올 수 있도록 숲 속에서 황제의 궁성까지 천천히 공간이동을 하는 방식을 취했습니다.(pp.119-120)”
작가 김동성님이 밝힌 것을 염두하고 그림책을 보면 확실히 영화에서 많이 보이는 롱 테이크 방식과 전체 배경이나 인물을 쭉 훑어주는 팬 무빙 방식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런데 이 그림책을 보면 본래 안데르센이 작품을 쓸 때 중국이란 동방의 나라를 내세워 판타지적으로 이야기의 분위기를 몽환적으로 이끌어가고자 했던 의도를 더욱 확실하게 체험하게 됩니다. 아무래도 서양인보다는 동양인이고 그것도 극동의 같은 문화권에 속하는 우리 작가들이 동양적인 문물에 대한, 정서에 대한 이해 수준이 높을 수밖에 없겠죠. 그래서 이 그림책은 그 어떤 서구 작가도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안?르센이 원작에서 추구했던 판타지적 분위기가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진실을 직설적으로 설파하는 방법이 아닌 판타지를 통해 상징적으로 알려주고자 한 의도는 무엇이었을까요? 제 개인적 생각에 안데르센이 그토록 사랑했던 여인인 예니 린든에 대한 숭배를 가능한 감추고자 한 의도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누구든 자신의 짝사랑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에는 쑥스럽기 마련이니까요. 또한 이 점과 관련해서, 중국의 어느 특정 시대를 배경으로 황제의 의상이나 궁중 풍속도를 드러내지 않았던 이유도 이 이야기가 역사물이 아니라 가상의 판타지이기 때문이라고 김동성님도 말한 바 있습니다. 또한 이 작품은 먹선과 수묵효과 등의 수작업을 거친 다음, 컴퓨터에서 스캔을 받아 포토샵으로 채색과 편집을 하는 방식을 했기 때문에, 색이 주는 미묘한 변별력이 잘 살아있습니다. 물질적 부와 권력을 상징하는 황실 배경의 노랑과 빨강, 화해, 평화, 긍정의 의미로 쓰인 초록색 등이 도드라지지 않고, 채색 수묵화 속에 담담하게 어우러져 있게 된 것입니다.
서구인 아동문학가의 미완의 꿈, 드디어 실현되다
안데르센의 전기를 읽다보면 그의 예술가로서의 자부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을 통해 원작자 안데르센이 추구했던 가장 중요한 점 중의 하나가 ‘진실과 자유’의 힘입니다. 자신의 가치를 알아준 황제에 대한 보답으로 나이팅게일은 황실의 병실에서 서성거리던 죽음의 신을 물리쳐줍니다. 하지만 나이팅게일은 한 가지의 조건을 달지요.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자신은 황제 외에 가난한 농부와 어부들에게도 날아가 희망의 노래를 불러줘야 한다며 궁궐에 머무를 수 없는 형편을 이해해달라고 합니다. 또한 자신이 매일같이 황제의 침상을 찾아와 노래 불러주는 것을 진실에는 눈이 먼 신하들에게 비밀로 부쳐달라는 조건도 잊지 않지요. 진정성이 가득 담긴 예술 작품은 모든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보편성을 갖기 마련입니다. 안데르센의
『나이팅게일』이 시공을 초월해서 보편성을 확보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그 자신의 이루지 못한 사랑 이야기, 진정한 예술의 조건에 대해 탐구하는 예술가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타인이 온몸으로 느낀 짝사랑의 아픔을 보면서 아무런 감명을 받지 못한다면, 이 그림책 속의 ‘태엽 감는 새’와 다를 바 없겠지요. 서양인으로서 동양의 것을 동경했던 안데르센의 미완의 판타지를 마침내 완성시켜준 김동성님의 그림이 없었다면, 여전히 원작
『나이팅게일』의 결말은 기억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끊임없이 그림을 통해 자기완성을 실현해나가는 작가 김동성님
사실 김동성님을 소개하기 위해 본 칼럼에 삽화를 그리신 장천석님으로부터 그림을 받은 뒤에야 ‘어린이 독서 도우미’ 클럽에서 활동하시는 앨리스님께서 올리신 김동성님과의 인터뷰 기사를 보게 되어 조금은 망설였습니다. 정갈한 글에 작가와의 직접 만남을 통해 이루어낸 성과물에서 제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여러 가지를 느끼고 배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터넷 기사 바로 가기) 하지만 오히려 우리 시대의 중요한 우리 그림 작가이기에 여러분들께서 조명해주시는 현상이 반갑기도 하고 고맙기도 합니다.
그림책 작가로 걸어온 길
1970년 부산에서 태어난 김동성님은 홍익대 동양화과를 졸업하고 담배 ‘레종’의 캐릭터와 일러스트 작업을 한 경력이 있습니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글 작가 채인선님의
『삼촌과 함께 자전거 여행』에 그림을 그리게 되었고(1998년), 그것이 그림책 작가로서 왕성하게 활동하는 첫 단추를 끼는 계기가 되어주었습니다. 그러나 김동성님의 이름을 널리 알려준 작품은 2004년 ‘백상출판문학상’ 수상작인
『엄마 마중』입니다. 이 작품은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식민지라는 상황에 놓인 어린 꼬마가 기차역에 나가 엄마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가슴 시린 이야기를 서정적인 동양화 수묵채색화법으로 담아낸 역작입니다. 올 봄 간송미술관에서 열린 ‘우리나라 국보급 문화재 전시회’를 다녀오신 분들은 간송 전형필 선생님의 업적을 기억하실 겁니다. 간송 전형필 선생님의 삶과 우리문화 지키기 운동을 담은 그림책
『간송 선생님이 다시 찾은 우리 문화유산 이야기』에 그림을 그린 분도 바로 김동성님이지요. 또한 아직 책으로 발간되지는 않았지만, 조선일보를 통해 연재되고 있는 소설가 신경숙님의 <푸른 눈물>과 소설가 이문열님의 소년 소설
『하늘길』에 삽화를 담당한 분도 역시 김동성님입니다. 이처럼 왕성하게 활동하는 작가이면서도 정작 본인 스스로를 그림책 작가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하는 김동성님은 그 이유를 그림책이 다양한 일러스트 작업의 한 연장선상에 놓인 분야이기 때문이라며 그림책에 대한 당신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십니다.
“출판 역사 이래 그림책은 매우 독특한 성격과 위치를 점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특성상 문학이나 미술 어느 한 분야로 단정 지을 수 없는 복합성이 있습니다.....(중략).... 스무 바닥 내외의 연속된 글과 그림이 유기적으로 상호작용해서 펼쳐내는 예술적 쾌감은 미학의 극치라고 생각합니다.(p.123)"
그림책 작가로서 고민하기
그림책 작가가 단순히 그림책만을 잘 그려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김동성님은 작가라면 독자의 감성을 이끌어낼 수 있는 풍부한 상상력과 남다른 철학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고 믿고, 가능한 많은 것을 보고 듣고 경험해보려고 노력한다고 하십니다. 또한 그림책을 바라보는 시각 중 교육적 측면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어른 독자(1차 독자)들에 대해서도 우려의 말씀을 하시면서(앨리스님의 인터뷰 참고) 그림책 작가로서 당신은 그림책의 독자가 단순히 어린이 독자로 한정되는 것만은 아니라고 본다는 점 또한 <월간 디자인>과의 인터뷰를 통해 밝힌 바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어린이 독자가 중심 독자층을 형성하고 있는 그림책 분야에서, 작가로서 어린이의 상상력을 가로막는 진부한 시각의 연출 방식이 나오지 않도록 늘 경계하고 노력하신다고도 말씀하십니다.
벤 샨이나 케터 콜비치, 오윤 등과 같이 사회적 의식을 갖고 끊임없이 문제의식을 예술로 승화시킨 작가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김동성님은 그림책 작가로서는 찰스 키핑, 브라이언 와일드 스미스, 데이비드 크루즈 등을 좋아하신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많은 글 작가들의 이야기들을 그림책으로 표현하면서 알게 되셨다는, 글과 그림의 궁합이 잘 맞는지 아닌지를 우선적으로 검토해야하는 과정의 필요성에 관한 말씀은 작금의 그림책 시장에 여러 가지를 시사합니다. 쏟아져 나오는 태작 수준의 그림책 속에서 그림이 글에 종속되거나 그림들만으로 하나의 서사를 갖추지 못하는 작품들을 많이 보아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가 보장컨대 여러분이 김동성님의 그림책을 보실 때에는 그런 고민을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여기에 제 개인적인 소망을 덧붙이자면, 멀지 않은 시간 내에 김동성 선생님만의 글과 그림이 한데 어우러진 멋진 그림책을 몇 권 소장하고 싶답니다.
커다란 울림이 있는 감성으로 되돌아오는 『메아리』
산골소년 돌이의 이야기
오래 전에 돌이라는 소년이 깊은 산골짜기 외딴집에서 아버지와 누나와 함께 살았습니다. 돌이에게 동무라고는 누나와 메아리밖에 없었지요. 그런데 어느 날 밤 누나가 이런 말을 합니다. "난 내일 간다." 돌이는 어디로 가는지 궁금해 물었습니다. “어디루?” “시집가는 거래.” 누나의 대답므 듣고도 석연치 않은 돌이는 시집이 뭔지 되물었습니다. "나두 몰라. 남의 집으루 가는 거래." 남의 집으로 시집을 간 누나는 커다란 구멍을 돌이의 마음에 남겼습니다. 아버지마저 감자를 캐러 나간 뒤엔 혼자 울며 누나를 불러보았습니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자신의 목소리일 뿐입니다. 예전에 누나가 곁에 있을 때는 친구처럼 느껴졌던 메아리도 이제는 돌이의 외로움을 달래주지 못합니다. 그리움에 사무친 돌이는 결국 누나를 찾아 집을 나섰지만 그만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돌이를 찾아 뒤따라 나선 아버지가 어둠 속에서 돌이를 발견했고 울다 지친 돌이를 등에 업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누나가 떠난 텅 빈 자리를 대신해서 돌이에게는 새 친구가 생겼습니다. 돌이네 어미 소가 송아지를 낳은 것입니다.
위 이야기는 한국 단편 동화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작품 중 하나로 평을 받고 있는 향파 이주홍 선생님의 글로 『외로운 깜보』(세기문화사,1959년)에 실렸던 작품입니다. 그 뒤로도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이주홍 아동문학독본』, 창작과비평사에서 나온
『못나도 울엄마』에 재수록 되면서 반세기가 지나도록 면면히 많은 독자들의 마음에 깊은 돌이의 메아리를 새겨주고 있습니다.
돌보지 않는 가난한 서정을 어루만진 붓질
도판 양면으로 길쭉하게 펼쳐지는 섬세한 수묵화는 산골 소년 돌이의 일상을 정감 있게 표현하고 있는데, 만약 우리네 마음에 아픔처럼 어룽져 있는 가난한 산골 마을의 외로운 동심이 화사한 아크릴이나 두꺼운 마티에르 유화로 표현되었다면 과연 우리가 돌이의 쓸쓸한 메아리에서 이토록 큰 여운을 느낄 수 있었을까요? 푸른 저고리와 붉은 치마를 입은 누나가 사람들과 함께 산 너머로 사라지는 모습과 대비되어 그 모습을 멀리서 멍하니 바라보는 소년의 표정과 당장이라도 주저앉을 듯한 소년의 상실감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네 부모님 세대의 이야기라는 느낌으로 곧바로 폭넓은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힘도 바로 그림이 수묵담채화로 표현되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의 산을 표현하기에 가장 좋은 소재가 화선지와 먹이 아닐까요? 먹이 얇지만 질긴 화선지에 슬픔처럼 번져나가는 효과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애이불비’하는 우리네 한 많은 서정을 서로 달래주는 우리네 재료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단순히 재료만 제대로 선택되었다고 우리네 정서를 표현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림을 보세요. 쓸쓸함이 배어날 것만 같은 그림 속에서 누나 잃은 소년의 누운 몸은 마음처럼 천근만근일 듯합니다. 외톨이가 된 소년을 돌아보는 신발 신는 아버지의 옆얼굴 또한 붉게 그을린 향토처럼 애달프게 느껴집니다. 아침 햇살이 잔잔히 내리비쳐 금이 간 가난한 벽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한숨이 저절로 나옵니다. 너무나 안쓰럽고 애처롭기 때문입니다. 그 소년이 안개 낀 저 먼 산을 바라보며 누나를 불러봅니다. 유일한 동무인 메아리만인 안개 속에 가린 저 먼 산으로부터 공허하게 되돌아옵니다. 멀리 저쪽 산도 소년이 서 있는 이쪽의 산도 강원도 어느 가난한 산골 마을에 이름 없는 봉우리마냥 그저 외롭기만 합니다. 이런 서정에 깊이 공감할 줄 그림 작가가 아니었다면, 향파 이주홍 선생님의 단편 동화
『메아리』는 깊은 골짜기 어딘가에 묻혀버리고 말았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 밖에도 김동성님의
『매미, 여름 내내 무슨 일이 있었을까?』,
『비나리 달이네 집』도 함께 추천합니다. 그림책은 '책으로 보는 단편 영화'라 할 수 있습니다. 스무 바닥 내외의 연속된 그림과 글 안에 문학과 미술, 연극, 영화의 요소가 전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림책 작가는 그런 점에서 필름이 아닌 종이 위에 독자적인 스타일로 종합 예술을 펼치는 영화감독이라 할 수 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