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희네 집』에 놀러오세요
지금도 하동 할머니 댁에 가면 넓은 마당이 있고 군불을 때는 큰 솥이 있지만, 이제는 다 커버린 저에게 아련한 느낌으로 다가오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권윤덕 선생님의
『만희네 집』을 보고 있자니 예전에는 흔했던 ‘집’에 대한 그리움에 젖게 되네요.
한산한 골목길을 따라 올라가 페인트칠이 벗겨진 대문 앞에 섭니다. ‘누구누구’라는 명패가 초인종 위에 붙어있지요. 벌써 인기척을 느낀 마당의 강아지는 컹컹 짖습니다. 문이 ‘철컥’ 소리를 내며 열리면,
『만희네 집』과 너무나도 비슷한 우리네 집이 있습니다. 앞뜰 좁은 화단에 피어난 분꽃, 접시꽃을 뒤로하고, 현관문을 열고, 촌스럽긴 하지만 그래서 더욱 사람 사는 집 같은 마루 위로 올라서면 어느새 반갑다며 쫓아온 강아지가 닫힌 현관문 뒤에서 다시 컹컹 소리를 지릅니다. 안방에는 만희의 할머니 방처럼 손때 묻은 장롱이 있고 보료가 깔려있죠. 할머니는 거의 하루 종일 그 방에서 낮잠을 주무시고 간혹 천 조각을 꺼내 할머니보다 더 나이 든 가위로 철컥철컥 소리를 내면서 무언가를 만드십니다.
부엌은 어떨까요? 작가 권윤덕 씨는 부엌이란 공간을 묘사하면서 강아지들이 가장 들어오고 싶어하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덧붙여 부엌에는 맛있는 냄새와 이야기 소리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문득 이 대목에서 저의 어린 시절, 만희처럼 의자 등받이에 턱을 괴고 엄마에게 학교에서 있던 일을 종알종알 이야기하던 추억이 떠올랐습니다. 그렇죠, 부엌은 냄새 때문에만 그리운 공간이 아닙니다. 정겨운 대화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공간이기에 어쩌면 마루보다 더욱 정겨운 곳일지도 모릅니다.
자, 이제 만희를 따라 제 기억도 2층으로 올라가 봅니다. 달랑 있는 옥탑방, 그곳은 만희의 아빠가 공부하는 서재인가 봅니다. 그리고 텅 빈 공간 한편에 작은 채소밭이 있습니다. 집에서 먹을 고추와 상추 따위를 재미삼아 키울 수 있는 할아버지의 작은 공간인 셈이지요. 옥상은 겨울철을 제외하고는 늘 따듯합니다. 바닥은 내리쬔 햇볕으로 따끈하게 데워지는데, 특히 햇살이 좋은 날은 두툼한 요와 이불이 뽀송뽀송하게 햇살을 받으며 빨랫줄에 매달려 있습니다. 빨래에 얽힌 추억 한 조각을 상기시켜주며, 작가는 널어놓은 이불 속에서 만희가 물고기처럼 헤엄쳐다닌다고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놀이에 지친 만희가 햇볕 냄새가 엄마 냄새처럼 고소하게 밴 이불에서 쿨쿨 잠든 모습으로 만희네 집 이야기를 마칩니다. 그러나 만희와 함께 만희의 집으로 들어간 제 추억은 만희가 잠든 뒤에도 여전히 졸린 줄을 모릅니다.
아들 만희에게 보여주기 위해 그림책으로 엮었다는
『만희네 집』은 마치 실재하는 집에 초대된 것처럼 더욱 또렷한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섬세한 시각적 표현이 돋보입니다. 그러나 섬세하기로 따진다면 실재를 재현한 사진만 못하겠기에, 이 책이 우리에게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이유는 작은 부분까지 놓치지 않고 세밀하게 표현한 점 때문만은 아닌 듯합니다. 이는 작가가 우리네 전통 민화의 기법에 충실히 따라 우리네 삶의 공간이었던 집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권윤덕 선생님에 대하여
1960년 경기도 오산에서 태어난 권윤덕 선생님은 서울여대 식품과학과를 졸업하고 홍익대 대학원에서 광고디자인을 전공했습니다. 졸업 후에는 디자인 일을 하다가
『까막나라에서 온 삽사리』(정승각 글)의 그림을 그리면서 그림책 작가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1987년부터 안양지역 미술문화운동단체에서 ‘시민미술학교’를 운영하면서 만난 이억배, 정유정 선생님들과 함께 그림책 모임을 만들었습니다. 아들 만희에게 보여 줄 그림책을 찾다 본격적으로 그림 작업을 시작하여, 첫 작품
『만희네 집』(1995)을 선보였습니다. 그 후 한동안 수원에 살다가 지난 98년에는 동양철학을 공부하는 남편을 따라 중국으로 건너가 중국 북경에 머물면서 동양화를 공부했습니다. 수묵화와 가는 붓으로 그리는 공필화를 배운 후 한국으로 돌아온 권윤덕 선생님은 현재 관악산 불성사 법수 스님으로부터 불화를 배우면서 옛 그림의 미감을 그림책 속에 재현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그림책
『씹지않고 꿀꺽벌레는 정말 안 씹어』의 후기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1995년의 일곱 살 아이와 2000년의 일곱 살 아이는 다르다.
내가 그림책으로 만나는 일곱 살 아이는 매번 다르다.
난 요즘 아이들과 같이 놀고 싶어서 이 책을 만들었다.」
2003년 겨울 통권으로 나온 <창비어린이>에 소개된 ‘그림책 현장의 목소리를 듣는다’라는 제목의 좌담 후기에서는 ‘오늘 우리 그림책작가들은 꾸준한 도전과 각성, 그리고 독자들의 높은 관심 속에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고 있다’고 분석합니다. 또한, ‘설명 가능해야 하고, 소통 가능해야 하고, 한 장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이어져야 하는’ 그림책에 관한 원론적 고민과 함께 삽화와 그림책의 혼동 문제, 그림을 통한 형상화 문제를 다루었다고 합니다. 당시 좌담에 참석한 선생님이 어떤 말씀을 하셨을까 궁금하기는 한데, 유감스럽게도 당시 <창비어린이>를 구할 수 없는 관계로 직접 다루지는 못하게 되었습니다.
다만, 선생님이 여러 통로를 통해 그림책에 대해 하신 말씀으로 미루어 보건대, 시대에 따라 아동이 그 시대에 적응하는 양태도 달라지기 때문에 그림책의 주 독자인 아동들이 그림책의 내용과 표현에서 소외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작가가 끊임없이 아이들에 대한 관심을 갖고 아이들의 생활과 마음을 읽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 선생님의 주장인 듯합니다. 아이들은 책을 보는 동안 끊임없이 작가와 소통하기를 원하는데, 작가가 아이들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한 채 어른의 눈으로 가르치려는 교육적 효과에만 매달리면, 아이들은 책읽기에서 흥미를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이겠지요. 권윤덕 선생님은 일련의 작품 속에서 숨은 그림을 찾듯이 많은 이야깃거리를 끄집어 낼 수 있도록 했습니다. 권 선생님은 이를 ‘숨기찾기’ 놀이라고 이름 붙였다고 하네요. ‘숨기찾기’ 놀이를 통해 아이들은 그림 속 비밀을 찾아가게 되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책과 친해지게 된다는 것이죠.
한편 지난 2004년 6월 8일 <우리교육>에서 마련한 ‘작가와 함께 읽는 그림책’ 강좌가 끝나고 <아르떼>에서 권윤덕 선생님과 인터뷰를 가졌다고 합니다. 그 인터뷰에서 나타난 선생님의 그림책에 대한 생각을 옮겨볼까 합니다.
선생님은 그림책이 아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친다거나 스토리의 이해를 목적으로 하는 교육의 수단으로 사용되는 것에 대해, 그것이야말로 그림책을 접하는 가장 좋지 않은 방법이라고 꼬집어 말하고 있습니다.
『만희네 집』을 통해 작가가 의도한 것과는 달리, 한 가지 요소만을 끄집어내어 옛날 집의 구조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가르칠 목적으로 책이 이용되는 것에 불만을 갖고 계신다고 합니다. 시각, 전통, 사상, 미술 등이 총체적으로 엮여 들어가 있는 그림책을 느끼기도 전에 학습용으로 접하게 할 때, 아이들은 많은 것을 놓치게 되기 때문이죠.
선생님이 추천하는 그림책 보는 가장 좋은 방법은, 부모는 아이들이 책 속에서 놀 수 있도록 책을 읽어주고 아이가 책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질문을 해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예컨대
『만희네 집』은 전통과 현대의 중간에 놓여 있는 만희 할머니의 집이 배경이 되고 있는데, 아이가 그 책을 읽다가 엄마에게 물어오면 그것이 고리로 연결되어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이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말씀이죠.
선생님은 그림책이야말로 아이가 세상을 알아가는 방법을 체득하는 데 처음 접하는 책이란 점에서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의 방법 역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엄마가 끊임없이 읽어주면서 자연스럽게 잘 다듬어진 문장을 통해 문학적 리듬감도 부가적으로 얻게 되고 엄마와의 의사소통에서 친근감과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도 커진다는 것입니다.
권윤덕 선생님은 그림책이 다른 매체와 다른 점에 대해, 그림책에는 ‘건너뛰기’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림책은 만화책처럼 연속적인 그림으로 이어지지 않고 대신 그림 한 장 한 장 사이에 공간적, 시간적 분리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무엇인지를 상상하면서 머릿속으로 스토리를 스스로 만들어가는 즐거움이 그림책이 가진 가장 큰 장점이기도 하다는 것이죠. 엄마들은 아이들이 오감을 통해 문화를 접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무엇보다도 가르치려 하지 말고 아이들이 그림책과 대화할 수 있도록 지켜봐야 하는 인내심이 필요하다고 거듭 강조합니다.
열두 달 옷 이야기
「열두 달 옷을 갈아입으며 옷에 얽힌 사연과 추억을 되새김해 보는 책. 누구에게 물려 입은 옷, 친구 것과 닮은 옷, 동물원 갈 때면 꼭 꺼내 입는 옷, 엄마가 만들어 준 옷 등 옷을 둘러싼 아기자기한 이야기들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손때와 이야기때가 묻은 옷을 하나하나 구경하며 책장을 넘기다 보면 어느덧 한 해가 훌쩍 가 버리고 다음 새해가 새로운 옷들과 함께 시작됨을 느끼게 된다.」
위의 글은 면지에 적혀있는
『엄마, 난 이 옷이 좋아요』에 대한 소개글입니다. 이 책은 권윤덕 선생님의 두 번째 그림책으로 1월부터 12월까지 매달 아이의 추억이 담긴 옷들을 꺼내놓고, 아이들의 이야기를 곁들여 놓았습니다. 마치 어렸을 때 했던 인형 놀이를 떠올리게 하지만, 인형 옷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 그림책에 나오는 옷은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옷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 옷 때문에 여동생과 자주 싸우곤 했습니다. 대체로 제 옷을 여동생이 물려받는 식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여동생은 불만이 많을 수밖에 없었을 듯합니다.
책 속에는 털실로 짠 따듯한 모자가 있고, 할머니가 장만해주신 설빔도 있지요. 요즘이야 헌옷을 잘라서 만든 옷을 입고 다니지 않아도 될 만큼 생활이 풍족해졌지만, 책에는 아빠의 헌옷을 잘라 만든 빨간 바지가 나옵니다. 이 책을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니 예전에 저는 어떤 옷을 입었을지 옛 사진첩을 찾아보고 싶어지네요. 빨간 내복을 입기 시작하던 때가 11월이었나, 이 책에는 내복이 11월에 등장하는데, 저는 이 그림책을 보면서 아련한 추억 속으로 자꾸자꾸 빠져 들어가게 됩니다.
권윤덕 선생님은 책을 만들고 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이들은 몸으로도 옷을 입지만 생각으로도 옷을 입는다고요. 또한, 이 책을 읽고 아이들이 옷에 묻어있는 소중한 사연들을 되새기면서 “엄마, 내 옷 이거 있잖아” 하며 옷장에서 옷을 하나하나 끄집어 낼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이죠.
제주도꼬리따기노래
제목으로 삼은 ‘제주도꼬리따기노래’란 말이 무슨 뜻인지 궁금하시죠? 책의 바탕이 된 제주도 꼬리따기 노래는 아이들이 자주 부르는 말잇기 노래로서 누구에게나 낯익은 ‘빠르면 비행기. 비행기는 높아. 높으면 백두산’과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는 제주도 말놀이의 하나입니다. 이 노래는 그때그때의 기분에 따라 누구든 언제든 만들고 고쳐 부를 수 있는 것이 특징이라고 합니다. 이 책은 제주도의 꼬리따기 노래 몇 개를 보태고 다듬어서 만든 것으로 ‘나는 것은 까마귀. 까마귀는 검다. 검은 것은 바위. 바위는 높다’로 이어집니다.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시피, 제주도는 바람과 돌과 해녀가 많은 삼다도입니다. 책에도 이런 지역적 특색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아이가 물질나간 엄마를 그리워하고 엄마를 찾아 나선 긴 하루를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 그림책을 만들기 위해 권윤덕 선생님은 문헌자료뿐 아니라 제주도를 두 번이나 취재하면서 살아있는 자료를 수집했다고 합니다. 특히 할머니 해녀이신 강오녀 님의 집에서 민박하면서 ‘해녀의 일생’을 진솔하면서도 생생하게 묘사할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했다고 합니다.
“이 책에 ‘아빠’라는 남성의 존재는 그리지 않았어, 일부러. 제주도 곳곳에는 돌무덤이 보이는? 그게 바로 아빠의 무덤이래. 뱃길 따라 고기잡이에 나선 우리 할아버지 세대들은 그대로 영원히 돌아오지 못한 거지. 그래서 해녀는 한 가정을 책임져야 했던 거야.”
권윤덕 선생님은 마치 해녀처럼 구수한 입담으로 제주도 해녀의 삶을 풀어놓습니다. 권윤덕 선생님은 살림을 책임지기 위해 시커먼 바다 속으로 물질해 들어가는 고달픈 해녀의 삶을 통해 모성의 강인함에 슬픔을 배우셨다고 합니다. 신발을 신고 집을 나서는 아이를 보면서 슬픔이 잦아들었고, 그래서 오히려 제주 해녀의 삶과 모성, 아이의 외로움을 아름답게 그리고 싶었다고 합니다. 너무 슬프지만, 슬프지 않게 슬픔을 그리는 방법을 배웠다고 합니다.
『시리동동 거미동동』은 제목부터 매우 토속적입니다. ‘시리동동’은 거미가 거미줄에 달린 모양을 나타내는 제주도 토박이말이고, ‘거미동동’은 운율을 더해주기 위해 붙인 말입니다. 제주도 민간에서는 거미를 집을 지키는 신으로 생각했는데, 실제로 제주도 향토집에는 거미가 많다고 하네요. 바람이 많은 제주도의 향토집 지붕 처마 밑 거미줄에 매달려있는 거미와 거미줄이 흔들리는 모습인 셈이지요. 이 책은 ‘바다는 깊다. 깊은 것은 엄마 마음’이란 표현으로 끝을 맺고 있는데 바로 이 책에서 전해주고자 한 것도 바다같이 깊은 엄마의 사랑입니다.
화려한 색의 대비로 강렬한 인상을 주는 그림은 아이들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비록 제주도의 말잇기 노래에서 따온 이야기 형식이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막상 책장을 넘기다 보면 아이들이 재미를 느끼며 금세 따라할 수 있도록 한 작가의 섬세한 배려가 돋보입니다. 권윤덕 선생님은 아이들이 그림책을 그림으로 보기 때문에 글을 따라 그림을 그리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고 합니다. 앞서서도 이야기했지만, 동심이 빠진 동심주의에 대한 많은 것을 시사하는 말씀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