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야, 부탁해! -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 『고양이 소녀』
고양이는 강아지와 더불어 인간과 가장 친근한 동물로 여겨진다. 그런데 이미지는 전혀 다르다. 강아지는 ‘충정’인 반면에 고양이는 ‘영리’하다는 인상이 강하다.
어두운 밤, 담벼락에 올라가 눈을 반짝이는 고양이를 본 적이 있으신지? 그때의 기분을 떠올려보자. 어떤가? 혹여 고양이가 인간을 관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고양이는 강아지와 더불어 인간과 가장 친근한 동물로 여겨진다. 그런데 이미지는 전혀 다르다. 강아지는 ‘충정’인 반면에 고양이는 ‘영리’하다는 인상이 강하다. 강아지는 먹이를 주면 달라붙어서 애교를 떨거나 주인을 졸졸 따라다니는데 반해 고양이는 그러지 않는다. 아주 오랜 시간 정성을 들여야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 때문에 영리하다는 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다.
고양이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소설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고양이를 화자로 내세운 소설들도 은연중에 고양이를 ‘영리한 동물’로 취급하고 있다. 얼마나 영리한지 인간을 조롱할 정도로 ‘영악’하다는 말까지 나온다.
고양이를 화자로 내세운 소설의 대표격인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보자. 이 작품은 백 년이 넘도록 사랑받고 있는데 이유인즉 고양이가 발산하는 ‘풍자의 힘’ 때문이다. 그것은 백 년의 사랑은 물론이고 이 작품을 일본 근대 문학의 으뜸으로 손꼽히게 할 정도니 그 힘이 오죽하겠는가.
그렇다면, 힘의 원동력이 되는 고양이는 어떤 녀석일까?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을 두고 “나는 인간과 함께 살면서 그들을 관찰하면 할수록, 그들은 제멋대로 행세한다고 단언할 수밖에 없게끔 되었다”라고 평가하는 이 녀석은 바쁘다고 아우성치는 인간에게 스스로 일을 저질러놓고 바쁘다고 난리를 친다고 말하는가 하면 인간은 고집을 부려놓고 이겼다고 생각하며 행복해한다고 비웃는 등 인간의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를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고양이가 비판하는 대상이 ‘지식인 계열’이라는 점이다. 구체적으로 보면 고집 세고 허영심 가득한 주인집 선생, 자칭 미학자라고 주장하는 허풍선이 메이테이, 결혼하기 위해 박사논문을 준비하면서 그 주제로 잡은 것이 '개구리 눈알의 전동 작용에 대한 자외선의 영향'이라고 밝히는 물리학자 간게쓰 등이다.
지식인이라면 고고한 이들이 아닌가? 더욱이 이 작품이 백 년 전에 나온 것임을 생각해본다면 더욱 그렇다. 그런데 고양이가 지식인의 속살을 공개하고 있다. 덕분에 지식인의 ‘고고함’은 겉모습에 불과할 뿐, 진짜 모습은 ‘후안무치’라는 것이 드러난다. 끼리끼리 잘난 체하지만 알고 보면 ‘혼자 잘되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똘똘 뭉친 그들의 속내가 폭로되는 것이다.
고양이는 또한 그들이 혹시라도 남이 나보다 잘될까봐 걱정하느라고 잠을 못자는, 그야말로 ‘가짜’ 지식인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그들이 고상한 척하며 세상을 등지고 있지만 실상은 세상이 알아주기를, ‘삼고초려’ 해주기를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물론 그럴 자격도 없다는 말을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으면서 말이다. 결국, 고양이의 풍자에 따르면 삼류 코미디처럼 웃기지도 않은 존재가 지식인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는 국어 교과서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봉산탈춤’과 비슷하다. ‘봉산탈춤’이 ‘말뚝이’를 통해 양반의 허위의식을 폭로했다면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는 ‘말뚝이’의 자리를 명석함과 동물적인 특성을 갖춘 ‘고양이’가 대신해 지식인들의 가식과 위선을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
백 년! 말이 쉬워 백 년이지 그렇게 장수하면서 사랑받는 작품도 드문데 그 공은 “나, 고양이는 죽을 때 죽는다”라며 큰소리 뻥뻥 치는 배짱 좋은 고양이, 담벼락 위에 올라가 인간을 조롱하는 영악한 고양이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시대가 오늘에 가까워질수록 이러한 경향도 조금씩 변해가고 있다. 고양이가 영리한 것은 여전하지만, 영리함 뒤에 가려진 외로움, 사랑에 대한 갈망을 주목한 것이다. 똑똑한 것으로는 채울 수 없는 갈증을 주목한 셈인데, 최근에 나온 부희령의 『고양이 소녀』가 대표적이다.
『고양이 소녀』의 고양이는 어린 나이에 가족의 품에서 홀로 떨어져 나왔다. 자의는 아니다. 엄마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고양이는 엄마로부터 살아가는 방법, 예컨대 비닐봉지를 할퀴어서 뜯는 법, 쓰레기통 뚜껑을 여는 법 등을 배워둔 상황이다. 하지만, 안다고 해서 잘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부족한 뭔가가 있다.
그것은 뭘까? 고양이는 어떤 위험이나 두려움도 이겨낼 수 있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쉽지 않다. 부족한 것을 채워야 한다. 바로 외롭지 않아야 한다는 것, 누군가가 만들어준 마음속의 따뜻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누가 만들어줄 수 있는 것인가? 엄마는 아니다. 엄마는 도리어 고양이에게 홀로 살아가는 법을 알라고 호통을 친다. 마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고양이처럼 말이다.
그럼 누구일까? 친구다. 상처를 서로 치유해 줄 수 있는 그런 친구, 서로의 가슴을 따뜻함으로 채워줄 수 있는 친구가 필요하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고양이가 바라는 것은 비단 고양이만의 것이 아니다. 인간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렇다. 『고양이 소녀』의 고양이는 인간, 특히 한없이 여린 청소년을 닮았다. 외모는 고양이일지라도 마음은 인간과 똑 닮은 셈이다.
인간은 말을 솔직하게 하지 못한다. 쑥스러움이 많다. 하지만, 고양이라면 어떨까? 고양이는 영악하지만, 한편으로는 영민하게 그것을 넘어서서 솔직하게 고백할 수 있다. 자신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에 ‘사랑한다’고 말하고 ‘사랑해 달라’고 말하는 것이다. 또한, 이런 마음을 누군가에게 전해주는 것도 할 줄 안다. 아주 부드럽게 말이다.
고양이는 인간을 조롱할 줄 안다. 하지만, 이토록 ‘영민’하게 인간을 감싸 안아 주는 존재가 되기도 한다. 일종의 ‘빨간약’과 같은, 따스한 온기를 전해주는 친구가 되는 것이다.
백 년 전의 일본 고양이는 털을 곧게 세우고 인간들 사이를 걸어다니며 인간의 우스꽝스러운 면모를 생생히 중계해줬다. 그리고 이제 막 태어난 한국 고양이는 고운 털을 지닌 채 인간의 품으로 들어가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줬다. 둘 다 영리하다. 다만, 어떤 면모를 보느냐에 따라 ‘영악/영민’으로 나눠질 것이다. 어떤 고양이가 더 마음에 드시는지? 풍자도 좋고 따뜻함도 좋다. 어쨌거나 인간을 위한 것이니까. 그래서 외쳐본다. 고양이야, 부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