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재밌게 보기 ③ - ‘전작주의’와 춤을!
헌책수집가 조희봉은 『전작주의자의 꿈』에서 소설을 재밌게 보는 아주 멋진 방법을 소개해주고 있다. 바로 ‘전작주의자’가 되는 것이다.
-작품 1-
어느 집에 다섯 명이 동거를 하고 있다. 그들은 저마다 사연이 있는데, 각자 다른 사람들은 그 사실을 모를 것이라 생각한다. 몸만 함께 지낼 뿐, 마음은 자신만의 것이라 여기는 것이다. 하지만 어쩌나? 한 명의 비밀을 네 명은 모두 알고 있다. 알고 보니 ‘모른 척’했던 것에 불과한 것이다.
-작품 2-
한 남자가 남성용 정조대를 구입했다. 자신도 왜 구입했는지는 잘 모른다. 그저 착용해보고 싶은 호기심에 일을 저질렀다. 남자는 그것을 착용하고 기숙사로 돌아간다. 기숙사 특성상 분명히 누군가에게 그 사실을 발각당하고 그 때문에 망신당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그들은 유난히 친밀한 삶을 누리고 있기에 걸리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아무도 방 안의 누군가가 정조대를 찼다는 사실을 모른다. 서로 잘 안다고 믿었지만 알고 보니 ‘아는 척’했던 것에 불과했던 것이다.
작품 1과 작품 2를 찬찬히 살펴보자. 그리고 작품 속에 나오는 이들을 ‘현대인’으로 상상해보자. 어떤 뉘앙스가 느껴지는가? 작품 1은 함께 잘 살기 위해 잘못 같은 것을 일부러 모르는 척해주는 심리를 알려주고 있다. 이와 달리 작품 2는 함께 잘 살기 위해 아는 척하지만 실상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지적한다. 같은 방에 사는 이가 정조대라는 특이한 물건을 착용해도 모른다는 것이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셈이다.
작품 1과 작품 2는 현대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묘하게 서로를 비켜나고 있는데, 자, ‘당신’이라면 어느 것에 손을 들어주겠는가? 두 작품 모두 날카로운 통찰력이 눈에 띈다. 하지만 함께 손을 들어주기는 어렵다. 그러니 아쉽더라도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정말 그래야 할까? 만약 작품 1과 작품 2의 저자가 ‘동일’하다면 어떨까? 그렇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고 만다.
헌책수집가 조희봉은 『전작주의자의 꿈』에서 소설을 재밌게 보는 아주 멋진 방법을 소개해주고 있다. 바로 ‘전작주의자’가 되는 것이다. 전작주의자란 무엇인가? 전작주의부터 알 필요가 있다. 『전작주의자의 꿈』에서 그 설명을 직접 보도록 하자.
「(전작주의란) ‘한 작가의 모든 작품을 통해 일관되게 흐르는 흐름은 물론 심지어 작가 자신조차 알지 못했던 징후적인 흐름까지 짚어 내면서 총체적인 작품세계에 대한 통시/공시적 분석을 통해 그 작가와 그의 작품세계가 당대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찾아내고 그러한 작가의 세계를 자신의 세계로 온전히 받아들이고자 하는 일정한 시선’을 의미한다.」(『전작주의자의 꿈』 중에서)
‘징후적인 흐름’, ‘통시/공시적 분석’ 등의 단어 때문에 말이 좀 어렵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스트레스 받을 거 없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전작주의란 작가의 모든 작품을 읽으며 작가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자는 것이다. 자, 그럼 ‘전작주의’가 왜 재밌는가? 앞에서 설명한 작품 1과 작품 2를 보며 그 이유를 탐구해보자.
작품 1과 작품 2는 한창 주목받고 있는 요시다 슈이치의 『퍼레이드』와 『랜드마크』에서 엿볼 수 있다. 요시다 슈이치는 ‘도시’에 사는 ‘현대인’들의 다양한 표상을 그리는 것으로 유명한데 두 작품은 그러한 경향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자, 그렇다면 이 상황에서 질문이 하나 떠오를 것이다. 두 개의 다른 시선 중에 요시다 슈이치가 손을 들어주는 것이 무엇일까, 하는 질문이다.
탐구를 해보자. 외국 작가인 탓에 언론 인터뷰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으니 먼저 할 수 있는 일은 작품을 쓴 연도를 찾아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의 시선이 어디에서 어떻게 변했는지를 알 수 있다. 하지만, 연도를 찾다보면 또 다른 ‘복병’들을 만나게 된다. 다른 작품들, 즉 『동경만경』이나 『7월24일 거리』, 『파크 라이프』나 『일요일들』에서는 어떤 시선이 감지되느냐,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은 하나다. 다 읽어보며 나름대로 지도를 만들어 보는 것이다!
지도를 만드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특히 작품이 많을수록 그렇다. 하지만, 자신만의 지도를 갖는 것처럼 즐거운 일도 없다. 한번 상상해보자. 만약 작가가 어느 시점까지는 무엇을 말했으며, 어느 작품으로 분수령을 맞이해 어떻게 변화했고, 소설세계에 어떤 미묘한 균열이 발생하고 있는지를 발견했다면 어떻겠는가? 어떻기는 뭐가 어떤가! 그렇다면 이미 당신은 그 작가의 팬으로 작가의 소설세계를 통째로 음미하는 것이다. 멋진 일 아닌가?
작품을 그 자체로 보는 것과 작품을 전체의 부분으로 보는 것의 차이는 상상 이상이다. 필립 클로델의 경우를 보자. 이 작가의 경우 처음으로 소개된 작품은 『회색영혼』이다. 인간의 영혼은 배경색에 따라 그 색감이 달라지는 ‘회색’이라는 암시를 주고 있는 이 작품은 전쟁이라는 비극적인 상황에서 인간이 얼마나 비열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회색영혼』만 본다면 필립 클로델은 인간의 어두운 그늘을 쫓는 작가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후에 소개된 『무슈 린의 아기』는 어떨까? 전쟁이라는 비극적인 상황에서도 ‘인간은 아름다운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이 작품은 요즘 등장한 작품들 중에서 가장 인간적이고 따뜻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이 작품만 본다면 작가의 시선이 감미로울 정도로 따스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둘을 함께 놓고 본다면? 또한 이후에 어떤 내용의 작품이 나올지 추측해본다면? 그때부터 작품은 끝났어도 즐거움은 계속된다.
『적의 화장법』으로 유명세를 탄 아멜리 노통브는 어떨까? 작가의 작품은 일관되게 ‘적’을 쫓는데 주력하고 있는데 대표작인 『적의 화장법』은 내 안에 잠재돼 있던 무의식을 적으로 삼고 있다. 그런데 『오후 네 시』도 비슷하다. 하지만, 무의식이 발현되는 계기가 현격하게 다르다. 왜 다른 걸까? 그걸 쫓을 자격은 전작주의자에게만 허용된다.
「어떤 종류의 글이든, 글은 그 글을 쓴 사람의 의도와 분리될 수 없다. 그리고 그 의도는 또한 글쓴이 자신의 내면세계와 깊은 연관을 맺을 수밖에 없다. 즉, 누군가의 글을 진정으로 좋아하고 그의 의견에 동의한다는 것은 단순히 그의 개별적인 작품만이 아니라 그 작가의 전체적인 내면세계에 동의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의 작품을 그 작품 자체만을 놓고 독립적으로 파악할 것이 아니라 작품을 쓴 작가의 내면세계 전체에서 차지하는 어느 한 부분으로 보고…」(『전작주의자의 꿈』 중에서)
소설을 재밌게 보는 방법을 찾으시는지? 그렇다면, 전작주의자가 되자. 조희봉처럼 삶 자체를 이끌어주는 작가의 전작주의자가 되는 것도 좋지만 그렇게 심각하지 않아도 된다. 신간이 나온다는 소식만 들어도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작가 두세 명만 있어도 좋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당신은 소설을 충분히 즐기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