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록을 보는 미묘한 시선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 『조선 최고의 명저들』 & 『사도세자의 고백』
책 사이를 넘나들다 보면 사건이나 인물, 혹은 작품에 대한 평가가 상반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독서의 암초다.
책 사이를 넘나들다 보면 사건이나 인물, 혹은 작품에 대한 평가가 상반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독서의 암초다. 더욱이 스펀지처럼 책의 내용을 여과 없이 받아들이는 시기에 암초의 습격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한다면 책을 읽으나마나한 상황에 봉착한다. 그렇다면 암초는 어떻게 피해야 하는가? 피할 필요가 없다.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이 될 수 있도록 밟고 뛰어오르면 된다.
신병주의 『조선 최고의 명저들』과 이덕일의 『사도세자의 고백』을 보자. 책의 내용상 서로 만날 일이 없어 보이지만 공교롭게도 두 책은 『한중록』이라는 작품 때문에 상반된 위치에 서 있다. 신병주는 『한중록』을 조선 최고의 작품 중 하나로 언급하는 데 반해, 이덕일은 『한중록』이 자기 입장을 피력하는 데 급급한, 날조된 작품이라고 평한다.
이런 경우 ‘무엇을 믿어야 할까?’라는 의문부터 품게 된다. 작가의 명성? 작품의 질적 수준? 틀렸다. ‘무엇을 믿어야 할까?’라는 의문보다 ‘왜 이렇게 다른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작품이 말하려는 목적이 무엇인지를 두 번, 세 번 상기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논란거리를 왜 언급했는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암초에 쾅! 하고 부딪힐 테니까.
한중록을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
『조선 최고의 명저들』과 『사도세자의 고백』에서 『한중록』은 어떻게 등장하고 있을까? 먼저 신병주의 것을 보자. 신병주가 『조선 최고의 명저들』을 지은 이유는 책 제목에서 쉽게 눈치 챌 수 있다.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작품들을 알리는 동시에 그 작품들의 의미를 다시금 발견해보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명저’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 최고의 명저들』에서 언급된 작품들은 훌륭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들이다. 『한중록』도 마찬가지. 신병주는 『한중록』을 두고 “놀라운 기억력이 돋보이는 궁중문학의 백미”라 칭하며 “세자빈이자 왕의 생모라는 최고 신분의 여성이 집필한 실명 작품”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찾고 있다.
또한 사도세자의 죽음 이후 정치사에 있던 정치세력에 대한 기록들이나 궁중 의식과 생활의 모습이 자세하게 드러나 있어 조선시대 궁중 생활사를 복원하는 데 필수적인 자료라고 칭하고 있다. 게다가 “개인의 불행을 문학작품으로 승화”시켰다고 말하고 있으니 명저인 이유를 찾는 것보다 명저가 아닌 이유를 찾는 것이 빠를 정도로 극찬하고 있다.
그런데 『사도세자의 고백』에서는 이야기가 다르다. 이덕일은 『한중록』이 “자기 가문을 위한 변명을 늘어놓은 자리”라고 평하고 있다. 혜경궁 홍씨가 남편이었던 사도세자가 죽는 과정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거짓으로 기록했는데, 이는 사도세자를 죽이는 데 앞장섰던 아버지를 옹호하기 위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덕일은 사도세자가 영민한 개혁가의 모습을 지녔음에도 『한중록』 때문에 ‘광인’의 이미지로 남았다고 말하고 있다. 결국 자기 가문을 위한 글인지라 반대편에 있었던 남편을 최대한 깎아내리려고 했던 만큼 진실성보다는 뻔뻔함이 앞장선다는 말이다.
왜 이렇게 다른가
그렇다면 이제 왜 이렇게 다른지를 살펴봐야 한다. 『조선 최고의 명저들』은 내용적인 면보다는 책의 성과를 부각하는 데 치중하고 있다는 사실이 보일 것이다. 또한 흔히 알고 있는 사실들, 즉 『한중록』이 자식을 편애했던 시아버지 영조와 정신이상자였던 남편 사도세자 간의 비극의 현장을 그려낸 공정한 작품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내용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가타부타 말이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조선 최고의 명저들』은 그저 『한중록』을 알려줄 뿐이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혜경궁은 영조가 세자를 처분한 것을 부득이한 일이라 강조하는 동시에 항간에 유포되었던 친정아버지 홍봉한의 개입설을 극구 부인하였다. 이미 죽은 남편을 변호하기보다는 친정 가문을 지키는 데 전력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 최고의 명저들』에서)
반면에 『사도세자의 고백』의 주인공이 ‘사도세자’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주인공이 사도세자라면 『한중록』은 어떻게 되는가? 그동안 다른 작품들이 이 시대를 『한중록』을 통해 보려 했지만 사도세자가 주인공이라면 『한중록』은 되레 밝혀야 할 ‘거짓의 관문’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덕일은 다른 자료들까지 고루 살폈다. 그 결과 『한중록』이 좋게 보기에는 어려운, 역사를 왜곡하는 증거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러니 『한중록』을 곱게 볼 수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앞에서 이미 살펴본 대로 세자가 뒤주에 갇히던 날 좌의정으로서 현장에 있었을 뿐 아니라, 그 다음 날 자신을 꾸짖은 윤숙의 처벌까지 요청했던 것이다. 영조는 세자가 뒤주에 갇히던 날 휘령전에 나타난 3정승을 파면했다가 곧바로 취소했다. 그러므로 ‘달포 동안 동교에 나가 계셨다’는 혜경궁의 말은 홍봉한을 변명하기 위한 거짓 기록에 불과하다.” (『사도세자의 고백』에서)
취하고 버려야 할 것은?
그렇다면 누구를 믿을 것인가? 신병주? 이덕일? 처음부터 끝까지 이 질문은 버려야 한다. 신병주와 이덕일 모두 각자 믿는 바에 의한 진실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서로 다른 것은, 각자 책의 목적상 취할 부분을 취했기에 보는 방식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가정을 해보자. 만약 신병주의 것을 믿는다면? 그렇다면 『한중록』의 의도를 제대로 간파하지 못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반대로 이덕일의 것은? 이덕일이 『한중록』을 말하는 부분은 사도세자에 관한 것이다. 『사도세자의 고백』에서는 신병주가 말한 “궁중문학의 백미”인 까닭을 확인할 수는 없다. 자칫하면 부분으로 전체를 판단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모든 것을 취해야 한다. 그래야만 시선이 교차하는 지점을 찾을 수 있고 비판할 수 있으며, 좀더 ‘단단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
책갈피 사이를 넘나드는 횟수가 많아질수록 『한중록』을 보는 미묘한 시선과 같은 문제에 봉착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렇다 하여 골치 아프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반기자. 그것이야말로 독서를 하는 이유 중 하나로 들기에 충분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