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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유통 기한
기억이 통조림에 들었다면 유통 기한이 영영 끝나지 않기를...
만일 기한을 적는다면 만년 후로 하겠어.
<중경삼림>에서 금발의 레인코트 여인(임청하)과 단 하룻밤의 시간을 보낸 경찰 233(금성무)는 ‘생일 축하해’라는 삐삐의 메시지를 듣고 위와 같이 되뇌인다.
마마스 앤 파파스의 ‘California Dreaming', 크랜베리스의 'Dreams’를 번안한 왕정문의 ‘夢中人’ 그리고 스텝 프린팅을 유행하게 했던 왕가위의 <중경삼림>이 자매편 <타락천사>와 함께 재출시 되었다. 가히 ‘DVD 시대의 마지막 버전’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두 편의 DVD는 90년대의 영화광들을 들뜨게 했던 이 ‘추억의 명작들’을 제대로 된 영상과 사운드로 담아내고 있어 이 영화들을 기억하는 사람들을 들뜨게 한다. 왜냐하면 기존의 <중경삼림>과 <타락천사> DVD는 DVD의 외피를 쓰고 있기는 했지만 전혀 DVD스럽지 못한 화질과 영상 즉 칙칙한 색감과 옆으로 늘어진 전혀 왕가위스럽지 못한 영상을 선보였기 때문이다.
비록 블루 레이와 HD-DVD라는 뉴 미디어의 출현이 점쳐지고 있는 시기이기에, 너무나 오랜 기다림이라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각각 94년과 95년에 만들어진 이 영화들의 새로운 DVD 버전의 등장은 여전히 감동적이다. 그건 HD 리마스터링이라는 과정을 거쳐 새롭게 출시된 이 DVD들의 영상이 원본 필름과 DVD 매체의 한계 범위 안에서 최상의 수준을 선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중경삼림>의 첫 나레이션인 ‘난 그녀의 0.01cm 곁에 있었다. 난 그녀와 57시간 후에 사랑에 빠질 것이다’라는 유명한 대사가 흘러나오는 순간. 우리는 10여년 전의 우리 자신을 떠올리게 된다. 더구나 이 DVD에는 90년대의 영화광들을 상징하는 두 아이콘 <키노>와 <정은임의 영화음악실>을 상징하는 영화평론가 정성일의 음성해설이 담겨 있어 더욱 더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중경삼림> : 한 때 이 영화에서 사용된 스텝 프린팅은 한국의 모든 영상 문화에서 애용되었다.
<타락천사> : 단초점의 와이드 익스트림 앵글은 공간을 왜곡시키는 효과를 낸다.
<중경삼림>과 <타락천사>는 시간적으로는 홍콩 반환(1997년) 이전, 공간적으로는 홍콩이라는 도시와 떼어놓고는 설명할 수 없는 영화들이다. 1997년 이전의 홍콩은 심각한 ‘불안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홍콩인들의 의지와는 전혀 별개로 영국 정부와 중국 정부 사이에 이루어진 97년의 홍콩 반환은 '유통 기한'을 맞이하고 있었고 (현재의 자본주의화된 중국과는 완전히 달랐던) 당시의 사회주의 중국에 대한 홍콩인들의 감정은 '두려움' 그 자체였다. 사유재산이 금지된 사회주의에서의 '공동 소유'란 홍콩인들에게 있어 자신들의 모든 것을 빼앗기게 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인식되었다. 실제로 상당히 많은 숫자의 홍콩인들은 홍콩을 떠났고(현재는 상당히 많이 돌아왔지만) 가진 것이 없거나 떠날 수가 없는 사람들만이 남아있게 되었다. 당연하게도 당시의 홍콩 영화들은 ‘홍콩 반환’이라는 역사적 알레고리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홍콩 반환의 그림자는 오우삼의 세기말적인 느와르에서도, 주성치의 자족적인 코미디에서도, 관금붕의 유령 멜로 드라마에서도 모두 발견되는 것이었고 왕가위의 영화도 예외는 아니었다.
<중경삼림>의 1부에서 223은 유통 기한이 같은 날짜인 파인애플 통조림을 모으고 그걸 유통 기한이 다 된 날 먹는다. 당연하게도 그건 반환일이 다가오는 홍콩의 운명을 은유한다. 주인공들이 텅 빈 홍콩의 밤거리를 누비고 다니는 <타락천사> 역시 마찬가지다. <타락천사>에서 홍콩이라는 공간은 실체가 없다. 이 영화는 홍콩에서 찍었고 홍콩의 밤거리가 등장하지만 그 곳이 정말 어디인지는 영화만 봐서는 도통 알 수가 없다. 왕가위의 홍콩에는 <중경삼림>에서 보듯 외국인들이 홍콩인들의 자리를 채우고 있고 <타락천사>에서 보듯 텅 비어있다.
<중경삼림> : 레인코트 여인과 233과의 만남. 하루끼풍의 대사는 한 때 대유행~.
<중경삼림> : 영화의 첫 예고처럼 53시간 후 만난 두 사람은 정작 마주보지 않는다.
<중경삼림>은 사복 경찰 223과 레인 코트 여인의 이야기와 정복 경찰 633(양조위)과 페이(왕비)의 이야기로 나뉘어져 있다. (음성 해설을 맡은 정성일은 엄밀히 말해 이 영화는 2부의 633이 회상하는 스튜어디스와의 사랑 이야기까지 포함해서 3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두 부분의 이야기는 ‘사랑’이라는 주제로 느슨하게 이어져 있으며 그건 물론 ‘소통’이라는 문제와 닿아있다. 영화의 첫 부분에서 스쳐지나간 경찰 223과 마약 딜러 레인 코트 여인은 사실은 비슷한 운명을 지니고 있다. 경찰 223은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여자들에게 전화하지만 아무도 그와의 대화(또는 구원 요청)에 응하지 않는다. 레인코트 여인은 마약을 지닌 인도인들이 사라지자 그들을 찾아나서지만 아무것도 찾지 못한다.
이 영화에서 여인의 인도인 찾기는 사실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보다 여인이 만나는 사람들이 대부분 외국인들이라는 점이 흥미로운 점이다. 임청하와 금성무가 등장하는 <중경삼림>의 1부의 홍콩에는 정작 홍콩 사람들이 없고 인도나 파키스탄인 그리고 백인들같은 외국인들로 가득 차 있다. 아무에게도 연락을 받지 못하는 233처럼 레인코트 여인 역시 소통의 대상이 없다. 외국인들은 그들끼리 이야기를 주고 받고 광동어를 쓰는 그녀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은 없어 보인다. 그건 같은 홍콩인들이 233과 레인코트 여인의 만남에 이르러서도 그리 달라지지 않는다. 그들은 하룻밤을 같이 보내지만 피곤에 절은 여인은 잠만 자고(심지어 그녀는 잘 때 조차 레인 코트와 금발의 가발 그리고 선글라스를 벗지 않는다.) 223은 케이블 영화 두 편과 감자 튀김을 먹는다. <중경삼림>의 관계란 짧은 편집의 반복으로 구성되어 있는 영화처럼 분절된 관계다. 하지만 1부의 마지막은 그 찢어진 관계의 마지막 희망을 담는다. 233은 ‘생일 축하한다’는 메시지를 받고 여인은 자신을 배반한 마약 딜러 보스를 살해하고 (그가 준 것이라고 생각되는) 금발의 가발을 벗어버린다. 하지만 이 장면에서 가발을 벗어버린 임청하의 얼굴은 선글라스로 여전히 가려져 있기 때문에 레인코트 여인의 미래는 여전히 알 수 없다.
<중경삼림> : 1부에는 2부의 주요 등장 인물들이 무심하게 등장한다.
<중경삼림> : 페이의 옷을 잘 보아야 한다. 하트가 그려진 페이의 옷. 그녀의 감정을 그대로 보여준다.
느와르풍의 1부에 비해 <중경삼림>의 2부는 꿈결같은 사랑을 다룬다. 패스트푸드점 ‘미드나잇 익스프레스’에서 사촌 오빠의 일을 돕는 페이와 정복경찰 633의 이야기를 다룬 이 영화는 온통 mamas & papas의 ‘California Dreaming’으로 가득 차 있다. 여기서 ‘캘리포니아’는 홍콩인들의 이상향이다. 영화의 처음에서 서로의 시선을 마주치지 않는 두 인물의 모습처럼 이 이야기는 어긋난 사랑에 관한 이야기인 동시에 ‘시간’을 다루고 있는 영화다. 그리고 그 ‘시간’은 ‘기억’과 깊은 연관성을 맺는다. 2부에서 633을 사랑하게 되는 페이는 633의 방을 몰래 치운다. 그녀의 청소는 일종의 기억의 세탁이다. 페이는 633의 전 연인이었던 스튜어디스의 흔적을 지우고 자신의 물건들을 가져다 놓는다. 정성일 평론가의 말대로 그녀는 지금 사랑을 시작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사랑을 받아오려는 무모한 시도를 한다.
어쩌면 <중경삼림>의 2부는 ‘꿈’일 수 있다. 이 영화에서 페이의 옷은 같은 노래가 흘러나오는 가운데 자주 바뀐다. 언뜻 보면 같은 노래가 나오기 때문에 동일 시간대에 이야기가 진행되는 것 같지만 사실 이 영화의 시간 구조는 조금씩 나뉘어져 있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2부는 기억의 조각 또는 꿈의 조각 모음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정성일 평론가는 음성 해설을 통해 이 이야기가 거의 페이의 관점에서만 진행되다가 페이와 633이 함께 잠든 장면 후 갑자기 633의 관점으로 변화하는 것을 지적하며 이 영화는 페이와 633이 차례로 꿈을 꾸는 장면들일 수 있다고 지적한다. 왕비의 주제가 ‘몽중인’은 그런 의심을 더욱 확실하게 하는 증거.
<중경삼림> : 한 때 이 영화에서 사용된 스텝 프린팅은 한국의 모든 영상 문화에서 애용되었다.
<중경삼림> : 유리가 운다. 이 영화에서 공간은 인물들의 감정을 드러내는 데 사용된다.
당초 <중경삼림>의 제3의 이야기로 기획되었던 <타락천사>는 살인청부업자(여명)와 파트너(이가흔) 그리고 블론드 소녀(막문위)의 이야기 그리고 하지무(금성무)와 아버지 그리고 미스 양(양채니)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런 구성으로 인해 <타락천사>는 2개의 이야기가 차례 차례로 나뉘어진 <중경삼림>을 연상시키며 관객들에게 ‘왕가위가 동어반복(同語反覆)을 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던 영화다.
하지만 <타락천사>는 1997년의 홍콩 반환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거울삼아 ‘홍콩’이라는 시,공간에 대한 왕가위의 감정을 좀 더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특히 이 영화에서 ‘죄수 번호 233에 파인애플을 먹고 말이 없어진(<중경삼림>에 대한 자기 패러디)’ 하지무와 그의 아버지의 관계는 중국에서 홍콩으로 아버지와 단 둘이 이주했던 왕가위의 개인적인 경험이 담겨 있다. 정성일 평론가에 의하면 <중경삼림>은 미학적인 알레고리라면 <타락천사>는 역사적인 알레고리를 다루고 있다고 말한다.
<타락천사> : 살인청부업자의 집. 지하철이 지나는 그의 집은 도시 한가운데의 섬이다.
<타락천사> : 초등학교 동창을 만난 살인청부업자. 하지만 그는 친구를 바라보지 않는다.
<타락천사>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흔히 ‘어안렌즈’라고 불리웠던 단초점 렌즈의 활용이다. 가까이에 있는 인물의 얼굴을 휘게 만들고 공간을 무한하게 확장시키는 이 어안 렌즈를 통해 왕가위는 좁은 홍콩의 공간들을 확장시켜 인물들의 고립감을 극대화한다. 이 영화에서 살인청부업자는 기억과 시간을 잃어버린 사람이다. 영화에서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오직 버스에서 우연히 만난 보험 판매원 초등학교 동창뿐이다. 하지만 살인청부업자는 동창의 얼굴을 바라보지 않는다. 더구나 그의 집은 같이 일하면서 3년 동안 한번도 만나지 않았던 파트너의 손에 의해 정리된다. <중경삼림>과 마찬가지로 <타락천사>에서 파트너의 청소는 기억의 제거다. 그건 밤마다 비워진 남의 가게를 열고 새벽녘에 장사를 하는 하지무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남들이 더 이상 찾지 않는 시간에 가게를 열고 만나는 누구에게든 장사를 하려고 한다. 그건 이 영화의 다른 인물들에게도 느껴진다. 블론드 가발 소녀는 살인청부업자와 헤어지면서 그의 팔을 깨문다. 그건 그가 자신을 잊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하지무가 사랑하게 되는 미스 양 역시 자신의 사랑을 뺏어간 금발령이라는 존재를 찾아나서지만 그가 어디에 사는지 알지 못한다.
<타락천사> : 한국팬들에 대한 팬 서비스라고 알려졌던 한글 간판. 하지만 변화하는 홍콩의 생경함을 표현하기 위함이었다고...
<타락천사> : 함께 밤거리를 다녔던 미스 양은 하지무를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타락천사>는 좀 더 절망적인 의미의 홍콩인들의 95년을 그리고 있는 영화다. 오직 밤에만 촬영된 이 영화에서 형광 조명에 노출된 주인공들의 공간은 부유하는 느낌을 준다. 캐릭터와 캐릭터의 만남은 이루어지만 둘은 서로를 마주보고 있지 않다. 이 영화에서 캐릭터 간의 온기는 오직 하지무와 그의 아버지 사이의 관계에서만 발견된다. 하지만 자신이 찍힌 비디오를 보며 웃음을 흘리던 하지무의 아버지는 그 장면이 나올 때 이미 죽은 상태다. <타락천사>는 사라져가는 홍콩에 보내는 왕가위의 서글픈 연가와 같은 영화다. ★★★★
<중경삼림> : 형광 조명의 느낌이 잘 살아 있다. .
<중경삼림> : 유통기한이 하루 남은 파인애플 깡통을 찾는 223은 편의점 주인과 싸운다.
<타락천사> : 타란티노가 최고의 하드 보일드 영화로 꼽은 영화.
<타락천사> :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남녀는 홍콩의 밤거리를 질주한다.
앞서 말했듯 두 영화의 기존 DVD 버전은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과거의 버전에 비한다면 리마스터링을 거친 새로운 버전의 DVD에 대해 '일취월장'이라는 표현을 써도 조금도 아깝지 않을 정도다. 물론 홍콩에서 만들어진 두 편의 영화는 밤 장면이 많아서 필름 감도가 높아 입자가 거친 장면들이 꽤 많다. 그러니 최신작들의 칼 같은 영상들과 직접적으로 비교하는 것은 무리한 일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 두 편의 영화가 원본 필름이 의도하고 있는 바를 최대한 잘 표현해내고 있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형광 조명의 색감이 잘 살아 있으며 약간의 화질 열화를 제외하면 만족할 만한 결과를 선보인다고 할 수 있을 듯 하다. ★★★★
<중경삼림>의 Set Up 메뉴
<타락천사>의 Set Up 메뉴
영어 돌비 디지털 2.0 채널을 지원하는 음향은 1982년작임을 감안한다면 무리없는 수준의 사운드 퀄리티를 들려준다. 우퍼나 서라운드의 강력함이 돋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균형이 잡혀있다는 느낌을 준다. 반젤리스의 오묘한 사운드트랙과 음향 효과가 적절히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 다만 미세한 사운드의 표현이 약간 부족한 느낌을 주는데. 이는 최종판에서 좀 더 강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
오랜 기다림에 비한다면 이 두 편의 DVD에 수록된 서플먼트의 양은 아쉽게 느껴진다. 두 편 모두 극장용 예고편과 정성일의 음성 해설만이 담겨 있을 뿐이다. 물론 정성일 평론가의 음성 해설은 왕가위와의 인터뷰를 비롯한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영화의 중요 장면들을 다시 한 번 사유하게 하는 깊이 있는 내용이라 알차다. 하지만 그 외의 서플먼트들이 수록되지 않은 것은 아무래도 아쉽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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