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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의 저력, <버블>
애초에 스티븐 소더버그의 <버블>이 화제를 모으게 된 것은 독특한 배급 방식 때문이었다. 160만 달러라는 초저예산 HD 영화인 <버블>은 극장 개봉과 동시에 DVD 발매와 유료 케이블 TV의 방영이 이루어진 거의 최초의 미국산 상업 영화다.
보통 살인
애초에 스티븐 소더버그의 <버블>이 화제를 모으게 된 것은 독특한 배급 방식 때문이었다. 160만 달러라는 초저예산 HD 영화인 <버블>은 극장 개봉과 동시에 DVD 발매와 유료 케이블 TV의 방영이 이루어진 거의 최초의 미국산 상업 영화다. 이는 점점 배급망을 확보하기 어려운 독립 영화의 유통 경로를 개척하려는 소더버그와 제작진의 일종의 '충격 요법'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DVD나 비디오 발매를 목적으로 하는 영화가 아닌 이상, 극장 개봉 후 어느 정도의 '홀드 백(Hold-back)' 기간이 철저히 유지되는 미국 영화 산업의 내부에서 이런 시도는 일종의 '반란'으로 여겨졌던 듯하다. 론 하워드, 팀 버튼 등의 유명 감독들은 "영화는 영화관에서 봐야 하는 것"이라며 소더버그를 맹렬히 비판했으며 (예상과 같이) 겨우 12만 달러를 벌어들인 저조한 극장 흥행 수입에 대해 전미극장주협회장은 "당연한 결과"라며 고소해 했다는 후문이다.
하지만 단순히 극장 흥행만으로 <버블>을 상업적으로 '실패'한 영화로 규정짓기는 어렵다. <버블>은 극장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TV 방영권 판매와 DVD 판매로 500만 달러 이상의 수익을 올리며 독립 영화 유통의 새로운 대안으로서 모델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DVD의 서플먼트에 수록된 인터뷰에서 밝힌 것처럼,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은 앞으로도 이런 방식의 배급망을 이용해 5편의 저예산 영화를 더 만들 예정이라고 하니 과연 '대안'이 될 수 있는가의 여부는 이들 후속편을 통해 판가름날 듯하다. .
<버블>의 이런 새로운 시도는 국내에도 이어져 이 영화는 극장 개봉과 함께 DVD, 케이블 TV, VOD 서비스 그리고 모바일 서비스를 통해 일제히 공개되었다. 하지만 국내에 공개된 <버블>은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미 인터넷 P2P 서비스를 통해 따끈따끈한 신작을 '다운로?'해 받아볼 수 있는 국내의 관객들에게 <버블>의 공개 방식은 그다지 새로운 방식도 아닐뿐더러 미국(미국은 세계 최대의 영화 시장인 동시에 영화 시장보다 더 큰 DVD 시장을 지니고 있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영세한 국내의 DVD 시장과 '관객 쏠림 현상'이 지나친 국내 영화 시장의 환경에서 <버블>이 살아남기란 더욱 버거울 수밖에 없었던 것.
하지만 영화 외적인 조건에 비해 영화 자체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는 <버블>은 그냥 무시하고 넘어가기에는 너무나 아쉬운 수작(秀作)이다. <오션스 트웰브> 등의 화려하기만 하고 알맹이는 쏙 빠져있는 영화와 <트래픽> 등의 진지한 독립 영화를 오가며 균형 감각을 유지하고 있는 희귀한 미국 영화인인 스티븐 소더버그의 양면 중 어두운 면에 해당하는 이 작품은 소더버그의 뛰어난 재능이라고 할 수 있는 장르적인 감각을 거의 포기하고 인물 내면 자체에 집요하게 집중하는 영화다.
(영화의 촬영지인) 오하이오주 파커스버그의 일반 주민으로 구성된 이 영화의 주연진은 전통적인 의미에서 딱히 연기라고 할 만한 것을 보여주지 않는다. 하지만 로베르 브레송의 '모델'(브레송은 그의 영화 속 배우들을 그렇게 불렀다)들이 연기를 못한다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일마즈 귀니의 <욜>에서 주인공의 무표정한 얼굴에 짙은 슬픔과 고통이 배어있는 것처럼, '스톤 페이스' 빌 머레이의 연기를 '명연'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처럼 <버블>의 일반인 배우들의 얼굴은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다. 그들의 생경하고 메마르고 무표정한 얼굴 속에는 억압된 욕망이 꿈틀대고 끝없는 고통의 흔적이 넘실거린다. 그건 '미국'이라는 '거품(bubble)' 안에 갇혀 버린 보통 미국인들의 서글픈 초상이다.
<버블>의 오프닝은 무덤 자리를 파내는 굴착기의 움직임으로 시작하여 황량하기 이를 데 없는 무덤의 모습으로 마무리된다. 이 황량한 무덤으로 상징되는 유폐-소외-고독의 정서가 이 영화를 장악한다. 영화의 시작과 끝에 배치되어 수미상관을 이루는 파헤쳐진 흙의 이미지는 '무덤'으로 기어들어가듯 연명해가는 등장인물들의 삶을 가리킨다.
감독, 촬영, 편집을 모두 담당한 소더버그는 영화 스타일상에서도 분명히 TV나 영화 같은 미디어에 의해서 조작되었을 '미국'이라는 '화려한 이미지'의 이면을 묘사한다. 필름에 비해 차가운 느낌을 주는 HD 영상, 빈번히 사용되는 광각(廣角) 렌즈로 확장된 공간을 통해 더욱 극대화된 고립감, 미장센의 한쪽으로 떠밀린 인물들, 생동감 없는 삶을 반영하는 고정된 카메라, 툭툭 끊겨 있는 편집 리듬 그리고 차가운 영상과 달리 따뜻하게 연주되지만 반복적으로 울리는 어쿠스틱 사운드 트랙 등 <버블>의 시청각적 요소들은 온통 고립된 개인의 심상을 표현하는데 사용된다. 그러니까 <버블>은 인물의 대사보다는 영화적 스타일로 인물의 정서를 담아낸다.
실제 공간에 기반을 둔 <버블>의 공간 역시 영화의 일관된 정서를 반영하기는 마찬가지다. 이 영화의 배경부터가 일반적인 '할리우드 영화'의 공간 구성을 배반한다.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오하이오 주의 파커스버그는 2000여 명의 주민으로 이루어진 작은 마을로 화려한 대도시 뉴욕이나 LA와는 완전히 다른 '미국'이다. 한마디로 이 동네는 그림이 되지 않는다. 우중충하고 칙칙한 도시의 외관은 사람의 온기가 별로 느껴지지 않고, 기본적인 설비만 갖추어진 일터와 부속실(휴게실, 식당), 직사각형의 구조로 이루어진 주인공들의 집도 적막하기는 마찬가지다. 영화의 한 장면에서 로즈(미스티 돈 윌킨스)가 청소해 주러 간 안온한 중산층 주택을 구경하며 감탄하는 마샤(데비 도버레이너)의 모습에서 보듯 좁아터진 주인공들의 집은 편안한 휴식처라기보다는 '임시 거처'처럼 느껴진다.
<버블>에서 노동 계급인 주인공들의 욕망은 철저히 무표정한 인물들의 내면에 '유폐'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거의 유일하게 주인공 마샤의 욕망이 구체적으로 묘사되는 중산층 주택 장면은 주목할 만하다. 영화의 주인공인 마샤는 중년의 노동계급 여성이다. 그 장면을 통해 마샤가 중산층의 삶을 욕망하고 그 집에서 몰래 목욕을 하는 로즈의 젊은 육체를 욕망하고 있다는 점이 드러난다. 하지만 교회 안과 감옥 안에서 그녀의 얼굴에만 비춰지는 핀 조명에서 보듯 그녀는 자신의 욕망을 자신의 육체와 언어 안에 가두어 놓을 뿐이다. 그녀는 자신의 입 밖으로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지 않는다. 영화의 초반부에서 밝혀지는 것처럼 마샤는 '친구'로 가장하고 있지만 아들뻘의 청년 카일(더스틴 제임스 애슐리)을 욕망하며 (마땅한 동성이 존재하지 않음으로 인해서) 독점하고 있다. 그러나 핀 조명 장면에서 드러나듯 그녀의 노쇠한 육체에 대한 자각은 그런 욕망을 '플라토닉'한 단계로 제어한다. 그녀는 자신의 욕망을 저 가슴 깊은 곳에 숨겨두고 살아가는 '그림자'로서의 삶에 만족한다.
그런 욕망의 억압은 카일에게서도 드러난다. 그는 사람 많은 곳에 적응하지 못하는 '병' 때문에 학교를 중퇴한 '부적응자'다. 그는 희귀한 병으로 인해 생래적으로 고립되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그의 삶은 발전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이 작은 마을에 그를 묶어둔다. 카일에게는 폐쇄적인 삶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욕망이 없다.
그런 점에서, 건조하지만 '플라토닉한 사랑' 단계의 두 사람 사이에 로즈의 등장은 위기이자 기회다. 로즈는 세 인물 중 유일하게 구체적으로 '탈출'을 욕망하는 인물이다. 마샤의 '또 다른 자아'라고 할 수 있는 그녀는 영화에서 유일하게 능동적인 인물이다. 그녀는 카일과 함께 담배를 피우고 데이트를 제안한다. 그녀는 세 인물 중에서 유일하게 '미래'를 상징하는 가족(마샤에게는 거동이 불편한 아버지가, 카일에게는 마샤 또래의 어머니가 있지만 로즈에게는 어린 딸이 있다)이 있으며 "이 마을에는 미래가 없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의지를 드러낸다. 로즈는 마샤의 욕망이 체화되어 표현된 형태의 인물이다. 로즈는 타인의 돈을 훔치는 방법을 통해서라도 절망적인 마을 또는 삶으로부터 탈출하려 한다. 하지만 마샤-로즈의 '탈출 욕망'은 영화의 마지막에 제시된 '살인'에 의해 좌절되고 만다.
<버블>에서의 '살인'은 깨져 버린 꿈을 흔적으로만 간직한 노동 계급의 자기 살해와 같은 의미가 있다. 그렇기에 범인은 자신의 '살인' 자체를 인지하지 못하고 자신을 체포하는 경찰에게 순순히 협조한다. 소더버그는 스릴러 장르의 규칙과 달리 너무나 명확히 범인의 정체를 드러낸다. 하지만 관객은 그것에 오히려 혼란을 느낀다. 범인은 자신의 '범죄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탈출'하고자 하는 욕망이 투영된 존재를 부정해야만 자신의 현재 삶이 존재할 수 있다는 의식이 우발적인 '살인'을 일으킨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 애초부터 <버블>은 '범인이 누구냐' 따위의 장르적 해결책에는 관심이 없다.
정작 <버블>이 보여주고자 한 것은, 반복적인 일상을 함축해 보여주는 초반부에 드러나는 것처럼 정신적으로도 물질적으로도 파산한 미국인의 보통의 삶이다. 그들은 용케도 고통스럽고 반복된 일상을 견뎌내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견디는 것'일 뿐이다. 소통의 가능성을 희미하게 남겨두었던 데뷔작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 테이프>에 비해 <버블>은 더욱 비관적인 영화다. '가치 없는' 노동과 '소통 불가능'의 위기에 처한 미국의 보통 사람들에게는 도통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자신의 '범죄'를 감옥에 가서야 인식하는 주인공의 뒤늦은 깨달음처럼 그건 너무 늦은 일일 수도 있다. <버블>은 간접적으로 '팍스 아메리카나'의 이상을 내세우며 '제국'으로 나아가는 미국의 보통 사람들의 삶을 다룬다. 그건 침묵 아래 버둥거리면서도 갉아먹히는 삶이며, 온통 침식되고 가라앉는 삶이며, 온통 욕망이라는 거품(Bubble) 아래 숨겨진 삶이다.
<버블>에 '아메리칸 드림' 따위의 희망적인 미래는 없다. 이 영화에서 노동은 건조하고 지루한 작업으로 묘사된다. 컨베이어 벨트 시스템의 도입으로 구축된 포디즘(Fordism)의 등장 이래 자본주의의 노동은 철저히 파편화된다. 파편화된 노동의 실체는 괴기스럽기까지 한, 부분 부분만 보이는 인형의 부품과 이리저리 일그러진 인형 거푸집의 이미지로 형상화된다. 그건 분명 미국 사회의 주류에서 비켜나간 소도시 노동자들의 조각난 삶을 상징한다. 일찍이 '노동가치설'을 주장했던 리카르도와 마르크스의 주장은 현대 미국 소도시의 노동자 앞에서 무력화된다. 특히 엔딩 크레디트를 장식하는 인형 거푸집과 인형 부품의 이미지는 스산하기 그지없는 이 영화에서도 가장 강력한 이미지다. ★★★☆
메뉴 화면
HD 카메라로 촬영되어 2.35:1의 화면비를 구현하는 영상은 황량한 영화의 정서를 잘 표현하는 편이다. 당연히 잡티를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영상이지만 충분하지 못한 조명으로 인해 어두운 실내 표현에서는 저예산 영화의 한계가 뚜렷해 인물 표현과 암부에서의 표현력이 떨어지는 편이다. 또 약간의 고스트 현상이 발견된다. 하지만 애초에 화사한 영상을 구현하려 한 영화가 아니므로 너무 책망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하지만 익스트림 클로즈업 장면에서의 묘사는 또렷하며 화질차가 존재하지만 크게 흠을 잡기는 어려울 정도의 선명함을 유지하는 영상이다.
★★★
돌비 디지털 3채널과 돌비 서라운드 2채널을 지원하는 음향은 영화의 배경으로 사용되는 어쿠스틱 기타 사운드를 제외하면 그다지 두드러진 부분도, 그다지 부족한 부분도 없는 음향을 들려준다. 사실적인 효과음이 적절히 표현되며 나직한 대사음이 잘 전달되는 수준.
★★★
메이킹 (11:09)
메이킹 필름이라기보다는 영화 제작 후의 세 주인공의 삶을 보여주는 메뉴라고 할 수 있다. 25년간 KFC의 매니저로 일했던 마샤 역의 데비 도버레이너는 주변의 따뜻하고 평범한 아주머니로 은퇴 후의 평온한 삶을 살아가고 있고 로즈 역의 미스티 돈 윌킨스는 헤어 디자이너로 일하며 네 아이의 어머니로 부지런히 살아가고 있다. 카일 역의 더스틴 제임스 애슐리는 피자 공장의 창고에서 일하며 애인과 동거 생활을 지속하고 있다. 이 메뉴를 통해 이 작품의 주연으로 출연한 세 사람의 자연인으로서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그들이 맡은 캐릭터와 상당히 유사한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 전체적인 구성은 영화의 각본을 맡은 콜먼 휴가 세 사람을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는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오디션 인터뷰 (23:14)
주연 배우 세 사람의 오디션 인터뷰를 볼 수 있다. 이 인터뷰 클립들을 통해서 확실히 자연인으로서의 세 사람과 그들이 연기하는 캐릭터와의 연관성 그리고 영화를 통해 밝혀지는 여러 가지 사실이 일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영화에서 가장 절망적인 캐릭터인 마샤를 연기한 데비 도버레이너는 실제로는 상당한 자신감을 지닌 능동적인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 인터뷰 (09: 39)
<버블> 프로젝트의 기획과 진행 방향에 대한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의 인터뷰 클립으로 앞으로 공개될 <버블>의 후속편들에 대한 비전 역시 들어볼 수 있다.
삭제 장면 (06:03)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삭제된 장면을 볼 수 있는 메뉴다. 영화에서 범인이 살인을 저지르게 되는 의학적인 설명 장면이 담겨 있다. 하지만 이 삭제 클립의 친절한 설명은 영화가 지닌 의미를 지나치게 제한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너무 의지하는 것은 좋지 않을 듯하다.
그 외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 장면으로 만들어진 파격적인 예고편과 작업 과정을 가늠하게 해 주는 포토 갤러리가 메뉴로 담겨있다. <버블>의 전체적인 구성은 과하지도 그렇게 부족하지도 않은 메뉴 구성이다. 프로 배우가 아님에도 좋은 연기를 보여준 주연 배우들의 삶을 다룬 영상 클립이 흥미롭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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