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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 쇠약 직전의 남자, <뜨거운 오후 SE>
영화의 명성에 비해 지나치게 단촐한 사양으로 출시되었던 <뜨거운 오후>는 언젠가 새로운 버전의 출시가 예상되었고 드디어 올해 두 장 짜리 SE 버전이 출시되기로 한 것.
신경 쇠약 직전의 남자
'골든 레이블' 콜렉션의 등장은 국내의 DVD 시장을 단적으로 설명해 주는 예다. 샘 페킨파의 <와일드 번치>로 시작된 이 콜렉션은, 할인 매장에서는 판매가 부진할 수밖에 없는 배급사의 클래식 타이틀들 중 특히 명성이 높은 작품들을 엄선하여 새로운 리마스터링과 서플먼트를 추가하고 고급화된 패키지에 담아 한정 수량만 판매하는 전형적인 프리미엄 마케팅 전략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 세계적인 배급사가 유독 한국에서만 이런 전략을 취하는 것은 매니아 성향의 시장으로 고착화된 한국의 DVD 시장의 작은 규모와 타이틀 판매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흔히 '뉴욕 사회파'의 대표적 명장으로 분류되는 시드니 루멧의 <뜨거운 오후>(원제는 Dog Day Afternoon)가 바로 이런 골든 레이블 콜렉션의 리스트에 포함된 타이틀이다. 이미 2001년에 출시된 바 있는 <뜨거운 오후>의 기존판 DVD는 초라한 퀄리티의 영상과 음향, 그리고 볼 만한 서플먼트도 없었다. 영화의 명성에 비해 지나치게 단촐한 사양으로 출시되었던 <뜨거운 오후>는 언젠가 새로운 버전의 출시가 예상되었고 드디어 올해 두 장 짜리 SE 버전이 출시되기로 한 것.
■ 낙오자들
<뜨거운 오후>는 은행 강도를 소재로 다루고 있는 영화다. 하지만 이 영화의 은행 강도들은 첨단 무기를 휴대하고 신기의 액션을 선보이는 첩보원급 프로페셔널들이 아니다. <뜨거운 오후>의 은행 강도들은 왜소한 체구에 이탈리아계 이민 노동자 계급의 아들들이며 강탈 계획도 완벽하지 않은데다가 그나마 짜온 계획을 잘 실행하지도 못한다. 강도가 시작되자 한 멤버는 겁부터 집어먹고 도망을 치고 남아있는 서니(알 파치노)와 살(존 카잘) 역시 허둥대기는 마찬가지. 더구나 결산이 끝난 은행의 금고에는 돈도 얼마 남아있지 않고 그나마 도망치기 전에 경찰이 출동해 어쩔 수 없이 인질극을 벌이게 된다. 또 인질들의 면모는 어떠한가 ? 대부분 여성인 금전출납원들과 당뇨에 걸린 노년의 지점장 그리고 협심증이 있는 노년의 흑인 경비원이 있을 뿐이다.
그러니 <뜨거운 오후>는 애초부터 화끈하고 잔혹한 액션 스릴러가 되기는 글렀다. 더구나 이 영화는 (유머는 있지만) 코미디도 아니다. 놀랍게도 <뜨거운 오후>는 실화로 1972년 8월 22일 뉴욕 브루클린에 있었던 실제 사건을 영화로 옮긴 작품이다. 이 사건은 뉴욕주 최초의 대규모 인질 사건으로, 알 파치노와 닮았다는 존 워토위치는 20년형을 언도받아 최근 출소하였고 자신과 결혼한 동성연인(male-wife)의 성전환 수술을 위해 은행 강도를 시도했다고 한다.
시드니 루멧은 <뜨거운 오후>에 무엇보다 자연주의적인 사실성을 위해 애를 썼다. 제작진은 브루클린의 한 창고를 구입, 개조 은행 세트를 세워 실제 사건 현장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사건과 유사한 효과를 얻어내기 위해 노력했으며 300여명의 엑스트라들을 구경꾼 속에 투입해 사건 속의 군중과 유사한 반응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 또 은행 안의 형광등과 비상등을 활용한 최소한의 조명으로 사실성에 유의했다. 그로 인해 <뜨거운 오후>는 당대의 시대적 공기를 영화에 담아내는데 성공했다. 군중 앞에서 '아티카 ! 아티카 !'를 외치는 서니의 모습(1971년, 간수의 100%가 백인이고 죄수의 절반 이상이 흑인이던 뉴욕주 아티카교도소에서 흑인 죄수들이 간수를 인질로 삼고 차별에 저항하자 주방위군이 투입되어 죄수 29명을 포함 총 39명이 사망한 사건을 말함. 죄수들이 교도소를 점령했던 4일간은 평화로운 공동체가 유지되었다고 함)이나 서니와 살이 모두 베트남 참전 용사 출신(베트남 참전 용사 대부분은 가난한 계층 출신들이었음)이라는 설정들은 지극히 당대의 역사적 이슈와 관련이 깊다.
■ 마이너리티 리포트
이 영화의 주인공인 서니는 온통 모순 투성이의 인물이다. 영화 초반부에서 베트남전 참전 용사이자 은행의 금전출납원으로 일했던 것이 드러나는 이 남자는 영화의 중반부가 넘어 내면의 실체가 드러나자 더욱 우스꽝스러운 인물임이 밝혀진다. 그는 아이들과 넉넉한 풍체의 아내가 있는 한 집안의 가장이자 유난히 자식 사랑이 깊다는 이탈리아계 부모가 있으며 카톨릭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안에 여성이 갖혀 있다는 남자의 남편이기도 하다. 루멧은 서니의 남성 아내(male-wife)의 등장을 (당시의 관객들이 용납할 수 있도록) 사려 깊게 연출하는데 손가락에 매니큐어를 바르기는 했지만 리온(크리스 서랜든이 연기해 아카데미에 노미네이션되었다)은 산발을 하고 입원복을 입었기는 했지만 혐오스런 이미지는 아니다. 결국 서니는 온통 마이너리티적인 요소로 가득한 남자다. 그는 가난한 노동 계급 출신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했으나 마땅한 일자리도 얻지 못한 데다가 양성애자다. 그럼에도 영화의 전개 과정에서 보듯 모두에게 잘하고 싶은 남자다.
루멧은 플래시백 등으로 서니의 이런 고통을 그리지 않는다. 대신 서니와 그의 여인들(어머니, 아내, 그리고 남성 아내)과의 대화 장면을 삽입한다. 그는 소통 불능의 상태에서 고립된 남자다.(이 영화에서의 여성성은 분명히 긍정적이지는 않다.) 서니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은 아예 대화를 거부하는 아버지나 은행으로 찾아와 자기 이야기만 늘어놓는 어머니(주디스 마리나)나 전화 통화만 하는 아내 앤지(수잔 페레즈) 모두 마찬가지다. 서니는 모든 상황을 통제하려하지만 결코 그렇게 되지 않는다. 그를 둘러싼 모두를 만족시키려는 서니의 욕망은 결코 충족되지 않는데, 그나마 (약간이나마) 그런 통제가 가능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은행 속에서다. 그는 가족이라는 관계의 틀 속에서 무능한 남자지만, 그렇다고 그를 비정상적인 남자라고 볼 수는 없는 것은 은행 안에서 그는 나름대로 영민하며 치밀할 뿐 아니라 친절하다. 결국 그의 영혼을 잠식하고 그를 피로하게 하는 것은 그를 보듬어 주어야 하는 사람들과 사회다. 루멧은 냉정하게 서니의 그런 고통을 영화에 담아낸다. 전화기를 붙잡고 아내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소리 지르는 장면에는 서니의 그런 피로감이 담겨있으며 공항으로 떠나기 전 유언장을 쓰는 장면의 모습은 체념의 감정이 가득하다. 서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것을 얻으려고 노력하지만 결코 어떤 것도 얻을 수 없는 마이너리티 인생을 대변한다.
■ 소통 불능의 사회
<뜨거운 오후>는 희비극(喜悲劇)이다. 어설픈 남자들의 강도 행각은 웃기기도 하지만 결국 파멸로 마무리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뜨거운 오후>에는 묘한 긴장감이 있다. 인질극 중임에도 은행 안은 온화하고 평화롭다. 은행 안 공동체의 구성원은 동성애자인 인질범들과 여성들과 노인들로 구성된 인질들이다. 잠시나마 '스톡홀름 신드롬'적인 연대감을 형성한 이들은 이 사회의 마이너리티들이다. 정작 이들을 위협하는 것은 은행을 둘러싼 (남성적인) 공권력이며 언론이다. 당시의 대중들은 '아티카'로 대변되는 가공할 공권력의 폭력성에 반감을 품고 있었다. 공권력은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될 행동들을 해서 시민들을 위험에 빠지게 한다. 강도들이 은행을 벗어난 후에 체포했다면 시민들은 좀 더 안전했을 것이고 요구 조건을 수용하는 척하며 시민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해도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공권력은 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언론 역시 예외가 아니다. 진실 보도 따위는 그들의 관심이 아니다. 서니의 문제를 들어보기 전에 언론은 그의 하류층 언어를 문제 삼아 방송 연결을 차단한다. 결국 공권력과 언론은 마이너리티의 삶에 관심이 없다는 것이 폭로된다.
DVD의 코멘터리에서 감독 시드니 루멧은 가장 슬프면서 웃긴 장면으로 서니가 살에게 가고 싶은 나라가 어디냐고 묻는 장면을 꼽는다. 극단적 상황으로 몰린 서니는 따뜻한 나라인 '알제리'(사막이 있는 ?)로 가겠다고 하는 것도 썩 납득이 안가기는 하지만 심지어 살은 가고 싶은 나라를 '와이오밍'(참고로 '와이오밍'은 미국의 한 주다)이라고 한다. 이렇듯 강도인 서니와 살은 '악인'이라기 보다는 '무지'하다. <뜨거운 오후>를 통해 루멧은 과연 누가 '악인'이 되는가 묻고 있는 듯 하다. <뜨거운 오후>는 냉철하게 사건을 돌아보며 당시의 미국 사회가 갖고 있는 문제를 짚어나가는 영화지만, 아쉽게도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문제 의식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렇기에 <뜨거운 오후>는 여전히 흥미롭다.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가 수반하는 '소통 불능'의 현실이 미국과 한국, 70년대와 2000년대라는 시공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하기 때문이며 이른바 '양극화'를 극단으로 치닫게 하는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현실의 모순은 더욱 더 많은 소외자를 양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
디스크 1 메뉴 화면
서니와 살의 범행이 밝혀지며 시끌벅적한 경찰 출동 장면이 이루어지는 장면들을 중심으로 메뉴 화면이 구성되어 있다.
새로운 리마스터링으로 기존판에 비해 한결 나아진 영상을 선보이기는 하지만 <뜨거운 오후 SE>의 영상 퀄리티가 최신작들에 비교할 만한 수준은 아니다. 그것은 이 작품의 특성 때문이기도 한데, 루멧은 화사한 영상을 표현할 수 있는 풍부한 조명을 사용하기보다는 사실성을 높이기 위해 실내 장면은 형광등을, 실외 장면은 약간의 조명기를 활용하여 촬영하였던 것. 그래서 그런지 필름 질감이 거친 편이며 세밀한 표현력은 조금 떨어지는 편이다. 특히 후반부 밤 장면에서 검은색이 많이 묻히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는 감독이 의도에 충실한 표현이므로 특별히 흠을 잡을 만한 부분은 아니다. ★★★
고전 영화를 리마스터링하면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크게 두가지다. 대부분의 고전 영화들은 모노 트랙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므로, 이를 인위적으로 분리하여 돌비 디지털 5.1 채널로 만들던가 오리지널 트랙을 그대로 수록하던가이다. <뜨거운 오후>는 후자를 선택하여 모노 트랙을 수용하고 있는데, 음성 해설에서 시드니 루멧 감독이 스테레오로 녹음하여 좌우 사운드를 분리했다는 사실을 밝혔다는 점을 감안하면 모노 트랙보다는 스테레오 트랙도 같이 수록했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있다. 전체적인 사운드 표현은 고전 영화로서는 무난한 수준이다. ★★★
디스크 1 스페셜 피쳐 메뉴
음성 해설
고령(1924년생)의 시드니 루멧 감독 단독으로 진행되는 음성 해설은 느리고 차분하게 진행된다. 루멧은 이 작품에서 이례적으로 즉흥 연기를 잘 활용하였는데, 이미 30여년 전의 일임에도 불구하고 정확히 장면들을 지적하며 당시의 상황을 설명한다. 제작 연도가 오래된 작품이니 만큼 각각의 장면에 대한 해설보다는 연출 의도나 전체적인 상황과 배우들에 대한 회고에 치중하는 편이다. 특히 알 파치노를 감독에 비견될 만한 배우라고 설명하며 당시 아카데미상이 그에게 돌아가야 했음을 강조한다.(당시의 수상자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의 잭 니콜슨이었음.) 재미있는 점은 정작 감독인 시드니 루멧은 이 작품을 극장에서 한 번도 보지 않았다고... 그 외 디스크 1의 스페셜 피쳐는 극장용 예고편이었다.
스페셜 피쳐 메뉴
Making of (57:46)
4개의 챕터로 나뉘어진 새로운 메이킹 필름이다. The Story(11:53)는 제작자 마틴 브레그만의 동료가 <라이프> 지의 기사를 보고 각본 작업을 진행하고 시드니 루멧이 연출을 맡기까지의 과정을 담고 있다. 애초에 알 파치노는 루멧과의 작업이 고단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이미 지친 상태로 연극으로 돌아가려고 했다고 한다. 또 처음 워너사가 제안한 제목은 'boys in bank'였다는 이야기도 들어볼 수 있다. Casting the Controversy(13:28)은 알 파치노의 소개를 통해 많은 배우들을 캐스팅하게 된 영화의 출연진에 대한 이야기다. 특히 살 역의 경우, 루멧은 애초에 15살의 보티첼리 천사로 설정하였으나 다소 실망스런 외모와 나이가 많았던 존 카잘이 캐스팅되어 실망했으나 대사를 들어보고 바로 캐스팅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 3주간의 리허설 과정을 설명하는 인터뷰들을 통해 시드니 루멧이 왜 배우들의 감독인지를 알게 한다. Recreating the Facts(21:09)는 실제 현장과 유사한 촬영 분위기를 만들려고 했던 제작진의 노력이 담겨 있다. After the Filming(11:16)은 영화 후반 작업 특히 편집 작업에 대한 회고를 담고 있다. 최초 편집본은 너무 빠른 느낌이라 루멧이 중요하게 여긴 유언장 장면과 균형이 맞지 않아 6,7분 정도의 장면을 늘렸다고 한다.
Lumet : Film Maker (10:00)
제작 당시 만들어진 기록 필름으로, 쉴 새 없이 현장을 뛰어다니는 젊은 시드니 루멧 감독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영화에 대한 소개를 겸하고 있는 당시의 홍보 클립.
서플먼트는 음성 해설과 메인 메이킹 필름 그리고 당시의 자료 필름 마지막으로 극장용 예고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꽉 짜였다고 할 수는 없지만, 메이킹 필름에는 알 파치노를 포함한 생존하고 있는 당시의 스탭과 배우들이 대거 등장하여 그 가치는 꽤 높은 편이다. ★★★
<뜨거운 오후>는 70년대에 만들어진 사회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비록 30년이 지났을망정 이 영화는 여전히 흥미진진하다. 사실 헐리우드 영화가 전세계적으로 그 힘을 잃어가는 것은 현재의 헐리우드가 상업성에 치우치면서 6,70년대에 만들어진 완성도 높은 영화들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도 한가지 이유가 될 것이다.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뜨거운 오후>는 딱 블랙 코미디로의 소재에나 적합할 듯 하지만 이 영화가 표현하는 마이너리티 사회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우리 사회가 극복하지 못한 부분이기도 하다. 정말 좋은 사회란 이 작품의 메시지가 동감을 얻어내기 어려운 사회가 아닐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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