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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밭길의 역정(歷程), 항심(恒心), 그리고 대화

리영희, 사상의 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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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수의 표현대로 “리영희는 대기만성형이다.” 리영희는 45세에 첫 책을 펴낸다.

‘메트르 드 팡세’

“1980년 5월, 광주 시민들을 전두환정권이 대량 학살했던 이른바 ‘광주사태’로 내가 투옥됐을 때, 『르 몽드』 동경 특파원 퐁스 기자가 한국 사태 긴급취재를 와서 『르 몽드』의 파리발 첫 보도에 나를 ‘메트르 드 팡세(사상의 큰 은사)’라고 썼어요. 한국 지식인과 대학생의 사상의 은사인 리영희가 잡혀갔다고요.”

-『대화』 중에서

리영희(李泳禧, 1929- )의 생애는 시련의 연속이었다. 그는 다니던 언론사에서 두 번 쫓겨나고, 재직 중인 대학에서도 두 번 해직되었다. 모두 당국의 강압에 따른 강제적인 조치였다. 뿐만 아니라 옥고를 다섯 번이나 치르며 3년여를 감옥에 갇혀 있었다. 눈 한번 질끈 감으면 등 따시고 배부르게 잘 지냈을 텐데 그는 왜 그런 고통을 감내할 수밖에 없었을까?

“난 박정희 정권 말기와 특히 1980년의 전두환 집단의 광주 대학살이 있었던 그 시기에는 수사학적으로 하는 얘기가 아니라, 생리적으로 숨을 쉴 수가 없고 질식할 것만 같았어. 그리고 심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는 오늘보다 더 암담해질 내일을 견디어야 할 절망적 상태를 생각하면서, 스스로 삶을 마감해야 하는가 하는 그런 중압감에 시달렸어요.”

고등학생이던 1980년대 중반 텔레비전 뉴스에서 그를 보았다. 그는 ‘뻘쭘하게’ 앞으론 말을 가려서 해야겠다는 취지로 이야기하였다. 그것은 1984년 ‘기독교사회문제연구소’가 주관한 ‘각급학교 교과서 반통일적 내용 시정연구회’ 지도사건으로 반공법 위반 혐의를 받아 구속?기소되었다가 2달 만에 풀려나면서 한 말이었다. 텔레비전 뉴스의 짧은 인터뷰를 통해 나는 리영희와 간접적인 첫 대면을 하였다. 이어 그의 책읽기가 시작되었다.

『전환시대의 논리』에서 『스핑크스의 코』까지

리영희는 다작의 저자다. 연구서 『리영희 : 살아있는 신화』(나남출판, 2003)에서 김만수가 정리한 “리영희의 이름으로 출간된 책”의 목록은 모두 19권이다. 여기에는 편역서와 공?편저서가 일부 포함됐으나, 2005년 출간된 『대화』(한길사)는 빠져 있다. 19권 가운데 단독저서는 9권이고, 개인선집에 해당하는 책이 3권이다. 나는 전작(前作)에 실렸던 베트남 관련 논문을 모은 『베트남 전쟁』(두레, 1985)을 개인선집으로 분류한다.

김만수의 표현대로 “리영희는 대기만성형이다.” 리영희는 45세에 첫 책을 펴낸다. 40대 중반은, 지금도 그러하지만, 한 세대 전 대개의 저자나 연구자에겐 집필과 연구 의욕이 정점에 이르렀거나 한풀 꺾일 무렵이다. 하지만 그때부터 리영희는 수천 쪽에 달하는 책을 쓴다. 김만수가 셈한 “19권의 전체 쪽수는 7015쪽이다.”

나는 비교적 출간 순서대로 리영희 선생의 저서를 읽었다. 20년 전 무심코 집안에 굴러다닌, 형들이 보던 『전환시대의 논리』(창작과비평사, 1974)를 읽고 충격을 받았다. 책의 내용은 출간 당시만 해도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은, 어느 책에서도 볼 수 없는 것이었다. 맨 앞에 놓인 「강요된 권위와 언론자유― 베트남 전쟁을 중심으로」부터 그랬다.

이 글은 『뉴욕 타임즈』의 베트남 정책과 관련한 미국 정부의 비밀문서 폭로보도를 다룬다. 리영희는 『뉴욕 타임즈』의 용기를 교훈 삼아 당시 우리 언론의 암담한 현실을 일깨우려 했다. “운명을 같이 할 수밖에 없는 한 사회의 대중이 오도된 사고방식이나 정세판단을 하고 있을 때 그것을 깨우쳐야 하는 것은 언론과 지식인의 최고의 책임이자 의무이다.”

또한 민주정치에서 진실과 비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진실이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회체제나 정부는 반드시 비판에 견딜 수 없는 체제와 정부이다. 그러기에 비판을 봉쇄한다. 비판이 허용되지 않는 사회는 개선과 향상이 없고 그 결과는 더한층의 타락이며, 타락한 제도를 유지하려는 지배세력은 탄압에 호소하는 악순환 속에 침체할 수밖에 없다.”

반지성적인 매카시즘에 대한 통렬한 비판은 어섯눈 뜰 무렵의 나에게 진한 감동을 주었다. “민주주의 자체가 ‘적극적 개념’이며 창조적 상상력이다. 반공주의란 부정(否定)개념이며 그것 자체로서 소모적이며 파괴적 이데올로기라는 것이다.” 1971년 발표한 이 글에서 리영희는 미국 사회의 “학문과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반공이라는 틀 속에 집어넣으려는 공포정치의 책임”을 당시 대통령 닉슨에게도 지운다.

리영희 선생이 인용한, 미국에서 ‘빨갱이 사냥’이 절정에 달했을 때, 라넷트 핸드라는 판사의 경고는 갓 스무 살이 된 내게 특히 인상적이었다. “시민이 그 이웃을 적이나 간첩이라는 생각으로 살피도록 명령될 때 그 사회는 벌써 분해의 과정을 걷고 있다.” 우리 사회도 그렇게 여러 갈래로 갈기갈기 찢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여성동아』(1973년 7월호)에 실렸던 「외화와 일본인」은 1970년대 일본인을 상대로 하는 매춘관광을 언급한다. 얼마 전 정부가 “외국인과 잠자리를 같이 하는 여성들에게 통행금지 시간을 면제했다는 기사를 읽은 기억”이 이야기의 실마리다. 평범한 여성지에 이런 글이 게재되었다는 사실이 놀랍지만, 예의 독자의 둔한 현실감을 일깨운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정부나 국가가 그 여성국민에게 통행금지면책특권을 주면서까지 외국인 사나이들을 끌어들이는 정책은, 딸을 바치고 그 대가로 부자가 되는 아비와 얼마나 도덕적 차이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그 돈으로 국민이 얼마나 부해지며, 국가가 얼마나 경제발전을 이룩할 수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사회와 국민의 도덕적 타락, 비인간화를 돈벌이의 수단으로 삼지 않고서는 경제발전을 못한다는 말일까. 그렇게 해서까지 외국인을 끌어들이고 외화를 벌어야 하는 것일까.”

『전환시대의 논리』에 실린 베트남 전쟁을 다룬 논문 2편은 왜곡된 그 전쟁의 실체를 분명하게 밝혀주었다. 『우상과 이성』(한길사, 1977)에도 베트남 전쟁 관련 논문이 3편 실려 있다. ‘30년 베트남 전쟁의 전개와 종결’을 부제로 하는 『베트남 전쟁』(두레, 1985)은 이 다섯 편의 글을 담은 책이다. 『우상과 이성』은 리영희 대표저서 중 하나다. 초판 서문의 한 대목은 저자의 집필동기와 의도를 함축한다.

“나의 글을 쓰는 유일한 목적은 진실을 추구하는 오직 그것에서 시작되고 그것에서 그친다. 진실은 한 사람의 소유물일 수 없고 이웃과 나눠져야 할 생명인 까닭에 그것을 알리기 위해서는 글을 써야 했다. 그것은 우상에 도전하는 이성의 행위이다. 그것은 언제나, 어디서나 고통을 무릅써야 했다. 지금까지도 그렇고 영원히 그러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괴로움 없이 인간의 해방과 발전, 사회의 진보는 있을 수 없다.”

『우상과 이성』은 1970년대의 대표적인 금서다. 제5평론집 『역설의 변증― 통일과 전후세대와 나』(두레, 1987)에 수록된 「『우상과 이성』 일대기」에 따르면, 이 책의 초판은 수명이 아주 짧았다. “『우상과 이성』은 정사생(丁巳生)이다. 1977년의 해가 저물어가는 11월 1일을 생일로 하여 세상에 태어나, 11월 23일 사형선고를 받은 단명하고도 단명한 인생을 살았다. 그러나 그 짧은 인생에는 백년의 인생에 해당하는 많은 사연이 얽혀 있다.”

저자에게 큰 고초를 안긴 것은 그 사연의 하나다. 리영희는 1977년 12월 이 책이 『전환시대의 논리』, 편역서 『8억인과의 대화』(창작과비평사, 1977) 등과 한데 엮여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 기소되어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1980년 1월 만기 출소한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말은 1990년대 중후반 우리 사회의 화두 가운데 하나였다. ‘『전환시대의 논리』 그 후’를 부제로 하는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두레, 1994)의 표제글은,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이 말의 최초 발설자인 미국의 인권운동가 제시 잭슨 목사가 아니라 리영희 선생에게 ‘2차 저작권’을 갖게 하였다.

“인류가 수천 년, 수만 년에 걸쳐 창조한 지식과 축적한 경험은 정치나 이념적으로 말해도 ‘극좌’에서 ‘극우’까지 다양하고 무쌍하다. 그리고 그 사이는 끝없이 풍부하다. ‘우’의 극단에 서면 우주의 모든 것이 ‘좌’로 보이게 마련이다. 조금 거리가 멀면 모든 것이 ‘극좌’로 보일 수밖에 없다. ‘좌’도 그 극에 서서 보면 모든 것이 ‘우’로 보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극’의 병리학이다.”

『스핑크스의 코』(까치, 1998)에서는 지금 남아 있는 고대 이집트의 수많은 신들과 왕과 왕비의 석상, 그리고 스핑크스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코가 뭉개진 사연이 가슴을 친다. “중세에 이집트를 점령한 기독교인들이 자신들보다 우월한 문명을 창조했던 이교도 우상들의 생명의 원천인 ‘숨(호흡)’을 끊어버리기 위해서 석상들의 코를 모조리 깨버리고, 얼굴까지 뭉개버렸다는 것이다.” 다른 문화와의 공존을 용납하지 않는 반달리즘의 원조가 서구 기독교인이라는 얘기다.

『반세기의 신화』― 진실 드러내기의 ‘항심(恒心)’

나는 리영희 교수의 ‘팬’이다. 리영희 교수의 저서는 『80년대의 국제정세와 한반도』(동광출판사) 말고는 모두 갖고 있다. 1984년 출판된 이 책은 그가 엮어 지은 거라서 리영희 교수의 단독저서는 거의 다 읽은 셈이다. 그런데 지난 연말 출간된 리영희 교수의 가장 최근 저서인 『동굴 속의 독백』(나남출판)을 살까말까 망설이고 있는 중이다. 그 이유는 『동굴 속의 독백』이 ‘선집’이기 때문이다. 한편, 이 책은 각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지난해 고희를 맞이한 리영희 교수에게 후학들이 헌정한 기념문집이기도 하다.

『반세기의 신화』(삼인)는 『동굴 속의 독백』보다 한 계절 앞서 작년 가을 출간된 리영희 교수의 근작 평론집이다. 더러 예전의 글이 수록돼 있기도 하지만 리영희 교수의 최근 생각이 담겨 있는 책이다. 내용은 ‘휴전선 남?북에는 천사도 악마도 없다’라는 부제가 시사하듯이 남북문제를 집중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내용면에서는 『분단을 넘어서』(한길사, 1984)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파악할 수도 있으나, 리영희 교수의 모든 저작을 관류하는 일관된 주제의식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는 까닭에 이 책 역시 또 하나의 『전환시대의 논리』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그것은 『반세기의 신화』가 “민족분단 이후 반세기가 넘도록 남북문제에 관해서 우리들이 ‘진실’일 것으로 믿어 왔던 온갖 ‘거짓’들의 정체를” 밝히는 데 진력하고 있어서다.

리영희 교수의 진실 드러내기는 실증적인 자료와 그것에 대한 엄밀한 해석을 통해 이뤄진다. 남북문제 또한 여기에서 예외가 될 수는 없다. 작년 여름 서해 연평도 앞바다에서 발생한 남?북한 해군 사이의 무력충돌과 관련한 글만 해도 그렇다. 이 「‘북방한계선’은 합법적 군사분계선인가?」는 ‘정전협정문’과 ‘미국 정부의 극비문서’ 등의 분석을 토대로 다시 한번 우리를 미망의 세계로부터 구출하고 있다.

10여 년 전 발표된 「대한민국은 한반도의 ‘유일 합법정부’가 아니다」라는 글도 이와 같은 맥락으로 읽힌다. 그런데도 예나 지금이나 남한의 극우 반공주의 세력과 개인은 ‘닭똥’을 ‘무릇’이라 우기고 있으니, 이를 어찌 할꼬. (위 글은 국제민주연대가 펴낸 인권과 평화이야기 『사람이 사람에게』 2000년 1?2 창간호에 실린 『반세기의 신화』를 다룬 리뷰의 일부다.)

리영희 선집과 리영희론

『동굴 속의 독백』(나남출판, 1999)은 리영희의 “30년에 걸친 글 중에서 비교적 부드럽고 짧은, 그리고 가볍고 일상적인, 그런 유형과 주제와 내용의 글들을 대강 추려 모”은 선집이다. 또한 이 고희기념 선집은 글쓰기에서 선생의 엄밀함을 엿보게 한다. 다음은 『리영희 : 살아있는 신화』에서 김만수의 지적이다.

“두 개의 새 글을 제외하면 『독백』의 글은 모두 이전 책에 실린 글을 재수록한 것이다. 그런데 글을 서로 비교해보면, 글자 하나 다르지 않고 똑같은 경우는 극히 드물다. 표현과 서술을 정확하고 분명하게 하기 위해 고친 흔적이 거의 대부분의 글에 보인다. 『독백』의 출판을 위해 리영희가 글을 읽고 일일이 다시 교정을 했다는 말이다.”

‘범우문고’ 101번째인 『인간만사 새옹지마』(범우사, 1991)는 리영희의 산문선집이다. 이 책은 비록 분량은 적어도 문학성 짙은 문체를 만끽하게 한다. 물론 더욱 돋보이는 것은 꼿꼿한 주제의식이다. 「언제부터인지, 어째서인지」에서 그는 우리 사회에서 질서와 안정의 착종된 의미를 따진다.

“‘높은 사람’이나 ‘돈을 많이 가진 사람’들은 그런 것이 사회의 질서가 아니라 다만 시민이 현존 질서나 체제에 반대하지 않고 비판하지 않는 것을 ‘질서 있는 사회’라고 부른다. 학생이 길에 나와 데모를 하지 않는 사회, 노동자가 하루 몇 푼의 임금을 받고 상당액을 자본주에게 빼앗겨도 파업을 하지 않거나 꿈쩍 말고 12시간을 일한 뒤에 주는 대로 아무 말 없이 받아가지고 돌아가는 그런 사회를 ‘안정된’ 사회로 보는 것 같다.”
-『인간만사 새옹지마』 중에서

리영희가 말하는 ‘질서 있는 사회’는 “소박한 생각의 대다수 시민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은 것으로 통하고,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는 사회”다. 또 “안정된 사회 또는 질서 있는 사회라는 것은, 그리고 어떤 내용이건 체제라고 말할 수 있는 이념과 생존의 유기적 원리를 갖춘 사회라는 것은 국가권력의 작용이 적을수록 건강한 것이다.”

김만수의 『리영희 : 살아있는 신화』는 선생에 대한 사상적 평전이다. 이 책에서 김만수는 리영희를 ‘실천하는 지식인’으로 본다. “리영희는 글로 진실을 밝혔고 평생 그 진실대로 실천하였다.” 그런데 리영희에 대한 평가는 그가 ‘동시대적 인물’인데다 ‘시대의 양심’과 ‘의식화의 원흉’으로 엇갈리는 세간의 인식 탓에 조심스럽고 어려움이 따른다. “이 평전은 실천하는 지식인의 삶을 전면적으로 평가하여 그러한 어려움을 정면으로 돌파하려는 시도다.”

강준만 편저 『한국 현대사의 길잡이, 리영희』(개마고원2004)는 “리영희라는 창을 통해 한국 현대사의 큰 줄거리들을 보게” 하는 책이다. 강준만은 말한다. “리영희만큼 해방 이후 한국 현대사의 큰 사건들을 그 누구보다 더 직접적으로 광범위하고 치열하게 겪은 사람이 또 있을까 하는 것이다. 그의 글은 곧 실천이었기에 그는 누구보다 더 넓은 행동반경에서 살아왔다. 리영희의 삶이 곧 한국 현대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고난의 『역정』과 『대화』

리영희의 『역정』(창작과비평사, 1988)은 아주 뛰어난 자서전이다. 이 책의 아쉬움은 선생의 반생을 담았다는 점뿐이다. 문학평론가 임헌영과 나눈 대담을 통해 그의 생애와 사상을 집대성한 『대화』(한길사, 2005)는 “대화 형식으로 서술한 인생의 회고록 또는 자서전이다.” 『역정』과 겹치는 내용이 없지 않지만 흠은 되지 않는다.

식민지 시대의 나쁜 유산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신생 독립국 군과 경찰의 태생적 한계를 짚은 대목은 아직도 뼈에 사무친다. 육십갑자가 지났어도 그 유산이 우리의 현실을 옥죄고 있는 듯하여. 그래서일까. 아래와 같은 ‘증언’과 ‘성찰’이 더욱 설득력 있게 다가오는 것은.

“한마디로 정신을 차릴 수 없는 혼란의 극치와 폭력이 난무하는 약육강식의 사회였지. 인간의 행동과 생존양식에서 모든 부정적인 측면이 노출된 것이 해방 직후의 남한 사회였어. 그때의 남한 사회는 오직 폭력, 무질서, 범죄, 사기, 약탈, 부정, 타락이 아무런 절제도 없이 난무하고, 힘없는 자는 어디 가서 하소연할 곳도 없는, 그야말로 반인간적인 사회였지.”

“해방 후 남북한 사정의 이런 대조는 한국의 반공주의적?우익적 개인 또는 세력이 무슨 말을 해도 부인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지. 남한 사람들은 싫건 좋건 이 사실에서 교훈을 얻으려고 해야지, 기분 나쁘다고 배격만 해서는 영영 발전할 수 없어요.”

“한국사회에서 광적인 반공주의자나 극우적 사고방식을 지닌 이해관계의 집단들이 6?25전쟁이 끝난 지 5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북한과의 전쟁 내지 군사적 대립을 국가와 국민의 상시적인 삶의 기본정신으로 고수하고 강조하는 것을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이런 개인과 이런 사상의 집단들이야말로 우리 남한사회와 국민들의 염원을 배반하는 자들일 뿐만 아니라 전 인류의 평화와 복지를 파괴하는 세력인 것을 알 수 있지 않아요?”

군 제대 열흘째 되는 날 리영희 선생을 청중의 일원으로 직접 뵐 기회가 있었다. 나는 그를 직접 대면한 소감을 독서수첩에 이렇게 적었다.

“사상의 은사, 국보적 자산이라는 평가가 하나도 아깝지 않다. 『전환시대의 논리』, 『우상과 이성』, 『역정』, 『역설의 변증』에 이어 다섯 번째로 이영희 선생님의 저서(『자유인, 자유인』)를 독파했다. 먼저 선생님의 이야기를 직접 들은 감흥을 적어 보자. 지난 토요일(10.13) ‘90서울도서전이 열리는 올림픽 공원 내의 제1체육관을 찾았다. ‘저자와의 대화’라는 프로그램에 선생님이 나온다는 광고를 보고서였다.

책을 통해서 접한 선생님의 성품으로 (미뤄봤을 때) 이런 자리는 의외라고 생각했는데 그 궁금증은 이내 풀렸다. 인기작가가 스스로 추천한 자신의 책이라는 코너(임)에도 자신은 연예인적 지식인은 아니시라며 인기 앞에 反자를 크게 써놓으셨다. 아까 소설가 고원정 씨의 자리 때보다는 많은 사람이 모였다. 선생님과의 ‘뜨거운 만남’을 위해 멀리서 온 나 같은 사람이 많은가 보다.

선생님의 첫마디는 이런 자리라면 여러분께는 미안하지만 이 자리에 나타나지 않았을 거라는 말씀이셨다. 모든 책임은 출판사 측에 있었지만, 나처럼 선생님을 존경하고도 직접 만나 뵐 수 없었던 이들에게는 좋은 기회다. 다음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으면 밤을 밝힐 만큼 진지하고 좋은 자리였다. 주최 측의 무례함도 잊으신 듯 소란스런 장내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질문마다 성의 있게 대답해주셨다.

(대부분의 내용은) 책을 통해서 익히 알았던 것들인데 다음의 두 가지는 말을 통해 들어서 (그런지) 더욱 쉽게 이해가 가고 공감이 되었다. 뚜렷이 기억에 새기기로 (한다). 첫째가 ‘ Simple Life, High Thinking’(이)라는 생활신조다. 단순한 생활에 고차원적인 생각쯤 될까. 선생님의 소지품을 다 내보이시면서 강직한 성품의 일면을 보여주셨다. 지하철의 정기승차권이 인상적이었다. 이렇다할 물건이 집에는 없지만 책만은 예외라 하셨다.

둘째, 통일이라는 추상적인 목표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그것에 이르는 구체적인 방법을 강구하라셨다. 즉, 최대의 장애물인 군사적인 문제의 해결. ‘역시’ 한 위대한 인간과의 만남이었다.”

「영국의 속담에 ‘A man′s ability to stand noise is in the reverse proportion to one′s intelligence’라는 말이 있어요. ‘소음을 참을 수 있는 능력은 그 사람의 지적(정신적) 수준과 반?례한다’는 뜻이지요. 소리와 몸짓의 광란, 이런 것은 교양?이성?지성 측면의 결핍을 뜻한다는 말이오. 물론 영국 상층 지식인들의 인간관에서 나온 말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하여튼 목적이 뚜렷한 사회적 의사표시이거나 사회정의를 위해 다른 방법이 없는 약자들의 생존의 외침이 아닌, 평상 상황이나 일반 문화적 표현으로서는, 그것이 연극이건 음악이건 길가의 장사이건 학교의 행사이건, 나는 시끄러운 것은 못 견딥니다. 그래서 소란스러운 곳을 피하지요.」
-『대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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