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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역사와 자본주의 발달사를 간파하다

리오 휴버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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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오 휴버먼은 다른 나라 사람에게 뒤죽박죽으로 보이고, 환상을 심어주는(특히 우리에게) 미국 헌법 제정에 얽힌 이야기를 통해 그것의 실체를 드러내고 올바른 이해를 돕는다.

어렸을 때 ‘삼중당 문고’로 읽은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의 일부 내용을 확인하러 동네 도서관에 갔다가 민망한 상황에 직면한 적이 있다. 집 근처 공공도서관은 작은 규모임에도 『싯다르타』가 서너 종이나 있었다. 그런데 이 중 두 종의 번역 텍스트가 정확히 일치했다. 어느 한 쪽이 다른 쪽을 베꼈다기보다는 두 쪽 모두 표절 혐의가 짙었다. 둘 다 ‘표준이 되는’ 『싯다르타』의 한국어 번역을 통째로 가져온 듯싶었다.

이런 일을 겪어서 그런지 몰라도, 미국을 대표하는 진보 지식인이었던 리오 휴버먼(Leo Huberman, 1903-1968)의 우리말 표기가 리오 휴버만, 레오 후버만, 레오 휴버맨, 레오 휴버만 등으로 제각각인 것이 차라리 마음 편할 지경이다. 휴버먼은 언론인이자 학자이며 노동운동가로도 활동했다.

한데 거의 한 세대 만에 재출간된 리오 휴버먼의 책들은 이전 번역판과 유사함이 없지 않다. 먼저, 둘 다 『We, the people』을 번역 저본으로 삼은 『가자, 아메리카로!』(박정원 옮김, 비봉출판사, 2001)와 『역사와 민중』(이경은?박숙희 옮김, 비봉출판사, 1983)을 보자. (『역사와 민중』 번역 초판은 1982년 『미국의 역사와 민중』이라는 제목으로 나온 걸로 보인다. 필자는 1983년판을 갖고 있다.) 20년 사이, 번역서 제목과 번역자는 바뀌었지만 번역문은 그대로다.

달라진 것은 2001년판의 ‘역자 서문’에서 시대상의 변화를 반영한 것 정도다. “요즘 조기유학 등으로 많은 학생들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고 있어 미국과 우리는 더욱 가까워지게 됐다. 유학생들과 부모님들, 그리고 많은 다른 이유로 미국인과 미국 사회를 알고 이해할 필요가 있는 분들이라면 필독서로 권하고 싶다.”

1983년판의 ‘역자 후기’는 레흐 바웬사가 이끄는 당시 폴란드 자유노조의 투쟁을 언급한다. “자유와 번영을 위한 인간의 투쟁은 오늘도 내일도 계속된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공산치하에서 자유를 위해 싸우는 폴란드 국민들에 하나님의 도우심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한다.”

본문은 별 차이 없다. 그렇다면 『가자, 아메리카로!』의 번역은 『역사와 민중』의 번역을 베낀 것인가? 그렇진 않다. 같은 사람의 번역이기 때문이다. 2001년판과 1983년판의 번역자 소개란의 이력을 감안할 때, 박정원과 박숙희는 동일인임이 분명하다. 한 사람의 이름을 다르게 표기한 사연은 알 수 없으나, 1980년대 사회과학서는 당국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 저역자의 이름에 가명을 쓴 경우가 왕왕 있었다.

미국 형성의 역사를 민중적 시각으로 서술한 『가자, 아메리카로!』는 2부로 이뤄져 있다. 1932년 출간된 초판은 미국 이민 초기부터 1930년대 초반의 대공황까지 다뤘는데 제1부가 이에 해당한다. 번역 저본으로 사용된 1947년판은 2차 세계 대전을 아우른 제2부를 추가하였다. 제1부는 미국으로의 이민 행렬과 미국의 영역 확장에 초점을 맞췄다.

“미국은 그 시초부터 지상의 모든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자석이었다. 사람들은 지상의 모든 곳으로부터 미국 해안가로” 몰려들었다. 자신의 몸뚱이를 볼모로 이주를 감행한 초창기 이민자의 행태는 브로커의 농간에도 아랑곳없이 우리나라를 찾는 아시아 일부 지역 출신 ‘산업연수생’의 안타까운 처지를 떠올린다.

“미국에 오기를 원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뱃삯을 지불할만한 돈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이 타고 온 배의 선장에게, 그들의 뱃삯을 대신 갚아 주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든지 몇 년의 기간 동안 하인으로 팔리는 데 동의했던 것이다. 신문에는 이러한 사람들의 도착을 알리는 광고가 자주 실렸다.”

그러면, 유럽 사람들은 왜 미국으로, 미국으로 몰려들었을까? 종교적 박해와 정치적 탄압을 피하기 위해 미국행을 선택한 이들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빈곤이 가장 큰 이유였다. “이민 온 사람들의 대부분은 굶주렸기 때문에, 보다 많은 빵, 보다 나은 빵에 굶주려 있었기 때문에 왔다.”

이민자들은 대체로 유럽의 절대적 빈곤층인 까닭에 미국으로 향하는 긴 항해의 고통을 참아내고, ‘계약 노예노동자’의 신분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런데 “백인들이 항해 중에 겪었던 고생들은 흑인들이 당해야 했던 참혹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무튼 초기 이민들의 생활은 참으로 힘겨웠다고 한다. 이주민들의 정착은 지리적 여건의 제한을 받았는데 이것은 남북전쟁의 도화선이 되기도 하였다. “지리적 환경이 서로 상반되는 사고방식을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은 명백한 일이다.”

한편, 미국인들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않은 법들을 아직도 계속 무시”하는 것은 식민지 시대부터 이어져온 “미국의 전통적인 관습이다.” 영국 의회가 제정한 “무역법들 중 어떤 것들은 식민지 주민들에게 유리하게 돼 있었다. 어떤 무역법들은 그들에게 손해를 가져왔다. 그들은 손해를 가져오는 법들은 부분적으로 지키거나 아니면 아예 무시해 버렸다.”

리오 휴버먼은 다른 나라 사람에게 뒤죽박죽으로 보이고, 환상을 심어주는(특히 우리에게) 미국 헌법 제정에 얽힌 이야기를 통해 그것의 실체를 드러내고 올바른 이해를 돕는다. “새로운 헌법은 재산이 있는 사람들에게 모든 점에서 유리하게 되어 있었다.” ‘헌법 회의’라 불리는 필라델피아 회의에 참가한 각 주 대표들은 한 가지 점에서는 의견의 일치를 보았는데, 그것은 “재산이 별로 없거나 전혀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힘을 갖게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3권 분립의 틀 “안에서 민중이 세력을 완전하게 장악하게 될 수 있는 위험은 극히 적었다.”

필자가 갖고 있는 『Man′s Worldly Goods- The Story of the Wealth of Nations』의 한국어판은 모두 3종이다. 인터넷으로 검색한 『노동의 역사- 자본주의의 역사』(문선유 편역, 현장문학사, 1989)가 이 책의 축약 번역판일 가능성이 없지 않으나 제목만으로는 섣불리 단정하기 어렵다.

아무튼 필자가 갖고 있는 『Man′s Worldly Goods』의 한국어판은 제목이 제각각이다. 『인간과 재화- 레오 휴버만의 국부론』(김대웅 옮김, 참한문화사, 1983)은 “인간의 세속의 부- 국부 이야기”로 직역되는 원서의 제목에 가까우나, 『경제사관의 발전구조』(장찬영 옮김, 청하, 1982)와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장상환 옮김, 책벌레, 2000)는 원제와 떨어져 있다. 그런데 원제와 약간 거리를 둔 제목의 두 한국어판에서 번역문이 비슷한 대목이 더러 있다.

① “그러나 상업의 관점에서 보면 십자군의 결과는 엄청나게 중요했다. 십자군은 기도하는 사람들, 싸우는 사람들, 일하는 사람들, 그리고 성장하는 상인 계급을 유럽 대륙 전역에 퍼지게 함으로써 침체된 서유럽 봉건제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십자군은 해외 상품에 대한 수요를 증가시켰다. 십자군은 지중해 항로를 이슬람교도들에게서 빼앗았고, 이것을 다시 고대에 그랬던 것처럼 동방과 서방 사이의 중요한 무역 항로로 만들었다.”

② “그렇지만 상업적 관점에서는 십자군 전쟁의 결과가 굉장히 중요하였다. 십자군 전쟁은 기도하는 사람들, 전투하는 사람들, 노동하는 사람들 및 성장하는 상인의 계급을 온 대륙에 퍼뜨림으로써 서부 유럽이 봉건적 수면에서 깨어나는 것을 도왔다. 십자군은 외국 상품에 대한 수요를 증가시켰다. 십자군은 지중해 항로를 이슬람교도의 수중에서 빼앗고, 그것을 다시 한번 고대 시대에서와 같이, 동방과 서방 사이의 대 통상 항로로 만들었다.

③ “교역의 관점에서 볼 때는 십자군운동의 결과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십자군운동은 유럽대륙 전역에 걸쳐서 성직자, 기사들과 농노들 그리고 성장해 가던 상인계층을 확산시킴으로써 서유럽을 기나긴 봉건적인 잠으로부터 깨어나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십자군운동으로 인하여 외국 상품에 대한 수요가 증대되었으며 또한 고대로부터 동서 교역의 중요한 통로가 되어왔던 지중해 연안의 해상로가 다시 활기를 띠게 되었다.”

①은 책벌레 판이고 ②는 청하 판이며 ③은 참한문화사 판이다. 번역이 엇비슷한 대목을 한 군데 더 보기로 하자. 마찬가지로 ①은 책벌레 판이고 ②는 청하 판이다.

① “상업은 출발이 좋으면 내리막길을 구르는 눈덩이처럼 성장하기 때문에, 그런 무역 중심지를 발견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북방의 상품을 운반하는 상인들은 알프스를 넘어온 남방의 상인들과 샹파뉴 평야에서 만났다. 이 곳의 많은 도시들에서 대규모 정기시가 열렸다. 가장 중요한 정기시가 열린 곳은 라니, 프로뱅, 바르쉬로브, 트루아였다.”

② “상업은 출발이 좋으면 언덕을 굴러 내리는 눈덩이처럼 커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상업 중심지가 발견되는 데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북방의 물품을 가지고 온 상인들은 남방으로부터 알프스를 넘어온 상인들과 샹파뉴의 평원에서 만났다. 이 지방의 여러 도시에서 거대한 정기시(定期市)가 열렸는데 가장 중요한 정기시는 라니, 프로뱅, 바르쉬르오브, 그리고 트르와에서 열렸다.”

그러면 어째서 18년의 간격이 있는 두 번역문에서 비슷한 문장이 나올까? 그 까닭을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첫째, 우연의 일치다. 둘째, 두 번역문의 모델이 되는 번역 텍스트가 따로 있다. 셋째, 나중 나온 것이 처음 나온 것을 일부 베꼈다. 하지만 이 세 가지 가능성보다는 번역자가 같은 사람이라는 쪽으로 무게가 쏠린다. 옮긴이를 동일인으로 보는 근거는 역자 소개란의 이력은 달라도 옮긴이의 성씨와 출생연도가 같다는 점이다.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는 “두 가지 목적이 있다. 그것은 경제 이론으로 역사를 설명하는 것과 역사로 경제 이론을 설명하는 것이다.” 또한 “역사는 변화의 기록”이라는 휴버먼의 역사관을 매개로 하여 봉건 사회에서 1930년대 중반의 파시즘 체제에 이르는 자본주의의 형성과 발달사를 훑는다.

이 책에는 흥미로운 내용이 가득하다. 그 몇을 보면, 교회에서 성직자의 결혼을 금지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단지 교회의 고위 성직자들이 성직자의 자식들에 대한 상속으로 교회 토지를 잃고 싶어 하지” 않아서였다는 것이다. “사업상의 어떤 거래든지 처벌받지 않는 한 정당하다는 현대의 관념은 중세의 사고에는 없었다”고도 한다.

“요즘의 실업 보험과 노후 연금 비슷한 것을 거의 600년 전에 길드가 조합원에게 제공했다”는 점 또한 흥미롭다. 하지만 길드는 아주 배타적인 조직이었다. “심지어 바젤과 프랑크푸르트에서는 거지들조차도 길드를 결성해 1년에 이틀을 빼고는 외지에서 온 거지가 시내에서 구걸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경제 조건의 변화는 경제관념의 변화를 가져왔는데 ‘공정가격’에서 ‘시장가격’으로의 변화가 그렇거니와, 지리상의 발견은 상업의 흐름을 바꾼 또 하나의 유인이었다. 상업과 무역의 중심이 베네치아와 남부 독일의 도시들에서 대서양 연안으로 옮겨진 것은 ‘역세권’의 변모에 따른 변화 양상으로 풀이할 수 있다.

경제관련 용어의 말밑과 개념에 대한 쉬운 설명은 여러모로 유익하다. 휴버먼은 상인과 도시 거주자가 동일인이라는 근거로 12세기 초까지 상인을 뜻하는 ‘메르카토르(mercator)’와 도시에 사는 사람을 뜻하는 ‘부르겐시스(burgensis)’가 같은 의미로 쓰였다는 점을 든다. “의미심장하게도” 독일어로 ‘교환하다(tauschen)’와 ‘속이다(t?uschen)’는 “어원이 같다.”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한다”는 격언에서 ‘양화’는 “실제 가격과 법정 가격의 차가 적은 화폐”이고, ‘악화’는 “화폐의 재료가 되는 금속의 가격이 법정 가격보다 낮은 화폐”다. ‘자유방임’이라는 말은 만든 사람은 드 구르네이라는 프랑스 기업가였다. ‘자유방임’은 “우리를 내버려 둬라”는 뜻이다.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라고 한 『좀머 씨 이야기』의 주인공은 자유방임주의자인가?

휴버먼은 서슴없이 노동자를 적극 편든다. “노동조합은 노동자가 바라는 것, 즉 더 나은 생활수준을 이룩할 수 있는 노동자의 가장 강력한 수단이다.” 그러면서 휴버먼은 바이런과 P.B. 셸리 같은 영국의 시인들이 단순히 낭만적이고 서정적이지만은 않았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셸리는 「영국의 노동자들에게」 시를 바친 전투적 시인이었다.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에서는 다른 책들과 영향을 주고받은 흔적이 묻어난다. 휴버먼 자체로는 첫 저서 『가자, 아메리카로!』의 영향이 읽힌다. ‘항해 조례’를 다룬 대목이 그렇다. 또 한 권의 ‘worldly한’ 책과는 관계가 더 가까워 보인다. 로버트 하일브로너의 『세속의 철학자들(Worldly Philosophers)』(이마고)은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의 속편 또는 심화로 봐도 무방하다.

두 권 다 맬서스와 리카도를 함께 언급할 뿐 아니라 마르크스를 비중 있게 다룬다. 아울러 독일의 전설적 금융 가문인 푸거 가에 대해서도 공히 의미를 부여한다. 휴버먼이 야콥 푸거를 논하고, 하일브로너가 안톤 푸거를 거명한 차이는 있지만 말이다. 『세속의 철학자들(Worldly Philosophers)』 역시 장상환 교수가 우리말로 옮겼는데, 번역과 본문 편집이 한결 깔끔하다.

이 밖의 한국어판 리오 휴버먼으로는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폴 스위지와 공저한 『쿠바혁명사』(지양사, 1984), 『노동대중의 등불- 노동조합이란 무엇인가』(여명문화사, 1962), 『사회주의란 무엇인가』(동녘, 1987) 등이 있다. 셋 다 재출간 가능성이 낮지만, 그 중에서도 『사회주의란 무엇인가』가 가장 낮을 것 같다.

“사회주의는 자유의 시작이다. 사회주의는 인류를 괴롭히는 가장 심한 해악― 임금노예, 빈곤, 사회적 불평등, 불안, 인종차별, 전쟁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또한 사회주의는 국제적 운동이다. 그 강령― 야만적인 경쟁제도를 문명적인 공동사회로 바꾸고, 개인의 복지가 만인의 복지 속에서 실현되는 우애의 사회를 만드는 것 ―은 세계 모든 나라에서 일치한다. 사회주의는 결코 불가능한 꿈이 아니라, 그것은 사회가 진화되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진보의 한 걸음인 것이다.”

휴버먼이 말하는 사회주의의 진실이다. 리오 휴버먼은 1949년 폴 스위지와 함께 세계적인 진보 잡지 <먼슬리 리뷰Monthly Review>를 창간하여 20년간 편집인으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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