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4대 종교를 꿰뚫어 본 학자
카렌 암스트롱
영국의 종교학자 카렌 암스트롱(Karen Armstrong, 1944- )이 쓴 『신화의 역사』(이다희 옮김, 문학동네, 2005)는 얇지만 실팍한 신화 개설서다.
영국의 종교학자 카렌 암스트롱(Karen Armstrong, 1944- )이 쓴 『신화의 역사』(이다희 옮김, 문학동네, 2005)는 얇지만 실팍한 신화 개설서다. 구석기 시대부터 현재까지 2만2천 년의 인류사를 몇 개의 굽이로 나눠 “인류로 하여금 스스로의 신화를 수정하게끔 만든 주요한 지적 정신적 사회적 혁명”에 주목하여 신화의 발자취를 살핀다.
신화의 시대적 구분은 구석기, 신석기, 초기 문명, 기축시대, 탈기축시대, 대변혁의 여섯 매듭을 짓는데, 첫 장은 ‘신화란 무엇인가?’에 할애한다. “신화는 역사 저편에 있는, 인간 존재에 내재한 영원성을 지향하는 예술 형식이다.” “신화는 소설이나 오페라, 무용극처럼 꾸며낸 이야기다. 파편적이고 비극적인 우리의 세계를 변형시켜보는 놀이다.” 다른 각도에서 신화는 “한 번 일어난 사건이지만, 늘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신화는 종교와 함께 인간 정신의 독특한 특징인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고 경험할 수 있는 능력, 곧 상상력”의 산물이다.
카렌 암스트롱은 신화 창작의 동기와 배경도 짚어 준다. “신화란 우리가 인간으로서 겪는 곤경에서 헤어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신화는 사람들에게 세상 속 저마다의 위치와 진정한 방향을 찾아 준다.” 또한 “역사적인 기록이 아니라, 우리가 그 당시 마주한 환경과 이웃, 관습에 대한 태도를 설명하는 데 보탬이 되기 위해 신화를 만든 것이다.”
따라서 “신화가 환희를 불러일으키지 않는다면, 그 신화는 죽은 신화이며 더는 유용하지 않다.” 신화의 진실성을 가늠하는 잣대는 사실에 입각한 정보가 아니라 그것의 유효함에 있다. “우리들로 하여금 생각과 마음을 바꾸도록 요구하고, 새로운 희망을 주고, 더 알찬 삶을 살게 만든다면, 그것은 ‘유효한’ 신화다.” 신화는 우리가 그 지침을 따르는 한에서만 우리를 변화시키는데 이는 신화가 본질적으로 안내자와 같아서다.
카렌 암스트롱은 근대 이전의 세계에서 필수 불가결하였던 신화와 현대인 사이의 거리감에 우려를 표명한다.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정도의 신화로부터의 소외는 선례가 없는 일이다.” 그러나 카렌은 “절대적으로 유일하고 정설인 신화는 없다”라고 덧붙이면서, “간략한 신화의 역사를 통해” 상황의 변화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신화를 이야기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인간이 큰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늘 그래 왔듯이.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신화를 재검토하고 새로운 환경에 맞게 변화를 꾀하는 작업을 위한 실마리라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본성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래서 오늘날의 사회와는 판이하게 다른 사회에서 만들어진 신화가 여전히 우리의 가장 본질적인 두려움과 욕망에 말을 건다는 사실을 보게 될 것이다.”
신화적 시대 구분에서 ‘기축(機軸)시대’는 특히 주목을 요한다. ‘기축시대(Axial Age)는 기원전 800년경에서 200년경에 이르는 600여 년을 일컫는 독일 철학자 칼 야스퍼스의 용어다. 이 때는 인류 신앙 발전의 중추가 된 시기다. 이 시대에 얻은 지혜는 오늘날까지 우리 정신을 풍요롭게 하고 있으며, “이 시대는 우리가 알고 있듯이 종교의 시작을 명시한다.”
카렌 암스트롱은 기축시대의 모든 사상이 공통되는 본질적 구성 요소를 갖고 있었던 걸로 파악한다. “모두 인간 조건의 피할 수 없는 일부로 보이는 고통을 심각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형식적인 의식과 의례에 과도하게 의지하지 않는, 보다 정신적으로 충만한 종교를 강조하고 있었다. 그리고 개인의 양심과 윤리에 대해 새로운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아울러 기축시대의 “모든 현인은 당시에 난무했던 폭력으로부터 물러나 연민과 정의의 윤리를 설파했다.” 또 진실을 얻으려면, 다른 성직자나 종교 전문가의 인도와 가르침에 의지할 게 아니라 스스로를 성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여기에다 하나같이 좀더 내적이고 윤리적인 신화 해석을 추구하였는데 이것은 “도시 생활의 도래는 신화가 더이상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한편, 기축시대의 현인들은 “신화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기 위해서는 감정적 공명을 불러일으키는 의식을 행해야 할 뿐 아니라 윤리적으로 올바른 행동을 해야”한다고 역설했다.
1500년경부터 현재까지를 가리키는 ‘대변혁’의 시대를 다룬 마지막 장에서 카렌 암스트롱은 우리에게 필요한 신화의 성격을 네 가지로 요약한다. 그것은 민족?국가?이념에 구애됨이 없이 서로에게 동질감을 느끼게 도와주는 신화, 연민의 중요성을 깨우쳐 주는 신화, 유아론(唯我論)적 이기주의에 이의를 제기하는 초월적 가치를 경험하게 하는 신화, 그리고 대지를 신성한 것으로 받들고, 단순한 ‘자원’으로 이용하지 않게 하는 신화다.
신화를 예술의 한 형태라고도 보는 카렌 암스트롱은 “만약 전문 종교 지도자들이 우리에게 신화적 지식을 줄 수 없다면, 아마도 예술가들과 작가들이 이러한 성직자의 역할을 맡아서 길 잃고 상처 입은 이 세상에 새로운 통찰을 가져올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한다.
이 책의 번역자는 ‘옮긴이의 말’을 통해 “알타미라 동굴 벽화가 1만 년 전에 그려졌다고 해도, 무려 1만2천 년 동안의 역사가 서울 지하철 2호선을 타고 두어 바퀴 돌 만한 시간에 안에 읽을 수 있는 짧은 분량의 책 속에 담겨 있”다고 했지만, 이 책을 읽는 장소로 전동차 안은 부적합하다. 전철은 책에 밑줄을 긋기가 불편해서다.
이 책은 ‘세계신화총서’의 첫째 권이기도 하다. ‘세계신화총서’는 영국 캐넌게이트 출판사의 기획 시리즈로 세계 각지의 신화를 현대적 관점으로 재해석하는 작업이다. 32개 나라의 출판사 34곳이 참여한 범세계적인 프로젝트이기도 하다. 2005년 10월 20일 1차분 3권이 전세계 동시 출간되었고, 2038년 3월 100권으로 완간될 예정이다. 이 시리즈의 한국어판 출판은 문학동네가 맡았다.
『신화의 역사』 한국어판 북커버의 책 날개에는 카렌 암스트롱의 이력이 나와 있는데, 이미 출간된 한국어판 카렌 암스트롱의 저자 소개보다 자세하다. 필자의 선배는 카렌 암스트롱을 천재로 간주한다. 어릴 적 그녀는 천재까지는 아니어도 수재 소리는 들었을 성싶다. 카렌은 적어도 평범한 학생은 아니었다. 열네 살에 찰스 디킨스의 작품을 모두 독파하였고, 열일곱에는 옥스퍼드 대학 입학 허가를 받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대학 대신, 로마 가톨릭의 ‘성스러운 아기 예수회’에 들어가 7년 동안 수녀원에서 생활한다. 1967년 수녀원의 지원을 받아 옥스퍼드 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하기 시작한 그녀는 학업과 신에게 헌신하는 삶 사이에서 심한 갈등을 겪는다. 끝내 카렌은 1969년 수녀원과 완전 결별을 하기에 이른다. 옥스퍼드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대학에 머물지만, 건강이 악화돼 정신병원 신세를 지기도 한다.
1976년 간질병 진단을 받고 나서 오히려 안정기로 접어든다. 자신을 괴롭힌 증세의 원인을 이해하게 되자 적극적인 치료를 통해 건강을 되찾는다. 카렌 암스트롱은 『마호메트 평전』(유혜경 옮김, 미다스북스, 2002)의 서문에서 “나는 이제 기독교 신자가 아니며 그렇다고 다른 종교를 믿지도 않는다”는 견해를 피력하기도 하였다.
『마호메트 평전』은 『스스로 깨어난 자 붓다』(정영목 옮김, 푸른숲, 2003)와 더불어 카렌 암스트롱의 재능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글 흐름의 편의상 붓다 전기부터 살펴보자. 서양에 축적된 붓다 연구와 팔리어 경전에 나타난 붓다의 생애를 바탕으로 한 이 책은 감탄을 자아낸다. 우리말 옮긴이의 의도가 겹쳐진 ‘낯설게 드러난 붓다의 모습’은 내 상식을 초월한다.
붓다를 둘러싼 이런 경험이 처음은 아니다. 예비 고등학생이던 1983년 2월 어느 날 읽은 헤르만 헤세의 「시다르타」(송영택 옮김, 삼중당문고 376번의 표제작)의 독후감이 그랬다. 강가에서의 싯다르타의 깨우침을 접한 느낌이 특히 그랬는데 당시에는 그 실체를 어렴풋이 짐작만 했었다.
훗날 습득한 지식이 더해져 그 장면은 헤라클레이토스의 ‘만물은 유전한다’(판타 레이panta rhei- 헤라클레이토스에 대한 플라톤의 철학적 평가인 ‘만물유전설’에서 유래)는 서양식 윤회관과 “같은 강물에 발을 두 번 담글 수 없다”는 헤라클레이토스가 남긴 비유적 격언의 표상 정도로 여겨졌다.
아무튼 이 책은 붓다의 생애와 불교 가르침의 절묘한 융합으로 보기 드물게 뛰어난 사상적 전기의 진경을 창출한다. 그런데 이러한 서술 방식은 현전하는 문헌 자료에서 붓다 생애의 공백으로 인한 고육책이기도 하다. 붓다가 그의 생애 가운데 45년을 대중에게 노출된 삶을 살았어도, 텍스트들은 거의 반세기를 대충 훑고 지나가는 탓에 “전기 작가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카렌 암스트롱은 내가 붓다와 불교에 대해 인식하지 못했던 점을 일깨우고 주지시킨다. 먼저 붓다에 대한 평가를 보면, “붓다는 단지 자신의 구원에 이른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고통에 대한 면역을 얻었음에도 다른 사람들의 괴로움에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다. 또한 “동정심은 붓다의 깨달음에서 핵심적인 구성 요소”다.
혀를 내두르게 하는 카렌의 깊은 불교 이해는 둘째치고, 그녀는 전통적 불교권에 사는 독자가 못 보는 불교의 여러 측면을 드러내어 우리를 놀라게 한다. 불교는 도시를 기반으로 하고, 기본적으로 심리적 종교이며, “불교도의 관점에서 보자면, 사람은 구원을 얻고자 할 때 신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안거(安居)’의 유래는 이 책의 부수적 소득이다. 안거를 의미하는 ‘밧사(vassa)’는 팔리어로 우기(雨期)를 뜻한다. “왜 사캬무니를 따르는 사람들은 우기에도 돌아다니느냐?”는 비판을 들은 붓다가 모든 ‘상가(sangha, 僧家)’ 구성원들에게 우기의 은둔을 의무로 지키라고 명령했다는 것이다.
심오한 내용과 팔리어 발음으로 표기한 불교 용어의 생소함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이 책은 쉽게 읽히지 않는다. 읽히는 힘은 『마호메트 평전』이 한결 낫다. 이 책은 지금까지 나온 한국어판 카렌 암스트롱 중에서도 가독성이 제일 높다. 카렌 암스트롱은 이 책을 집필한 이유로 접신을 체험한 무함마드가 인간의 영적 체험에 남다른 기여를 한 점과 이러한 본질적인 사실을 존중해야 한다는 점을 든다.
제1부에 놓인 무함마드와 이슬람, 나아가 아랍권을 향한 서구의 천년에 걸친 적개심과 증오의 역사는 세계 분쟁의 주범이 누구인지 실감하게 한다. 이슬람에 대한 적대감과 짝을 이루는 반유대주의의 기원도 살짝 엿볼 수 있다. 십자군 전쟁 기간 유럽은 심한 왜곡과 부정이 판을 쳤고, “서구 기독교가 이슬람이나 비잔틴 제국처럼 기독교 체제 안에서 다른 종교 공동체나 사상들을 성공적으로 수용할 수 없다는 사실이 명백해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카렌 암스트롱은 무함마드가 한번도 신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실제로 그는 모든 면에서 인간일 뿐이다.” 비범하다기보다는 신앙심이 깊은 사람에 가깝다. 또한 무함마드는 “성인 군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무함마드는 정치적인 재능과 아울러 위대한 정신적인 천품을 지녔다. 카렌은 무함마드의 “비범함을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그가 태어난 사회와 그가 투쟁할 수 있었던 원동력을 면밀히 분석해야 한다”면서 이 책을 통해 그것을 실행한다.
개설서 『이슬람』(장병옥 옮김, 을유문화사, 2003)에서는 예의 그녀의 해박한 지식과 진지한 접근이 돋보인다. 카렌은 이슬람의 역사를 섭렵하고 숙성시킨 다음, 자신의 목소리로 1400년에 이르는 이슬람의 역사를 간추려 들려준다. 이따금 이슬람을 보는 그녀의 관점이 드러나기도 한다. 카렌 암스트롱은 이슬람교를 유대교처럼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야 할지를 요구하는 종교라 여긴다. “이슬람은 역경을 극복하는 종교”이기도 하다.
『신의 역사 Ⅰ?Ⅱ』(배국원?유지황 옮김, 동연, 1999)는 카렌 암스트롱의 이름을 우리 독자들에게 처음으로 알린 책이다. 이 책은 『신화의 역사』와 짝은 이룬다고 볼 수도 있지만, 훨씬 방대하다. 한국어판의 본문만 680쪽에 이른다. ‘옮긴이의 글’은 이 책을 “‘신’에 관한 연구서가 아니라 ‘신 개념’의 역사적 전개에 관한 보고서”로 규정한다.
또한 “풍부한 내용”을 매력 포인트로 꼽는다. “이 책은 아주 먼 옛날 바빌로니아인의 창세 신화에서 시작하여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의 전 역사를 통해 내려온 신 개념의 다양한 변천사를 소개하고 있다.” 한편, 지은이는 자신의 책을 이렇게 표현한다. “이 책은 시대와 변화를 초월하여 있는 표현 불가능한 신의 실재 그 자체에 대한 역사가 아니라, 인류가 아브라함 시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신을 어떻게 인식해 왔는가에 대한 역사다.”
“21세기에도 힘을 잃지 않고 중요한 종교적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신앙은 신비주의적 신앙”이라고 주장하는 카렌 암스트롱은 21세기에도 힘차게 살아 숨쉬는 신앙을 창조하기 위해 “신의 역사가 주는 여러 신앙적 교훈과 경고를 가슴 깊이” 되새기기를 우리에게 주문한다. 카렌 암스트롱의 책에는 ‘용어 해설’을 비롯한 본문의 이해를 돕는 부속 텍스트가 충실하다. 그런 점에서 책이 다루고 있는 인물과 주제에 대한 고급 입문서로도 전혀 손색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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