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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운동의 성자(聖者, Guru)

사티쉬 쿠마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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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릭 젠슨과의 인터뷰가 실려 있는데 인터뷰 말미에서 사티쉬 쿠마르는 비폭력의 덕목으로 참을성과 자비심을 강조한다.

인도 라자스탄 태생의 사티쉬 쿠마르(Satish Kumar, 1936- )는 직함이 여럿이다. 평화순례자이고, 녹색운동가이며, 녹색사상의 연구?교육 기관인 슈마허 대학을 설립하여 운영하는 교육자다. 1973년부터 영국의 생태잡지 〈리서전스(Resurgence)〉를 만들고 있는 편집자이기도 하다. ‘녹색운동의 성자’ 통하는 사티쉬 쿠마르는 그의 저서 말고도 다른 두 개의 매체를 통해 우리에게 친숙하다.

우선, 역시 인도의 정신적 지도자이자 사회개혁가인 비노바 바베의 한국어판 관련서에 사티쉬 쿠마르의 이름이 보인다. 사티쉬 쿠마르는 비노바 바베의 사상선집이랄 수 있는 『버리고, 행복하라』(산해, 2003)를 엮었고, 칼린디의 비노바 평전 『비노바 바베』(실천문학사, 2000)에도 그의 글이 실려 있다.

사티쉬 쿠마르는 〈녹색평론〉 지면을 곧잘 타곤 한다. 〈녹색평론〉 2000년 7-8월 통권 제53호는 녹색사상가 시리즈의 일곱 번째 인물로 사티쉬 쿠마르를 소개한다. 데릭 젠슨과의 인터뷰가 실려 있는데 인터뷰 말미에서 사티쉬 쿠마르는 비폭력의 덕목으로 참을성과 자비심을 강조한다.

“비폭력의 문화를 건설하는 데 비방(秘方)이나 지름길은 없습니다. 매우 힘들고, 고통스럽게 느린 작업입니다. 참을성이 아주 많아야 합니다. 자비심도 필요합니다. 참을성과 자비심은 비폭력의 두 가지 덕목입니다. 문화는 한사람, 한사람씩 변화시킬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거대한 하나의 운동, 하나의 큰 대화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2004년 봄, 사티쉬 쿠마르는 녹색평론사가 주최한 ‘21세기를 위한 사상강좌’의 네 번째 연사로 우리나라를 찾았다. 〈녹색평론〉 2004년 7-8월 통권 제77호에는 이틀에 걸친 강연과 토론 내용이 실려 있는데, 질의응답에서 사티쉬 쿠마르는 개발과 진보를 ‘자발적인 소박함’으로 대체하기를 제안한다.

“오늘날의 생태주의 시대에 개발과 진보는 적당하지 않은 단어입니다. 저는 우리가 새로운 단어를 사용하기를 원합니다. 그것은 자연세계와 인간세계의 조화로운 관계를 의미하는 단어여야 합니다. 저는 그 단어가 ‘자발적 소박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소박한 삶이 아름다운 삶입니다. 개발이나 진보가 아니라 ‘소박함’의 가치가 옹호되어야 합니다. 개발이나 진보가 아니라 삶의 질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사티쉬 쿠마르의 『부처와 테러리스트』(이한중 옮김, 달팽이출판, 2005)는 감동을 주는 단아한 소품이다. 사티쉬 쿠마르가 불교의 전통적인 이야기를 재구성한 까닭을 번역자는 “대상과 정도를 가리지 않는 폭력이 난무하는 이 시대에 그 폭력의 뿌리가 무엇인지 살펴보고, 그 근원에 자리 잡고 있는 두려움을 극복하는 용기를 발현하여 사랑과 자비로 폭력의 악순환을 끊어 보자는” 메시지로 받아들인다. 옳은 해석이다.

그런데 나는 앙굴리말라 이야기를 성경에 나오는 사울의 회심과 겹쳐 보고 싶다. 앙굴리말라는 석가모니 시대에 사람을 죽여 손가락(앙굴리)으로 만든 목걸이(말라)를 하고 다닌 천하의 악한이다. “사울은 교회를 쓸어 버리려고 집집마다 돌아 다니며 남녀를 가리지 않고 끌어 내어 모두 감옥에 처넣었다.”(사도행전 8: 3)

부처를 만난 앙굴리말라는 “자기 방법의 부질없음을, 죽임과 폭력의 부질없음을, 권력의 부질없음을” 깨닫는다. 이윽고 앙굴리 말라는 스스로 깨닫고 깨어난다. “부처는 앙굴리말라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마치 이렇게 재촉하는 것 같았다. ‘선택을 해, 앙굴리마라, 선택을 해! 나를 죽이든지, 나에게 내맡기든지.’ 갑자기 돌파구가 보였다. 앙굴리말라는 칼을 땅에 꽂아버리더니 손가락 목걸이를 잡아 뜯고는 땅에 박힌 칼을 뽑아들고서 널따란 칼날로 땅에 재빨리 구덩이를 팠다. 그리곤 목걸이를 구덩이에 던져 넣고 흙으로 덮어버렸다.” 부처가 처음 본 급격한 교화였다.

"사울이 길을 떠나 다마스커스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에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번쩍이며 그의 둘레를 환히 비추었다. 그가 땅에 엎드러지자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는 음성이 들려 왔다. 사울이 “당신은 ?구십니까?” 하고 물으니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일어서서 시내로 들어 가거라. 그러면 네가 해야 할 일을 일러 줄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는 대답이 들려 왔다."(사도행전 9: 3- 6)

사울이 사도 바울로 거듭났다면, 앙굴리말라는 아힘사카, 곧 해롭지 않은 사람으로 번신(?身)을 이루었다.

사성제(四聖諦), 팔정도(八正道)와 함께 불교의 핵심을 간추린 것은 이 책의 미덕이다. “무엇이든 그대 자신과 남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이 있으면 그것이 올바른 것이다. 고통을 더해주는 것은 무엇이든 그릇된 것이다.” 헌신적인 제자인 난디니 부인의 올바름에 관한 물음에 대한 부처의 가르침이다. 또 부처는 파세나디 왕에게 고정불변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설파한다.

“전하, 모든 것은 변하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모두 변화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변화할 수 있는 것만이 아닙니다. 변화는 불가피한 것입니다. 변화하지 않는 것은 단 하나뿐입니다. 그것은 ‘변화 그 자체’ 입니다.”

2004년 6월 5일 서울 교보문고 광화문 매장에서 열린 ‘제3회 2004 환경책 큰 잔치’ 개막 행사장에서 사티쉬 쿠마르의 『그대가 있어 내가 있다』(정도윤 옮김, 달팽이출판, 2004)를 펴낸 출판사의 대표를 만났다. (이하 『그대가 있어 내가 있다』에 관한 내용은 〈녹색평론〉 2004년 7-8월 통권 제77호에 기고한 서평의 일부입니다.) 출판사 대표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사티쉬 쿠마르의 책이 언론에 제대로 소개가 되지 않아서인지 판매가 부진하다는 그의 말에, 시간이 지날수록 천천히 꾸준하게 팔릴 거라고 화답한 것이 화근이라면 화근이다. 책을 다 읽고 보니 제1부 첫 장만 읽고 내린 판매 전망은 섣부른 예측이면서 필자의 불찰이 될 가능성이 높아져서다.

사티쉬 쿠마르의 『그대가 있어 내가 있다』는 우리말로 옮겨진 그의 두 번째 책이다. 먼저 번역된 『사티쉬 쿠마르』처럼 이 책 역시 자전적이다. 하지만 본래 의미의 자전적 기록과는 거리가 있다. 이 책은 유년기 자아 형성에 결정적 영향을 준 어머니에서부터 아홉 살 때 입문해 열여덟까지 머문 자이나교의 스승들과 간디, 러셀, 슈마허와 같은 사상의 은사들을 등장시켜 그의 세계관 형성 과정을 드러낸 일종의 사상적 자서전이다.

흥미로운 것은 사티쉬 쿠마르가 자신에게 적잖은 영향을 끼친 사상의 은사들의 나레이터를 자임한다는 점이다. 사티쉬 쿠마르가 은사들 뒤로 자신의 모습을 감추는 의도는 제목에서 어렴풋하게 짐작할 수 있으나, 그런 숨은 의도는 책을 한참 읽어야 전모가 드러난다. 남의 얘기를 전달하는데 치중하다 보니, 책의 전반부에서 사티쉬 쿠마르의 육성을 들을 수 있는 대목은 제2부의 한 장을 이루는 「끊임없이 흐르는 강」정도가 고작이다. 여기서도 역시 또 하나의 은사인 비노바 바베의 영향에서 크게 자유로운 것 같지는 않다. 아무튼 상대적으로 또렷하게 들리는 사티쉬 쿠마르의 육성에 기대어 그의 생각의 갈피를 잡아 보기로 하자.

그는 모든 활동이 신성하게 이루어질 때 사회는 더욱 성숙해진다고 말한다. “인정과 보상을 바라는 욕구를 지니지 않고 행동하며, 자의식을 갖지 않고, 탐내지 않으며, 우리의 노동이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나타날 때, 우리의 활동은 선물(다나)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불순한 동기와 이기적인 이유로 활동하면 아무리 작품이 훌륭해도 사회를 성숙시키지 못한다고 덧붙인다.

또, 그는 자신을 충만하게 하는 방법으로 겸손과 봉사, 공부와 잠의 네 가지를 든다. “겸손(비나야)은 자존심이라는 무게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해” 주고, “봉사(세와)는 우리가 가지고 있거나 몰두하고 있는 문제에 대한 강박관념을 깨끗이 씻어 준다.” 따라서 봉사는 “자선이나 이타주의가 아니라 자신을 새롭게 하기 위한 것이다.” 공부(스와다야)는 책을 읽고 명상하며 사려 깊은 활동을 통해 자신을 새롭게 만드는 것이다. 잠자기(니드라)는 손상된 영혼을 치유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책의 중반부에서도 어렵사리 사티쉬 쿠마르의 육성을 들을 수 있는데 제2부에 들어 있는 「합리주의와 비폭력」에 관한 성찰이 그것이다. “폭탄을 ?대하면서도 과학합리주의와 이원론과 개인주의와 소비자 중심주의 같은 것들에 대해 근복적인 의문을 가지지 않는 사람들은 절대 핵폭탄에서 자유로운 미래를 얻을 수 없다.”

사티쉬 쿠마르가 자신의 생각보다 은사들의 가르침을 앞세운 데에는, 표제로 사용된 마지막 장에서 밝힌대로, 근대 서양 문명의 기반이 된 데카르트의 이원론을 비판하고 불가에서 말하는 ‘상호의존의 깨달음’을 옹호하려는 의도가 다분해 보인다. 다시 말해, 책의 전개 방식부터 분리 철학을 지양하고 관계 철학을 복원하는 형태를 취한 것이다. 그러니까 ‘그대가 있어 내가 있다’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와 대립항을 이루는 셈이다.

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은사들의 일화와 가르침은 취할 바가 많다. 예컨대 자이나교의 스승 구루데브 툴시는 “진리를 안다는 것은 겸손하며, 새로운 발견에 열려 있으면서도 궁극적인 발견이나 마지막 발견이라는 건 없다는 걸 받아들이는 것이다. 진리는 그 자체다.(중략) ‘모든 진리’를 안다고 주장하는 개인이나 그룹은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똑같은 형식이 반복되는 이야기 구조는 독자의 몰입을 방해하는 단점이 있다. 필자는 이 책을 꽤 더디게 읽었는데 필자의 집중력이 떨어져 그런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아마도 반복되는 이야기 패턴이 독자의 흥미를 떨어뜨리기 때문이리라. 여기에다 직간접 화법으로 전달되는 간디, 비노바 바베, 러셀, 슈마허, 마틴 루터 킹, 반다나 시바의 언설들은 그것을 이미 접한 독자에게는 더욱 흥미를 떨어뜨리는 요소로 작용한다. 게다가 사티쉬 쿠마르의 생각을 읽고자 하는 독자에게는 궁금증을 자아내게 한다.

물론, 방금 나열한 사상가들을 잘 알지 못하는 독자에게 이 책은 이들에 대한 훌륭한 입문서가 될 수도 있고, 한때 책의 옮긴이처럼 존재론적 고민에 빠진 독자에게는 귀중한 지침서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이 책의 출간이 사티쉬 쿠마르의 방한 시점과 맞물렸음에도 우리의 언론이 이 책을 외면한 까닭은 필자가 지적한 아쉬움과는 관계가 없어 보인다. 사티쉬 쿠마르가 우리 사회에 덜 알려져 있는 데다 언론 종사자들마저 그를 잘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사티쉬 쿠마르』(서계인 옮김, 한민사, 1997)는 자전적 수행기로 그의 어머니가 꾼 태몽부터 영국 다링톤 재단의 도움을 받아 슈마허 대학을 설립하는 과정까지 담았다. 사티쉬 쿠마르는 1936년 8월 9일 새벽 4시, 스리둥가가르라는 도시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시각은 창조의 신 브라흐마의 시간이며, 완전한 정적과 고요 그리고 평화의 시간으로, 새벽 햇살이 대지를 비추듯 지혜의 빛이 영혼을 비추는 때라고 한다. 사티쉬 쿠마르의 조상은 카스트의 군인 계급인 크샤트리아에 속하는 라지푸트였다.

사티쉬 쿠마르가 초대 학장을 맡은 슈마허 학교는 1991년 1월 13일 가이아 이론으로 유명한 제임스 러브록의 강연으로 문을 연다. 걸프 전쟁이 발발하여 학교가 있는 영국 이외의 다른 나라 학생들의 참여가 늦었음에도, 첫 강좌에 학생 25명이 참석하였다. 곧 해외 학생의 참여가 늘어나 개교 첫 해만도 30여 개 나라에서 학생들이 슈마허 학교를 찾았다. 사티쉬 쿠마르는 그때까지 자신이 쌓은 삶의 경험들을 슈마허 학교에 쏟아부었다.

이 책의 번역자는 ‘옮긴이의 말’에서 다음과 같은 속내를 드러낸다. “이 책의 번역 과정 동안 제가 행복한 번역가일 수 있었듯이, 이 책을 읽는 동안 여러분도 행복한 독자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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