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이 낳은 천재 여류 판화가 캐테 콜비츠
Kathe Kollwitz
캐테 콜비츠(Kathe Kollwitz, 1867-1945)는 이 땅의 1980년대 판화운동에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1930년대 콜비츠의 영향으로 목판화의 중흥을 꾀한 중국에 비하면 반세기나 늦은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민족미술협의회가 엮은 『팔십년대 한국민중판화대표작품선』(예술세계, 1989)은 큰 맘 먹고 산 책이지만, 잘 떠들어 보진 않았다. 책의 구입을 망설인 것은 책값이 만만찮아서다. 그 시절 나에게 1만1천원은 꽤 큰 돈이었다. 여기에는 오윤 판화집을 갖고 싶은 본심이 얼마간 작용하였다. 오윤 판화집은 아마도 더 비싸거나 품절돼 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팔십년대 한국민중판화대표작품선』은 1980년대를 대표하는 판화가 오윤을 비롯, 홍성담, 최병수, 주완수, 이철수, 이인철 등 ‘민미협’ 소속 작가 50여 명의 작품을 수록한 판화집이다.
이 책을 일부라도 자주 못 펼쳐 본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나는 비위가 좀 약하다. 대학에 처음 들어간 해의 어느 봄날, 교정을 걷다가 게시판에 붙은 80년 5월 광주 희생자들의 참혹한 사진을 보고 그날 점심을 걸렀다. 그러나 판화집을 거들떠보지 못한 것은 비위가 약해서라기보다는 화가 치밀어 올라서다. 1990년대 초만 해도 이 책이 실린 판화들은 내게 분노를 촉발시켰다. 나는 희귀본, 고가본, 소장본 따위를 그리 탐탐치 않게 여기지만, 어쨌든 이 책은 드물게 비싼 소장용 도서였던 셈이다.
캐테 콜비츠(K?the Kollwitz, 1867-1945)는 이 땅의 1980년대 판화운동에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1930년대 콜비츠의 영향으로 목판화의 중흥을 꾀한 중국에 비하면 반세기나 늦은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런 만큼 콜비츠 예술 작품의 생명력을 입증하는 사례로 볼 수도 있다. 정하은이 엮어지은 『캐테 콜비츠와 노신』(열화당, 1986)은 우리 독자들에게 처음으로 콜비츠의 작품을 접할 기회를 제공한 책이다.
그런데 이 책의 편저자는 미술인이 아니라 신학자다. 그는 “1970년대에 민중문학과 민중신학을 연구하다가 콜비츠의 미술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아마추어 미술 연구자임에도 콜비츠의 작품 세계를 보는 시각이 만만찮다. 정하은은 콜비츠의 그림이 지닌 위력과 특징을 두 가지로 간추린다.
“첫째는 우리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는 이기주의적인 자세를 허물고 남을 위한 존재로서 협력?연대?원조로 나서는 의식의 변화를 일으키게 하는 위력이다.” 곧 메마른 심성의 사람에게 따뜻함과 정의감을 불어넣어 사회혁신에 이르도록 “우리의 행동방향을 돌려 놓고야 만다”는 것이다. 그것은 “통합 승화작용의 극치”인 예술이 가히 “모든 것을 흡수하는 완전미에 가까운 경지”에 이른 상태다.
“다른 또 하나의 위력은 피압박자들”에 대해 역사적 의미를 부여한 점이다. 앞으로의 역사에서 “주인공은 왕이나 귀족이나 독재자가 아니라 바로 고난받는 인간이라고 보고 있는 사실이다.” 정하은은 콜비츠 작품의 주인공을 ‘4대 약자집단’이라 일컫는데, “불안 속에서 삶을 영위하는 가난한 노동자, 엄청난 눌림을 감내하는 부녀자, 의지할 데 없는 어린이, 그리고 민중의 한을 의식하고 그 한을 풀기 위하여 앞장서다가 고난받는 지도자”가 그들이다.
책에 실린 콜비츠의 판화에 대한 작품 설명은 간략하지만 작품의 이해를 돕기에는 충분하다. 1978년 성탄절에 즈음하여 독일 베를린에서 발행되는 일간지 〈타게스 슈피겔〉이 주관한 베를린의 10대 인물 선정 공모에서 “역대의 왕, 장성, 학자, 과학자, 작가, 실업인, 성직자 들을 제쳐놓고 콜비츠가 첫 번째로 선정”된 사실을 전하기도 한다.
또한 콜비츠에 관한 루쉰의 짧은 글 두 편이 눈길을 끈다. 「캐테 콜비츠의 판화」는 『且介亭雜文末編』에 수록된 「캐테 콜비츠 판화선집」의 서문으로 루쉰이 1936년 1월에 쓴 글인데 약전(略傳) 형식을 취한다. 루쉰은 중국과 관련한 콜비츠의 근황을 이렇게 전하기도. “콜비츠는 단순히 자기 주변의 비참한 생활에 대하여 항쟁하는 것으로 머물지 않았다. 중국에 대해서도 항의했다. 그녀에 대한 중국의 냉담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1931년 1월, 6인의 청년 작가가 살해된 후 전세계의 진보적인 예술가들이 연서하여 항의했는데, 그때 그녀도 서명했다.”
루쉰은 또 다른 글인 「深夜記」의 서두에서 1931년 잡지 「北斗」 창간호에 콜비츠의 〈희생〉이 게재된 사연을 전한다. “이 목판화는 살해된 청년 작가 柔石을 기념하기 위하여 내가 잡지사에 보낸 것이다.” 이 글에서도 루쉰은 콜비츠의 근황을 언급한다. “화가 콜비츠는 현재도 부득이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지만, 그녀의 작품은 널리 극동 천하에까지 전파되어 그 전모를 드러내 주고 있다. 그렇다. 인류를 위한 예술은 어떠한 다른 힘으로도 저지할 수 없는 것이다.”
캐테 콜비츠 관련서 네 권은 본문 구성이 비슷하다. 한데 모으거나 분산 배치한 차이는 있어도 하나같이 이미지 자료의 비중이 높다. 사진 자료가 적잖은 평전을 제외한 나머지 책들의 이미지 자료는 모두 콜비츠의 작품이다. 한 권만으로도 콜비츠의 작품은 얼추 감상이 가능하지만, 작품은 전모는 네 권을 통틀어야 파악할 수 있다. 무슨 연유에선지 각권마다 특정한 연작 시리즈의 한 편을 빼놓아서다.
또, 『캐테 콜비츠와 노신』을 포함한 네 권에는 모두 제목에 콜비츠의 이름이 들어 있다. 세 권은 아예 그녀의 이름을 표제로 한다. 이름 표기가 약간 다른 카테리네 크라머의 『케테 콜비츠』(이순례?최영진 옮김, 실천문학사, 1991)는 작가작품론 성격을 띤 평전이다. 독일 로볼트 출판사의 유명한 전기물인 ‘로로로 시리즈’로 나온 것을 우리말로 옮겼다.
그리 길지 않은 분량에다 사진 자료와 콜비츠의 미술 작품을 적절히 배열한 이 책은 콜비츠 입문서로 알맞다. 카테리네 크라머는 “‘함께’라는, 공동체적 감정을 강하게 풍기는 단어”에 콜비츠의 인간성과 작품의 성격이 확연하게 드러난다고 본다. 또 콜비츠에겐 “인간, 인간이 작품의 중심이다. 인간이 작품을 철저하게 지배한다”고 덧붙인다. “풍경화나 정물화 따위는 콜비츠의 작품목록에 들어 있지 않다.” 다시 말해 “인간은 거기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세잔의 요구와는 다르게 콜비츠는 이렇게 생각했을 거라는 것이다. “인간은 거기에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녀의 작품은 본질적인 것에 집중한다.
칸트의 고향이기도 한 쾨니히스베르크 태생으로 슬라브적 기질을 타고난 콜비츠에게 “프랑스적 형식감정은 아주 희박하다”는 지적도 유의할 대목이다. 프랑스가 현대 예술의 주도권을 쥐고 있다는 점에서, 콜비츠를 완강하게 무시한 프랑스의 태도는 그녀가 시류영합형 인물이 아니라는 점을 입증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콜비츠와 프랑스 화가 툴루즈 로트렉(1864-1901)이 동년배라는 사실은 좀 의아하다. 로트렉의 연배가 훨씬 높아 보이니 말이다. 그만큼 콜비츠는 젊고 현대성을 담지했다는 건가?
아울러 카테리네 크라머가 설명하는 콜비츠의 목판화 작품과 석판화 작품의 차이점도 의미 있게 다가온다. “목판화에서는 고발한 반면 석판화에서는 행동을 유발하였다.” 목판으로 만든 「프롤레타리아트」 연작에서는 극단적인 빈곤 상황을 간결하게 묘사했으나, 1933년 이전의 석판화에서는 투쟁, 연대, 행동을 강하게 호소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대비는 콜비츠가 제작한 두 가지 판화 형식이 끼친 영향을 통해 더욱 분명해진다.
석판화 “작품들이 사회주의 리얼리즘 특히 1945년 이후 동독 예술의 촉매제가 되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케테 콜비츠의 목판화는 그와 반대로 공산화된 중국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켜 그 결과 수세기 동안 잊혀져 있던 목판화의 전통이 새로운 정권과 함께 부활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1980년대 우리에게 영향을 준 콜비츠의 목판화는 고발과 선동의 측면이 섞여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굳이 양 측면의 경중을 가린다면 선동의 요소가 더 강했다.
한편, 이 책에 인용된 콜비츠의 발언을 감안할 때 그녀와 중국 목판화는 일방적인 전달이 아니라 상호작용을 하였다. “‘실재하는 현실’은 항상 비사실적입니다. 중국 목판화가 얼마나 분명하고 진실된가를 보십시오. 당신은 이렇게 말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렇다면, 전시된 그 어머니를 본 베를린의 한 말괄량이 아가씨가 ‘이건 중국의 중 나부랭이’라고 말한 것이 우연이겠는가?” 다음은 카테리네 크라머가 내린 이 책의 결론이다.
“케테 콜비츠 역시 홀로 섰다. 나아가 그녀는 장차 사회주의 시대가 도래하여 예술들이 다시 재통합되기를 희구하였다. 그녀의 예술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새로운 휴머니스트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불신의 시대, 인간 개개인이 위협받는 이 사회에서 예술이란 (것이) 도대체 있을 수 있는가? 아니면 예술을 생산해내는 사회가 기형적이라고 해서 그것을 그대로 그려냄으로써 휴머니즘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가? 케테 콜비츠는 두 시대 사이에서 살았던 사람이다. 그녀는 사람들이 아직은 통일적으로 살끼고 있었던 전통에 뿌리를 박았다. 따라서 대체로 어두운 분위기를 지니는 그녀의 예술로부터 도전적인 힘이 분출되어 나오는 것이다.”
민혜숙의 『케테 콜비츠- 죽음을 영접하는 여인』(재원, 1995)은 작가론이다. 민혜숙은 부제가 말하듯 콜비츠의 작품에 나타난 죽음과 그녀의 자화상에 주목한다. “‘죽음’에 대한 그의 천착은 집요하다고 할 정도다. 그리고 보는 이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그의 그림을 보면 인간이면 누구나 맞게 되는 죽음이 이보다 더 절실하게 그려질 수 있을까 싶은데, 죽음을 맞이한 사람이 공포에 질린 모습으로 그려지는가 하면 또 어떤 경우에는 죽음에 순응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등으로 죽음에 대한 태도가 다양하게 보여지고 있다.”
자신의 얼굴을 담은 작품을 100여 점 남긴 콜비츠는 렘브란트에 준하는 자화상 화가로 평가받는다. “콜비츠는 표현대상을 외적으로 파악하지 않고 그 대상 속으로 들어가서 자기 것으로 만든 다음 형상화하는 작가라고 할 수 있는데 이같은 과정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이 자화상일 터이고 따라서 콜비츠의 자화상은 여타 작가들의 자화상과는 또 다른 깊은 여운을 남긴다.”
또한 “콜비츠는 어느 작가보다도 그림을 통해서 자신의 감정을 거의 완벽하게 보는 이에게 전해주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녀의 작품이 자기가 살았던 한 시대를 충실하게 표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작품들이 그 시대를 넘어 지금에까지 호소력을 지닐 수 있는 것은 바로 작가가 특수한 현실 내지 대상을 통해서 보편적인 인간의 감정을 자극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런데 “콜비츠는 자신의 이야기를 억압당하는 직조공들의 시각에서만 착상을 했으며 그들의 적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정치적인 적의 존재는 오직 직조공들의 얼굴과 몸짓을 통해서만 전달될 뿐이다. 이같은 간접적인 방식으로 해서 변증법적인 관계는 그것이 직접적인 대결로 표현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날카롭게 표현되어진다”는 민혜숙의 견해는 카테리네 크라머의 그것과 상충한다. “케테 콜비츠의 작품은 우리에게 어떤 변증법적 과정을 경유하도록 이끌지 않는다. 명확한 진실을 제시하고 우리에게 바로 동일화할 것을 요구한다. 전적으로 직조공들 편에 서서 묘사한다.”
『캐테 콜비츠』(전옥례 옮김, 운디네, 2004)는 콜비츠의 작품세계와 사상의 진경을 보여준다. 먼저 콜비츠의 작품을 100쪽 남짓에다 담았다. 내게 가장 인상적인 「낫의 날을 세우면서」의 동판화 초안도 볼 수 있다. 이 작품의 완성작은 정말 대단하다. 귄터 팀의 해설 「여덟 개의 소묘」는 독자를 콜비츠의 작품세계로 인도하는 충실한 길잡이다. “그 당시 독일의 예술로 떠받들여지던 것들은 오늘날 대부분 잊혀졌다. 하지만 현재까지도 캐테 콜비츠의 작품은 힘찬 상승기류를 타고 있다.”
다음은 콜비츠의 일기가 우리를 영접한다. 이 책에는 콜비츠의 작품 80여 점과 이에 대한 해설이 들어 있지만, 콜비츠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 이듬해 출간된 일기 선집의 색채가 더 짙다. 이 책은 콜비츠가 남긴 1천7백 쪽에 이르는 10권 분량의 일기 중에서 일상적인 얘기를 제외하고 주제별로 엮은 것이다. 콜비츠는 마흔 한 살 때인 1908년 9월 18일부터 세상을 떠나기 이태 전인 1943년 5월 7일까지 35년에 걸쳐 꾸준히 일기를 썼다.
카테리네 크라머는 콜비츠의 일기를 이렇게 묘사한다. “두꺼운 일기장 열 권을 아름다운 글씨체로 가득 채운 것이다. 그녀는 여백을 남기지 않았으며 고른 필체로 주저하거나 고친 흔적이 없이 힘이 들어 있고 명쾌하며 고전적인 언어를 적어내려갔다. 1910년부터 이 일기는 케테 콜비츠에게 없어서는 안될 파트너가 되었다. 다른 사람에게는 거의 털어놓지 않는 많은 것을 여기에서 털어놓고 있다.”
하지만 1차 대전에 참전한 둘째 아들 페터의 전사 통지를 받은 1914년 10월 30일의 일기는 단 한 줄에 그친다. “댁의 아드님이 전사했습니다.” 물론 페터를 잃은 슬픔과 연민의 감정은 이후 일기의 주요 레퍼토리가 된다. 아무튼 일기에서 몇 구절을 옮긴다.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서 잔치를 한다.”(1913년 6월)
“순수한 아틀리에 예술은 쓸모가 없다. 사라져갈 뿐이다. 살아 있는 뿌리를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1916년 2월 21일)
“누구나 자신을 마음껏 펼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운명이 우리에게 닥치기 전의 상태로 머물 수는 없다. 단 한 번에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더라도, 결국에는 천천히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아주 진지하게, 아주 무겁게 새해로 들어선다. 간절히 바라는 것은 오직 평화뿐.”(1916년 1월 2일)
김수영 시인의 산문이 “그가 만일 단 한 편의 시를 쓰지 않았다고 해도 우리 문학사에서 일정한 자리를 차지할 만한 산문가였음을 웅변해준다”는 표현이 가능하다면, 캐테 콜비츠의 일기는 그녀가 단 한 점의 판화를 새기지 않았더라도 세계 문화사의 한 획을 그은 증거로 충분하다. 콜비츠 관련서 네 권은 그 이야기를 백 번 듣느니 한 번 들춰봄이 훨씬 유익한 책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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