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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세 살 때 연애에 이미 정통한 사람

알랭 드 보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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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떤 책을 읽어 마땅한 시기가 있다기보다는 그 책이 읽힐 적당한 시기가 있다고 생각한다. 알랭 드 보통은 이에 대한 적절한 사례의 하나로 여겨진다.

이 글은 필자가 121번째로 쓰는 해외 저자의 번역서 리뷰다. 작년 12월 재개한 ‘채널 예스’의 연재를 칼럼으로는 16번째이나, 책으로 엮은(『책으로 만나는 사상가들 1 ? 2』) 105개를 합쳐서 그렇다. 그런데 작가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 1969- )은 지금까지 대상 인물의 한국어판 저서를 중심으로 리뷰한 해외 사상가, 예술가, 저자 120명과 다른 점이 있다.

그의 성별, 국적, 인종, 직업 같은 것이 그간 다룬 인물들에 비해 특별날 건 없다. 알랭 드 보통의 다른 점은 나를 기준으로 한 것이다. 그는 나보다 나이가 어린 최초의 리뷰 대상이다. 그것도 두 살이나 아래다. 누가 한국 사람 아니랄까 봐 나이를 따진다 하겠지만 사실이 그런 걸 어찌하랴!

그나마 머리가 벗겨진 그의 요즘 모습에서 위안(?)을 삼고 싶은데, 그것마저 동안(童顔)이다. 오히려 머리숱이 꽤 무성한 10년 전의 얼굴이 나이 들어 보인다. 궁금하신 분은 1990년대 중반 번역된 『로맨스- 사랑에 대한 철학적 모험』(김한영 옮김, 한뜻, 1995)과 『섹스, 쇼핑 그리고 소설』(김한영 옮김, 한뜻, 1997)의 책 날개에 있는 저자 사진을 확인하시라. 도서관에서 운이 닿아야 가능한 일이기는 하지만.

나는 어떤 책을 읽어 마땅한 시기가 있다기보다는 그 책이 읽힐 적당한 시기가 있다고 생각한다. 알랭 드 보통은 이에 대한 적절한 사례의 하나로 여겨진다. 1990년대 중반 번역된 그의 책 두 권은 책을 펴낸 출판사의 폐업과 함께 절판되었다. 이 출판사는 첫 책이 밀리언셀러가 되면 망한다는 속설의 희생양이 된 경우지만, 첫 책의 대박 덕분인지 읽을 만한 번역서를 여러 권 펴내기도 하였다.

국내 독서계에서 알랭 드 보통은 2002년에 들어서 본격적으로 읽히기 시작한다. 그 시발점이 된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정영목 옮김, 청미래)는 『로맨스』를 재번역한 것이다. 그러니까 알랭 드 보통은 다시 읽히는 셈이기도 하다. 『섹스, 쇼핑 그리고 소설』도 ‘은행나무’를 통해 다시 나온다고 한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의 책등과 표지에는 친절하게도 제목 위에다 “소설”이라는 장르의 정체성을 밝히고 있다. 원제목(Essay in Love)에서 오는 혼란을 방지할 목적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알랭 드 보통의 책들은 대체로 장르의 경계가 모호하고 헷갈린다. 소설은 수필 같고, 에세이는 비평서 같다.

알랭 드 보통의 첫 작품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는 현대판 ‘연애론’이다. 이 책은 두 가지 점이 놀라운데, 알랭 드 보통은 불과 스물 셋의 나이에 이 소설을 썼다. 또한 그러면서도 연애의 이모저모에 달통하고 있다. 가슴앓이의 시작부터 말이다. “사랑에 빠지는 일이 이렇게 빨리 일어나는 것은 아마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사랑하는 사람에 선행하기 때문일 것이다.”

큐피드의 화살을 맞고 나서 행동을 취하는 단계에 대한 묘사도 그럴싸하다. “구애란 연기의 한 형식으로, 자연스러운 행동에서 청중에 의하여 결정되는 행동으로 옮겨가게 된다.” 또 “구애의 어느 시점에서 배우는 관객을 잃을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 애인의 이별 선언을 들은 화자(話者) ‘나’의 심리상태가 요동치는 것은 이야기 전개에서 돌발적이고 부자연스러워 보이나, 새로운 연인을 만나 실연의 아픔을 치유하는 결말은 자연스럽다.

알랭 드 보통은 편협함에서 벗어나게 하는 재료로 “유머 감각”을 꼽는다. 이 책의 우리말 옮긴이는 ‘역자 후기’를 통해 알랭 드 보통의 매력으로 수준급의 재치와 유머를 든다. “다만 웃음을 터뜨리기 위해서는 상당한 지적 노력이 따라주어야 하고, 앞서 말했듯이 바로 이 점이 이 책의 매력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알랭 드 보통의 매혹적인 가벼움과 재치를 느낄 여지가 별로 없었다. 내용에 집중할수록 되레 심각해졌다. 게다가 제6장 「마르크스주의」에서는 알랭 드 보통이 마르크스의 사랑론을 오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내가 좋아하는 사랑과 관련한 마르크스의 성찰이 떠올랐다.

“만일 그대가 사랑을 하면서도 상대방의 사랑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면, 다시 말하자면 그대의 사랑이 사랑으로서 발현되면서도 상대방의 사랑을 산출하지 못한다면, 그리하여 그대가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그대의 삶을 표현했는데도 이를 통해 그대를 사랑 받는 인간으로 전화시키지 못한다면, 그대의 사랑은 무력한 사랑이요 하나의 불행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경제학 철학 수고(手稿)』에서)

그래도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에서 추출되는 문장들은 사랑의 아포리즘으로 부족함이 없다.

“자신이 다른 사람의 사랑의 대상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만큼 기쁘면서도 무시무시한 일은 드물다.”
“사랑의 말을 보낸다는 것은 불완전한 송신기로 암호화된 메시지를 타전하는 것과 같다.” “사랑은 자명하지 않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본질적인 평범함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그 광기를 드러낸다.”
“사랑의 가장 큰 결점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비록 잠시라고 해도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1993년에서 1995까지 3년에 걸쳐 해마다 출간된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와 『섹스, 쇼핑 그리고 소설』, 그리고 『키스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 말들』(이강룡 옮김, 생각의나무, 2005)은 사랑의 3부작 또는 연애소설 연작으로 봐도 무방하다. 소설과 에세이의 경계가 흐릿한 형식과, 서사와 기술(記述)이 교차하는 구성이 비슷하지만 등장 인물의 면면도 유사하다. 특히 여자 주인공은 친연성이 있는데,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의 클로이와 『키스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 말들』의 이사벨은 어떤 취향이 닮았다. 소설은 이사벨의 독특한 취향을 이렇게 묘사한다.

바꿔 말해 다른 사람이 있을 때 코에서 어떤 물체를 꺼내려면 재치가 필요하다는 것을 설명해 주기도 한다.

“미안, 내가 그다지 청결한 편이 아니라서.” 소파 위에서 신문을 읽고 있던 나는 뜻하지 않게 이사벨의 그 행위를 목격하고 말았다.
“괜찮아.” 이것이 젖꼭지 세 개 수준에 해당하는 행위인지 잠시 헷갈렸다.“
“그걸로 뭘 하려고?”
“아, 보통 둥글게 굴려서 공을 만들어.”
“그리고?”
“가까이에 휴지통이 있으면 그냥 버리고, 아니면 카펫으로 튕겨버려. 나는 딱딱하게 굳어서 한 덩어리가 된 것을 가장 선호해. 감기 걸렸을 때 완전히 엉망으로 뒤엉켜 있는 건 최악이지. 후벼야 하는지 풀어버려야 하는지 갈등하게 되지. 조금씩 후빌 수도 있는데 그러면 중간쯤에서 부서지거든, 그럴 경우에 제일 좋은 건 잠시 한쪽에 나머지들을 숨겨놓는 거야.”

취향이 독특하기는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의 여주인공도 마찬가지다. “클로이는 침대에 누워서 책을 읽다가 장애물을 제거하기 위해서 콧구멍으로 손을 넣었다가, 장애물을 굴려 공을 만든 다음 바짝 마르고 단단해지면 그것을 한 입에 삼켰다.”

알랭 드 보통은 책과 독서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곧잘 표명하고, 대조와 대구의 표현을 즐겨 한다. 『섹스, 쇼핑 그리고 소설』에서 독서를 ‘자신에게서 도피하는 독서’와 ‘자신을 발견하는 독서’로 구분하는가 하면, 해외 여행자는 ‘관광객’과 ‘여행자’로 나눈다. 관광객은 “놀라움을 싫어하는 성향을 보인다.”

관광객들은 반듯한 피라미드나 상쾌한 해변의 신선함에 끌리기도 하나, 그건 단지 그들의 예상과 일치할 경우에 국한한다. “그들은 회의, 불확실, 애매함을 싫어하고 납득 가능한 분명한 식단을 원해서 처음 보는 카레나 과일, 이국 풍의 정서가 환기시키는 불안감을 소화시키지 못하고 공항에 도착하기 전에 팔걸이의자에 앉아서 생각했던 선입견에 집착한다.”

여행자는 관광객에 견줘 “선입견이 훨씬 적으며 자신의 생각이 그 지역의 조건과 불일치하더라도 그다지 불쾌해 하지 않는다.” 『여행의 기술』(정영목 옮김, 이레, 2004)은 알랭 드 보통의 여행 에세이다. 이 책의 여정을 되밟는 게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이 책이 여행 안내서는 아니다. 알랭 드 보통은 여행의 본질을 탐구하는 듯하다. 예의 그의 여행에 대한 통찰이 빛난다.

“우리는 지속적인 만족을 기대하지만, 어떤 장소에 대하여 느끼는, 또는 그 안에서 느끼는 행복은 사실 짧다.” “여행은 생각의 산파다. 움직이는 비행기나 배나 기차보다 내적인 대화를 쉽게 이끌어내는 장소는 찾기 힘들다.” “우리가 외국에서 이국적이라고 여기는 것은 우리가 고향에서 갈망했으나 얻지 못한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여행은 피상적인 지리적 논리에 따라 우리의 호기심을 왜곡한다.”

흑백으로 인쇄된 것이 좀 아쉽기는 해도 삽화로 쓰인 명화들은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하기에 충분하다. 본문에 내용 일부가 인용된 플로베르의 『기성관념 사전』은 『통상 관념 사전』(진인혜 옮김, 책세상, 2003)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어판이 나와 있다.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 알랭 드 보통의 유쾌한 철학 에세이』(정명진 옮김, 2005)도 다시 나온 책이다. 개정판이다. 이 책의 간기는 초판 발행일을 명기하고 있는데, 초판 제목은 『드 보통의 삶의 철학 산책』(정진욱 옮김, 생각의나무, 2002)이다. 그런데 한국어판 제목은 둘 다 원서의 그것과는 거리가 있다. 유쾌하게 철학을 산보하는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책의 골간은 원제목에 가깝다. ‘철학의 위안(The Consolations of Philosophy)’.

이 책에서 알랭 드 보통은 ‘위안’을 화두로 소크라테스, 에피쿠로스, 세네카, 몽테뉴, 쇼펜하우어, 니체의 삶과 생각을 깔끔하게 요약한다. 나는 소크라테스, 에피쿠로스, 몽테뉴, 이 세 명의 철학자에게 주목했다. ‘인기 없음에 대한 위안’이라는 타이틀이 붙은 소크라테스 편은 이 철학자의 죽음을 비중 있게 다루는데 이건 어찌 보면 불가피한 일이다.

저 유명한 소크라테스 재판의 배심원은 모두 500명이었다. 이 중 “220명은 소크라테스의 무죄를, 280명은 유죄를 결정했다.” 소크라테스의 최후 변론에 이어 내려진 2차 평결에서는 배심원 360명이 그를 사형에 처하길 바랐다. 그런데 알랭 드 보통은 배심원의 전문성에 이의를 제기한다.

“법정에 앉아 있던 배심원들은 전혀 전문가들이 아니었다. 그들 가운데는 늙은이와 상이군인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손쉽게 부수입을 올릴 수 있는 수단으로 배심원을 노리던 사람들이었다.” 소크라테스 재판 배심원단의 일부가 ‘동원된 군중’이거나 ‘우매한 대중’이라는 얘긴데, 이건 알랭 드 보통의 본질 흐리기가 아닌가 싶어 유감이다. 하지만 더욱 유감스러운 것은 소크라테스의 생각이다.

“모든 이의 의견을 다 존중할 필요없이 단지 몇 명만 존중하고 다른 사람들의 의견은 무시해도 된다는 사실, 훌륭한 의견은 존중하되 나쁜 의견은 그렇게 하지 않아도 좋다는 사실, 그건 참 멋진 원칙이라고 자네는 생각하지 않는가? 훌륭한 의견은 이해력을 가진 사람들의 것인 반면, 나쁜 의견은 이해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의 것이지…”

해석하기 나름의 발언으로 볼 수도 있으나, 철학의 대명사인 소크라테스가 기껏 엘리트주의자였다니. 소크라테스의 엘리티즘에 대한 비판은 최근 출간된 박홍규 교수의 『소크라테스 두 번 죽이기』(필맥)로 대신하련다. 그것도 급한 대로 한겨레신문의 ‘한겨레 책?지성 섹션’의 관련기사로 대체한다(2005년 7월 29일자).

반면, 에피쿠로스와 몽테뉴에 대한 알랭 드 보통의 해석과 평가에는 불만이 없다. 알랭 드 보통은 소크라테스와 마찬가지로 에피쿠로스도 제대로 보게 한다. 차이라면, 알랭 드 보통이 요약한 에피쿠로스와 그의 쾌락주의의 실상은 사뭇 긍정적이다. 알고 보니, 에피쿠로스는 꽤나 반체제적이었고, 소박함을 옹호하였다. 에피쿠로스가 행복해지는데 자연스럽지도 않고 불필요한 것으로 ‘명성’과 ‘권력’을 지목한 것은 단적인 예다.

미뤄 짐작했던 우리 사회에서 힘깨나 쓴다는 자들의 추악한 거래가 사실로 드러난 지금, 고대 현자의 혜안과 탁견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에피쿠로스 편의 제목은 ‘충분한 돈을 갖지 못한 데 대한 위안’이다. ‘부적절한 존재에 대한 위안’을 표제로 하는 몽테뉴 편은 초장부터 내 맘에 쏙 든다. 독서를 삶의 큰 위안으로 삼은 몽테뉴의 고백부터 말이다.

“은퇴 이후로 독서가 나를 위로한다. 독서는 괴롭기 짝이 없는 게으름의 짓누름으로부터 나를 해방시켜 준다. 그리고 언제라도 지루한 사람들로부터 나를 지켜 준다. 고통이 엄습할 때도 그 정도가 매우 심하거나 극단적이지만 않다면 그 날카로운 예봉을 무디게 만든다. 침울한 생각으로부터 해방되려면 그냥 책에 기대기만 하면 된다.”

『프루스트를 좋아하세요』(지주형 옮김, 생각의나무, 2005)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기대어 프루스트의 삶과 문학을 조명하면서, 우리네 삶을 이야기하는 책이다. 알랭 드 보통은 ‘너무 빨리 하지 마세요’를 프루스트적인 표어로 간주한다. “너무 빨리 하지 않으면 생기는 이점은, 그러는 도중에 세상이 더 재미있어진다는 것이다.” 또한 프루스트는 작가는 뜻밖의 읽을거리를 즐긴다고 주장했다 한다.

알랭 드 보통의 책들은 그리 두껍지 않다. 대개 300쪽 안팎이다. 판형도 작은 편이고, 분절 형태의 구성에다 인용문 또한 적지 않아 가독성이 우수하다. 그렇다고 단숨에 읽히는 것도 아니다. 밑줄을 긋느라 독서의 흐름이 끊겨서일까, 아니면 읽는 도중 문득문득 생각할 거리가 생겨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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