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와 정치란 바로 이런 거라네
철학자 페르난도 사바테르
윤리와 도덕은 나의 주요 관심사 가운데 하나다. 그렇다고 내가 ‘도덕가’연 하는 건 아니다. 윤리?도덕과 관련한 내 정체성을 살피던 중, 에리히 케스트너에 대한 평전에서 그 해답을 얻었다.
윤리와 도덕은 나의 주요 관심사 가운데 하나다. 그렇다고 내가 ‘도덕가’연 하는 건 아니다. 윤리?도덕과 관련한 내 정체성을 살피던 중, 에리히 케스트너에 대한 평전에서 그 해답을 얻었다. 나는 ‘모랄리스트’에 가까운 부류다. 나는 윤리책에도 관심이 많다. 이것 역시 문자향(文字香) 짙은 ‘수신서(修身書)’나 예전의 ‘국민윤리’ 교재는 해당 사항이 아니다.
스페인의 철학자 겸 작가인 페르난도 사바테르(Fernando Savater, 1947- )의 『청소년을 위한 이야기 윤리학』(안성찬 옮김, 웅진닷컴, 2005)은 내가 원하는, 내 입맛에 딱 맞는 그런 윤리책이다. 사바테르는 책머리에서 “이 책은 청소년을 위한 윤리학 참고서가 아니”라고 말한다. “역사상 가장 중요한 도덕 이론이나 이를 대표하는 인물들에 대한 내용을 전혀 담고 있지 않”아서다.
또한,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쟁점들에 대해 도덕적인 해답을 제시하지도 않는다. 그는 “윤리학이 어떤 쟁점에 대하여 대답해줄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윤리학은 토론의 시작을 돕는 촉매여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의 목표는” 사바테르의 윤리(학)관에 맞아떨어진다. 그것은 “‘올바르게’ 생각하는 시민을 만들어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정신적 건강을 돕는 데 있다.”
사바테르는 “이 책은 결코 책 이상의 것이 되고자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또 “이 책은 개인적이고 주관적이”며, “자라나는 이들을 위한 것이기에 아마도 그들을 가르치는 이들에게는 새로운 것을 그다지 많이 알려주지 못할” 거라 덧붙인다. 겸손의 말이다. 책의 말미에서 사바테르는 비트겐슈타인을 인용하면서 “이 책을 막 끝낸 지금 무언가를 날려버리는 폭발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고 내가 사랑하는 낡은 책들도 유감스럽게도 원래의 모습 그대로 서재의 서가에 꽂혀 있다”고 너스레를 떨지만, 이 또한 겸양의 표현이다.
내가 읽은 바로는, 이 책 만한 윤리학 책을 아직 접하지 못했다. 적어도 윤리학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틔우는 점은 출중하다. 원제목(Etica Para Amador, 아마도르를 위한 윤리학)이 말하듯, 책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을 취한다. 그럼 지금부터 아마도르의 아버지, 사바테르의 윤리학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자.
그런데 사바테르는 프롤로그에서 좀 세게 나온다. 독자의 기를 죽이려는지, 아니면 무장을 해제시키려는지. 예화로 소개된 그의 친구가 겪은 일은 섬뜩할 정도다. ‘아이들의 최고의 친구’임을 자부하는 아버지들에게도 한 방 날린다. “내가 만일 다시 열다섯 살이 된다면 너무 많이 공감하려고 하는 어른, 나보다 더 젊어 보이려 하는 어른, 내가 옳다고 말해주는 모든 어른을 믿지 않을 거다.”
그러면서 아들에게 ‘너희 젊은 친구들이 최고야’ 하거나 ‘나도 너희처럼 젊다고 느낀단다’ 또는 이와 비슷한 헛소리를 지껄이는 어른을 조심하라고 충고한다. “그처럼 많은 아첨에 는 항상 다른 의도가 숨어 있는 법이다. 올바른 아버지나 선생님은 어느 정도 성가실 수밖에 없는 거란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사람이다.”
사바테르가 말하는 윤리학의 핵심은 ‘자유’, 곧 ‘네가 원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사바테르는 먼저 자유의 성격 두 가지를 설명한다. “첫째로,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을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에 이렇게 혹은 저렇게 대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자유롭다.” 둘째로는 “어떤 것을 시도하는 자유는 그것을 확실히 이루는 것과는 무관하다.”
다시 말해, 자유는 이런 것이다. “내 의지에 달려 있는 일들이 있지만(이는 자유롭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일이 내 의지에 달려 있는 것은 아니다(그렇지 않다면 나는 전지전능할 것이다).” 아마도르가 매스 미디어의 영향과 정치인의 술책에다 테러리즘의 위협, 여기에다 돈까지 없는데 어찌 자유로울 수 있겠느냐는 사람들의 한탄을 접할 거라 예상한 사바테르는 그의 아들에게 다음과 같이 조언한다.
“네가 조금만 주의를 기울인다면 한탄하는 듯이 말하는 그 사람들이 실제로는 그들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에 매우 만족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게다. 그들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휴, 큰 짐을 덜었군! 자유롭지 못한 덕분에,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해 책임지지 않아도 되잖아.’”
사바테르는 “우리가 행하고 있는 일에 주의를 기울여 우리로 하여금 올바르게 행동할 수 있도록 해주는 삶의 지혜 혹은 삶의 기술을 윤리학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윤리학이 다루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로서의 자유는 “결단을 내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자유는 자신을 충동에 내맡기는 것과 완전히 반대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사바테르는 아들에게 이런 충고를 한다. “자신을 충동에 내맡기지 않으려면 네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적어도 두 번은 곰곰이 생각해야 한다. 그래, 아무리 머리가 아플지라도 적어도 두 번은.”
또한 “윤리학은 더 나은 삶을 살려는 이성적 시도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데 “인간으로서 산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인간화는(우리를 우리가 원하는 것, 즉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언어와 마찬가지로 상호적인 과정이라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사바테르는 양손에 물건을 들고 있어 가려움을 참아야 하는 상황을 상정한다. 나는 이걸 양손이 자유로워도 손이 닿지 않는 부분은 누군가의 손을 빌려야 한다는 뜻으로 확대해석하고 싶다. 단, 이 때 타인의 도움은 ‘자발적인 등 긁어 주기’여야 한다.
한편,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멋진 삶이 어디에 있는지를 찾아내는” 것이 윤리학의 목표이고, 참다운 이기주의자가 윤리적 인간이며, “윤리학의 전문 영역은 인간적인 삶을 사는 방법, 인간들 속에서 멋진 삶을 사는 방법에 대한 것이다.” 또한, “윤리학의 핵심은 인간의 삶이 가치가 있다는 것, 심지어 삶의 노고조차 가치가 있다는 것을 역설하는 데 있다.” 노고가 가치 있는 까닭은 이걸 통해 삶의 즐거움에 이르러서다.
지금 나는 이 책의 내용을 단순 요약하고 있지만, 책은 분량에 견줘 아주 풍부한 내용을 담았다. 이야기를 풀어 가는 사바테르의 탁월한 솜씨 덕분에 책 읽는 재미도 맘껏 누릴 수 있다. 사바테르는 우리가 늘상 접하는 어휘를 독특하게 정의하는데 그 몇을 보면,
“중용은 즐거움과 지적인 우정을 나누는 것이다.”
“기쁨이란 삶에 대한 자발적인 긍정이다.”
“도덕적으로 미성숙한 것의 반대는 양심을 지니는 것이다.”
“책임이라는 말은 나의 모든 행동이 나를 구성하고, 규정하고, 만들어냄을 뜻한다.”
쉽게 접하는 어휘는 아니지만, “진정한 이기주의자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최선의 것을 원하는 사람이다.”
이 책의 각 장의 말미는 ‘읽어두면 좋은 글들’이 장식한다. 개별 장의 내용과 관련 있는 인용문 두서넛을 나열하는데, 6장에 놓인 에리히 프롬의 『정신분석학과 윤리학』 발췌문은 『논어』의 구절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勿施於人)’과 일맥상통한다. “다른 사람이 네게 하기를 바라지 않는 행동을 다른 사람에게 행하지 말라는 것이 윤리학의 근본 원칙 중 하나다. 똑같은 자격을 가지고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하는 행동을 너 자신에게도 하라.’” 7장의 본문에는 이를 비튼, 버나드 쇼의 언명이 나오기도. “사람들이 네게 해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을 다른 어떤 사람에게도 행하지 말라. 취향은 가지각색이니까.”
책을 마무리짓는 9장은 윤리와 정치를 다룬다. 이 장에서 사바테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정치적 현실과 사회적 제약을 핑계 삼아 멋진 삶의 추구를 방기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들에 굴하지 말라는 적극적인 해석도 가능하다. 그리고 명심할 것. “윤리학은 우리 자신의 삶을 더 낫게 만드는 데 기여하는 것이지 이웃사람들을 뛰어난 말솜씨로 비판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책은 『꿈이 있는 십대는 바람처럼 자유롭다』(민용태?민용재 옮김, 중앙일보사, 1994)는 제목으로 나왔었다. 모르긴 해도 첫 번역이 널리 읽힌 것 같진 않다. 길쭉한 포켓판형이 뻘쭘한 게 손길을 덜 탔을지 싶다. 게다가 나는 어떤 책을 읽어 마땅한 때가 있다기보다는 그 책이 읽힐 적절한 시기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의 경우, 지금이 그럴 때다. 또한 새로운 번역, 무엇보다 새로운 편집의 신판이 한결 잘 읽힌다. 구판은 구하기도 어렵지 않은가.
헌책방에서 구입한 『정치가 뭐길래』(진인혜 옮김, 진미디어, 1996)는 재출간해야 할 책이다. 이 책의 원제는 Politica Para Amador로 ‘아마도르 시리즈’ 또는 ‘이야기 윤리학’의 속편으로 볼 수 있다. ‘더 읽어볼 글귀 몇 토막’이 들어 있는 식의 구성이 같은 데다 윤리에 대한 언급으로 말문을 여는 것은 이어달리기의 바통 주고받기를 연상시킨다.
“윤리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관점에서 각자 주어진 순간마다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퇇 방식일뿐, 그것을 남한테도 최고로 만족스러운 삶의 방법이라고 설득할 수는 없단다. 그러니까 윤리에서 중요한 것은 결국, 각자 자기 자신과 화합해서, 바로 지금 여기서, 행동을 취하는 지혜와 용기를 갖는 거라고 말할 수 있지.”
‘이야기 윤리학’의 표어가 “네가 원하는 일을 해라”라면, 이 책의 핵심어는 “바보가 되지 말라”이다. 다른 점이라면 이번에는 사바테르가 그의 아들에게 좀더 주의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이 책은 결코 가벼운 내용이 아니야. 나는 이 책을 쓰면서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좀더 주의를 기울여다오.” 독자들께서는 걱정 마시길. 한국어판 서문에서는 “이 책은 아주 쉽고 간단명료한 책”이라 자평하니까.
그래도 전편과 속편의 비슷한 점이 더 많다. 일례로 ‘진짜 사회적인 사람’은 ‘진정한 이기주의자’와 같은 맥락을 지닌다. “진짜 사회적인 사람들은 너무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사회에 참여하는 사람들이야.” 사바테르가 “복종하는 이유와 복종하지 않는 이유를 모두 다 합한 총체”로 보는 ‘정치’의 목적은 “투쟁을 진정시키고, 종합 및 분류하여 하나의 요식행위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페르난도 사바테르의 한국어판 두 권은 청소년용이다. 그렇지만 어른이 읽기에도 부족함이 전혀 없다. 오히려 적극 권장할 만하다. 늦게라도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고 싶고, 바보가 되고 싶지 않은 분께는 더욱. 그리고 사바테르의 미번역서가 속속 우리말로 옮겨지면 좋겠다. 사바테르는 유머를 강조하는데 『정치가 뭐길래』의 커버 표지 사진을 보면, 외모부터 좀 웃기게 생겼다. 당사자여, 무례를 용서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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