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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 시대의 여행가, 여행 작가, 베스트셀러 저자

이사벨라 버드 비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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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벨라 버드 비숍(Isabella Bird Bishop, 1831-1904)에게 식민 지배의 첨병이나 첩자의 꼬리표를 붙이는 것은 부당하다.

브루스 커밍스가 그의 논문 「경계의 해체: 냉전과 탈냉전 시대의 지역학과 국제학」에서 지적한 대로, 두 학문은 냉전의 산물이라는 의심을 사기에 충분하다. “M. 번디의 말대로 지역학의 토대는 OSS(미 전략사무국)와 그것을 뒤이은 CIA(미 중앙정보국)와 같은 정보기관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는 것이 더 진실에 가깝다.” 초창기 국제학 연구의 거점인 미국 메사추세츠 공대(MIT)의 국제연구센터(CENIS)도 CIA의 지원을 받았다.

인류학의 출발 역시 그리 떳떳치 못하다. 인류학은 제국주의가 식민 지배를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었고, 2차 대전 중에는 정보 수집 활동에 기여하기도 했다. “일본 사회의 핵심가치와 그러한 가치가 전쟁 중이나 전쟁 후 미국 점령시 일본인의 행동에 미치는 영향을 탐구한” 루스 베니딕트의 『국화와 칼』은 그 대표적 사례다.

또한 “베니딕트는 색다른 방식으로 전시체제에 기여하기도 했다. 그녀는 웰트피시(Gene Weltfish)와 함께 1943년 『인류의 인종』이라는 제목의 10센트짜리 반인종주의 소책자를 만들었다. 나치의 인종정책과 미국 내 인종간의 갈등에 직면하여, 그리고 미군이 전 세계에서 전투를 치르게 되면서 인종은 가장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었다. 베니딕트와 웰트피시는 인종에 대한 당시의 과학적 견해들을 요약하고, 문화적 차이와 비교해볼 때 인종적 차이는 미미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제리 무어의 『인류학의 거장들』에서)

한편, 미군이 이 소책자를 배포하기로 결정하자, 미 의회의 어느 보수파 의원이 그것을 ‘공산당 선전’이라고 몰아세웠다. 이 명백히 어리석은 비방 덕분에 소책자는 75만가 부 넘게 팔렸다고 한다.

그러면, 지리학과 여행가의 기원은 어떤가? 여기도 문제가 다분히 있다. 지리상의 발견은 식민지 개척이나 다름없었다. 콜럼버스, 마젤란, 바스코다가마, 엔리케 왕자, 아메리고 베스풋치, 제임스 쿡 선장 같은 모험가는 다들 식민지 개척의 첨병이었다. 어릴 적 위인전에서 만난, 지금 생각하면 가슴 졸이며 읽은 것이 억울한, 아프리카에서 길을 잃은 리빙스턴과 그를 찾아 나선 스탠리는 비교적 근자의 식민지 탐사꾼인 셈이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Isabella Bird Bishop, 1831-1904)에게 식민 지배의 첨병이나 첩자의 꼬리표를 붙이는 것은 부당하다. 하지만 이사벨라 버드 비숍이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세계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탁월한 여행기를 남긴 데는 그녀가 대영 제국 전성기의 신민임을 간과하기 어렵다. 물론 그녀의 남다른 재능도 무시할 순 없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여행가이면서 베스트셀러 저자다. 1854년 23살의 나이에 캐나다와 미국 각지를 여행하고 쓴 『미국의 영국 여인』이 45쇄를 기록하며 1856년 영국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된다. 어릴 때부터의 병약함과 젊은 시절의 우울증으로 인하여 그녀는 한동안 집필을 중단한다. 20년만에 펴낸 책들이 다시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본격적인 여행 작가의 길로 들어선다. 이를 두고 그녀의 한국 여행기를 번역한 이인화는 “세계를 주유(周遊)하며 투자를 모색하던 영국 중산층의 지적 욕구에 힘입어 커다란 대중적 호응을 얻었다”고 풀이한다.

그런데 그녀가 세계 여행을 하게 된 계기가 흥미롭다. 우울증과 어지럼증에 시달리던 그녀에게 의사가 여행을 처방했던 것. 좀더 자세한 정황을 알려주는 일설에 따르면, 의사는 그녀에게 배를 타고 장거리 여행을 권유했다는 것이다. 하여간 여행을 다니면서 그녀의 우울증과 어지럼증은 씻은 듯 사라진다.

“열한 권에 달하는 내 여행기”라는 구절이 말하듯, 『양자강을 가로질러 중국을 보다』(김태성?박종숙 옮김, 효형출판, 2005)는 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열두 번째이자 마지막 여행기다. 이 책은 15개월에 걸친 중국 여행의 대미를 장식하는 후반부 6개월간 양자강과 그 지류를 둘러본 기록이다. 그녀가 이 책에서 보여주려는 것은 “양자강 유역에 펼쳐지는 기이하고 아름다운 풍광과 중국인의 독특한 생활상이다.”

다시 말해, “이들의 완벽한 사회와 상업 조직, 뛰어난 경작 기술, 수단을 목표에 맞추어 조정해 내는 놀라운 통찰력, 지역주의와 지방 분권주의 경향, 전체적인 번영과 풍부한 자원, 권력의 조화와 각 민족의 완전한 독립성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적대감 없이 공정하고 우호적으로 문을 두드리면, “중국 전역의 ‘열린 문’이 우리의 야망을 충분히 충족시켜 줄 것이다”는 구절에서는 대영 제국 신민의 충직함이 읽히기도 한다. 하지만 이사벨라 버드 비숍에게서 제국주의자의 야망 같은 것이 노골적으로 드러나진 않는다. 은혜를 베푸는 자의 위치에 서 있긴 해도 그녀는 중국의 잠재력을 높게 평가한다. 어느 누구도 중국이 무능력하고 쇠퇴한 민족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중국의 우리의 산업 기술과 과학을 받아들인 후에는 강력한 경쟁 상대가 될 국가임에 틀림없다. 중국인이 우리의 화학 기술을 받아들여 지금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은 물질을 만들어내리라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그녀의 우리나라 여행기는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우선, 1960년대 중반 이후 한 세대 가까이 그녀의 이름을 가장 쉽게 접하는 통로는 김수영 시인의 「거대한 뿌리」였다. 이 시의 둘째 연부터 그녀 이름이 나오기 시작한다.

나는 이사벨 버드 비숍여사와 연애하고 있다 그녀는
1893년에 조선을 처음 방문한 영국 왕립지학협회 회원이다
그녀는 인경전의 종소리가 울리면 장안의
남자들이 모조리 사라지고 갑자기 부녀자의 세계로
화하는 극적인 서울을 보았다 이 아름다운 시간에는
남자로서 거리를 무단통행할 수 있는 것은 교군꾼,
내시, 외국인의 종놈, 관리들뿐이었다 그리고
심야에는 여자는 사라지고 남자가 다시 오입을 하러
활보하고 나선다고 이런 기이한 관습을 가진 나라를
세계 다른 곳에서는 본 일이 없다고
천하를 호령한 민비는 한번도 장안 외출을 하지 못했다고…

2연 둘째 줄의 연도 표기는 김수영 시인의 착각인 듯 하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1894년 우리나라를 찾았다. 그녀의 여정을 짚어 보면, 2월 하순 배편으로 일본 나가사키를 떠나 부산에 당도해 하루 동안 머문다. 사흘간의 항해 끝에 제물포를 거쳐 3월 1일 서울에 입성한다. 서울에서 50일을 지낸 다음, 내륙 지방을 여행하고서 원산과 부산을 거쳐 다시 제물포로 돌아온다. 그리고는 정세의 급박한 전개와 맞물려 한반도 주변 지역을 둘러보는데, 이후 영국으로 돌아가는 1897년 초까지 이런 여정을 반복한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1894년부터 3년간 우리나라를 네 차례나 찾았고, 1년여를 머물렀다. 이런 이유를 들어 그녀의 한국 여행기는 방문기나 체류기의 한계를 뛰어 넘는 독자적인 한국 연구서로 평가되기도 한다. 아무튼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이인화 옮김, 살림, 1994)에서 「거대한 뿌리」에 형상화된 대목을 읽어보자.

한국에서는 여성들 모두가 최하층 계급의 일원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한국 여성은 다른 어떤 나라의 여성들보다도 더 철저히 예속적인 삶을 꾸려가고 있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수도 서울에서 흥미로운 제도가 실시되고 있다. 저녁 8시경이 되면 대종(大鐘)이 울리는데 이것은 남자들에게 귀가할 시간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신호이며 여자들에게는 외출하여 산책을 즐기며 친지들을 방문할 수 있는 시간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내가 처음 서울에 도착했을 때 깜깜한 거리에는 등불을 들고 길을 밝히는 몸종을 대동한 여인네들만이 길을 메우고 있는 진기한 풍경을 볼 수 있었다. 그 밖에는 장님과 관리, 외국인의 심부름꾼, 그리고 약을 지으러 가는 사람들이 통행금지에서 제외되었다.(…) 자정이 되면 다시 종이 울리는데 이때면 부인은 집으로 돌아가야 하고 남자들은 다시 외출하는 자유를 갖게 된다. 한 양반가의 귀부인은 아직 한번도 한낮의 서울 거리를 구경하지 못했다고 나에게 말하였다.

이 책의 한국어판이 첫선을 보일 때만 해도, 북한강 상류를 지나 금강산을 거쳐 원산에 이르는 여정은 분단의 회한과 금강산을 향한 그리움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한국인들에게 금강산 유람은 여행자로서의 확고부동한 명성을 제공해준다. 그래서 많은 서울사람들은 이 풍류어린 명예를 거머쥐려고 젊을 때부터 벼르고 또 벼른다.” 남북 교류의 일환으로 금강산 관광의 형태로 재개된, 금강산 여행은 남쪽의 작가에겐 문학사적 단절을 극복한다는 의미도 있다. “누대에 걸쳐 한국의 시인들은 그 빼어난 아름다움을 경탄해마지 않았다.”

한국에서 서울이 차지하는 위상을 서술한 대목은 ‘수도 이전 불가론’의 근거가 될 법도 하다. “어떤 의미에서 서울은 곧 한국이다.” 이유는 “오직 서울에서만 깊은 잠에서 깨어나 반쯤 조는 두 눈을 문지르며 몽롱하게 주위를 둘러보며 자신이 어디에 와 있는지 어리둥절해 하는 한국의 현재가 드러”나서다.

또한 “모든 한국인의 마음은 서울에 있다.” 그녀가 파악한 서울 사람의 굳건한 정주 의식은 시대를 초월한다. “어느 계급일지라도 서울에 사는 사람들은 단 몇 주라도 서울을 떠나 살기를 원치 않는다.” 이렇듯 민감한 그녀의 문화적 후각을 통해 우리는 오늘날 우리가 병폐로 여기는 현상의 뿌리깊음을 실감하기도 한다.

“교육받은 계층은 가능한 한 많은 중국말을 그들의 대화에 끌어넣으며 고려할 만한 모든 종류의 문학은 모두 중국어로 되어 있다.” 요즘은 어려운 한자어의 지위를 영어가 물려 받았지만. 백년 전에 이미 “한국인들이 외제품에 의존하고 있는 정도는 놀랄 만한 것이”었고, “거의 모든 관청을 헤어날 수 없는 부정에 빠뜨리고 있는 뇌물 수수와 매수 또한 한국적인 것이다.”

외국인조차 전적으로 안전할 정도의 치안 상태에 대한 이방인의 보고는 흐뭇함을 느끼게 한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한국인의 종교관도 정확하게 포착한다. “아무런 현세의 이익도 제공해 주지 않는 자제와 희생의 종교로 고생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그들의 입장인 것 같다.” 다만, “한국의 승려들은 무척 무식하고 미신적이었다”는 불교 수행자에 대한 인식에는, 일면의 진실이 담겨 있더라도, 기독교인의 편견이 개입된 걸로 보인다.

이 책은 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후기작에 속한다. 낯선 풍토와 낯선 사람들 틈에서 스스로를 지키는 베테랑 여행가의 노하우는 귀담아 들을 만하다. 식탁, 쟁반, 식탁보와 시트 따위의 사치품이 늘어날수록 이동의 어려움만 가중될 뿐이다. “대체로 음식은 그 나라의 음식을 주는 대로, 있는 대로 먹는 것이 최상의 해결책이다.” 그래야 언제 어디서든 경계 대상이 되는 외국인은 의심을 덜 받게 된다.

또한 그녀는 여행지의 상황에 관한 부정적인 정보는 50퍼센트쯤 부풀려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사벨라 버드 비숍이 한국으로 출발하기 직전, 그녀 친구들이 과감하게 추측한 행선지의 위치는 그 정도가 심하다. “한국은 적도에 있다, 아니다 지중해에 있다, 아니 흑해에 있다 하는 식의 별의별 말들이 있었다. 그리스 연안의 다도해 가운데에 있으리라는 견해가 자주 등장했다.”

마르크스의 인용으로 널리 알려진 단테의 ‘남이 뭐라던 네 갈 길을 가라’는 격언이 좌우명인 사람도 때론 남의 눈과 평가에 신경이 쓰이는 게 사실이다. 이와 맥락은 다르지만, 조선이 외국에 문호를 개방하고 나서 이 땅을 찾은 푸른 눈 이방인의 인상기와 체류기, 그리고 여행기가 꽤 번역되었다. 이 중에는 두 번 이상 출간된 것도 더러 있다.

신복룡 교수가 옮긴 ‘한말 외국인 기록’ 시리즈는 23권에 이른다. 그런데 이 시리즈로 번역된 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집문당, 2000)을 권하고 싶진 않다. 우연히 접한 인터넷 독자 서평이 부실한 번역의 심각성을 지적해서다. 『양자강을 가로질러 중국을 보다』는 동일한 번역 텍스트가 『양자강 너머』(지구촌, 2001)라는 제목으로 나왔었다. 연초에 다시 출간돼 독자의 호응을 얻은 『스웨덴 기자 아손, 100년 전 한국을 걷다- 을사조약 전야 대한제국 여행기』(김상열 옮김, 책과함께, 2005) 역시 『코레아 코레아』(미완, 1986)로 선보였던 번역을 보완해 펴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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