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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와 히틀러에 저항한 모랄리스트

에리히 케스트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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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컨셉은, 어린이날에 즈음해 살펴본 ‘어른을 위한 케스트너’ 쯤 될 것이다.

‘에드거 스노’와 연계를 꾀하는 애초의 기획 의도대로라면, 이번에는 스노, 님 웨일즈, 노먼 베쑨처럼 중국 혁명기를 풍미한 ‘아그네스 스메들리’를 다뤄야 한다. 그런데 독일의 동화 작가 에리히 케스트너(Erich Kastner, 1899-1974)로 대체한 것은 시의성에 더 눈을 돌린 결과다. 그러나 딱히 어린이날 특집이라 하기에도 곤란하다. 케스트너의 동화는 대표작 한 권만 읽을 생각이다.

이 글의 컨셉은, 어린이날에 즈음해 살펴본 ‘어른을 위한 케스트너’ 쯤 될 것이다. 실제로 8권 짜리 『어른을 위한 케스트너 저작집(Kastner Gesammelte Schriften fur Erwachsene)』(1969)이 있지만, 독일에서 추린 어른을 위한 케스트너들과 여기서 언급할 책이 얼마나 겹치는지는 알 수 없다.

‘어른용 케스트너’ 말고도 이 글에서 제목을 언급하고 내용을 소개하는 책들은 공통점이 있다. 대체로 Kastner를 ‘케스트너’로 표기한다는 점이다. 이 독일 작가 성씨의 우리말 표기는 두 가지다. 케스트너와 캐스트너. 아움라우트(a)를 어떻게 발음하느냐에 따라서 갈리는 작은 차이인데, 예전에는 케스트너 표기가 많았지만 요즘은 캐스트너가 우세하다.

케스트너의 책을, 제한적이나마, 살펴볼 엄두가 난 것은 최근 열 달 사이 그에 관한 책이 새로 선을 보여서다. 박홍규 교수의 케스트너 평전 『삶을 사랑하고 죽음을 생각하라』(필맥, 2004년 7월 출간)가 나왔고, 케스트너의 삶과 문학을 다룬 클라우스 코르돈의 『망가진 시대』(배기정 옮김, 시와진실, 2004년 11월 출간)도 번역되었다. 여기에다 『마주보기』(윤진희 옮김, 한문화, 2004)가 재출간되었다.

케스트너 번역서가 수십 종에 이르고 그의 동화는 전부 번역되었을 정도이나, 이 땅에서 올림픽이 열리기 전만 해도 케스트너의 한국어 텍스트는 서넛에 불과하다. 『출판저널』 남진우 기자의 표현대로 케스트너의 책은 올림픽 개최연도에 불현듯 쏟아진다. 「독일작가 케스트너, 왜 인기인가」(『출판저널』제30호, 1988년 11월 5일)라는 제하의 기사를 보자.

“아마 금년도 출판계의 가장 큰 이변으로 손꼽힐 수 있는 것 중의 하나는 갑자기 불어닥친 케스트너 열풍일 것이다. 지난 3월, ‘당신께 이런 증세가 나타날 때 지시된 페이지를 읽으세요.’라는 광고와 함께 점두에 등장한 시집 『마주보기』가 젊은 독자들 사이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자 케스트너의 여타 시집들과 소설집, 희곡집, 산문집이 쏟아져 나와 ‘케스트너 붐’을 조성하고 있다.”

그러면서 남진우 기자는 “사망한지 14년이 지나 정작 독일에서는 잊혀져가고 있는 이 낯선 외국 작가가 지금 이곳에서 느닷없이 맹위를 떨치게 된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 의문을 제기하고, “80년대 들어서 이해인, 서정윤, 도종환 등의 활약으로 시집도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증명되었지만, 외국시인의 시집이 베스트셀러가 된 것은 초유의 일이라는 점에서 출판관계자들은 의아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고 전한다.

한편, 남진우는 낯선 외국 작가의 시집이 뒤늦게 느닷없이 뜬 까닭에 대해 “독자의 의표를 찌르는 의미심장한 교훈으로 가득 찬 이 시집은 우선 쉽고 재미있다는 점에서 독자들의 호감을 샀을 것으로 추측”한다. 하지만 나는 덧붙인 남진우 기사의 내용에서 실마리를 찾고자 한다. 그것은 『마주보기』가 1980년대 중반부터 이어진 시집의 베스트셀러 행진을 잇는다는 점이다. 특히, 서정윤 시인의 “둘이 만나 서는 게 아니라 홀로 선 둘이가 만나는 것이다”라는 『홀로서기』와 친밀함을 보인다.

“기다림은/ 만남을 목적으로 하지 않아도/ 좋다./ 가슴이 아프면/ 아픈 채로,/ 바람이 불면/ 고개를 높이 쳐들면서, 날리는/ 아득한 미소.// 어디엔가 있을/ 나의 한 쪽을 위해/ 헤매이던 숱한 방황의 날들./ 태어나면서 이미/ 누군가가 정해졌었다면,/ 이제는 그를/ 만나고 싶다.”(「홀로서기」일부)

“너와 내가/ 당신과 당신이/ 마주 봅니다./ 파랑 바람이 붑니다./ 싹이 움틉니다.// 고급수학으로/ 도시의 성분을 미분합니다./ 황폐한 모래더미 위에/ 녹슨 철골들이 흩어져 있습니다./ 서로서로/ 핏발 선 눈들을 피하며/ 황금충 떼가 몰려다닙니다./ 손이 야구장갑만하고/ 몸이 미라 같은 생물들이/ 허청허청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립니다.// 우리가 쌓아 온 적막 속에서/ 우리가 부셔 온 폐허 위에서// 너와 내가/ 당신과 당신이/ 마주 봅니다./ 파랑 바람이 붑니다./ 싹이 움틉니다.// 피곤에 지친 눈을 들어/ 사랑에 주린 눈을 들어/ 너와 내가/ 당신과 당신이/ 마주 봅니다.// 마술의 시작입니다.”(「마주보기」전문)

『마주보기』는 밀리언셀러가 되었고, 『홀로서기』,『마주보기』,『접시꽃 당신』의 시집 세 권이 나란히 대한출판문화협회가 집계한 1988년 베스트셀러 종합 순위 1, 2, 3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마음의 처방전이 담긴 『마주보기』의 저본은 시선집 『케스트너 박사의 서정적 가정약국(Dokor Erich Kastner Lyrische Hauspotheke)』이다. 『서정적 가정약국』은 케스트너가 자신의 시 116편을 뽑아 처방 항목별로 배열한 시집이다.

아무튼 케스트너 책의 번역은 1988년에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케스트너의 책이 정식 판권을 받아 본격적으로 번역되기 시작한 것은 1995년부터의 일이다. 아래는 그 이전의 주요 번역서를 장르별로 나열한 목록이다. 목록 작성은 『출판저널』기사, 국립중앙도서관 문헌목록, 박홍규 교수의 케스트너 평전을 참고로 했다.

시집 『헤어질 때와 만날 때』(최성배 옮김, 동광출판사, 1986)
『마주보기 1?2』(김은주, 언어문화사, 1988)
『마주보기 3』( 〃 , 〃 , 1994)
『커다란 장난감』(강명구, 자유시대사, 1988)
『13월』(정태남, 영학출판사, 1988)
『용기 있는 질문 하나』(윤성자, 문화광장, 1988)
『포옹하기』(신현철, 눈, 1993)
『착각도 나름대로 쓸모가 있다』(윤성자, 본미디어, 1994)

희곡 『독재자 학교』(김학천 옮김, 전예원, 1988)

소설 『설원의 사나이』(김영주 옮김, 삼중당, 1960)
『화비안』(전혜린, 동민문화사, 1967)
『파비안』( 〃 , 문예출판사, 1972)
『최후의 증인』(권성원, 문예춘추사, 1988)

자서전 『내가 만나는 나』(정성호 옮김, 명지사, 1988)

동화?우화 『날으는 교실』(이기열 옮김, 심지, 1988)
『제자리 찾기』(윤성자, 삶과함께, 1988)
『우리 엄마? 니네 아빠?』(정성호, 자유시대사, 1988)
『동물들, 국제회의를 열다』(정은이, 혜원출판사, 1989)

산문집 『시간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김해생 옮김, 자유시대사, 1988)

장르 미확인 『잃어버린 너』(권성원 옮김, 문예춘추사, 1989)
『자기 얼굴 그리기』(오경미, 현대문화센터, 1989)

일본어 교재 『날으는 교실』(일본어학습편집부 옮김, 명지출판사, 1991)

케스트너 생전에 출간된 그의 한국어판은 『파(화)비안』두 권과 삼중당의 ‘세계대로망 전서(全書)’ 8번으로 나온 『설원의 사나이』 정도다. 하지만 아마도 케스트너는 이런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1980년 선보인 김청자 각본의 순정만화영화 『개구장이 천사들』(동아양행)은 케스트너가 원작자이기도 하다. 일본어 교재인 『날으는 교실』은 일한 대역판으로 짐작된다. 케스트너의 여러 작품이 영화로 만들어졌다. 『파비안』도 그랬는데, 나는 영화를 통해 이 소설을 먼저 접한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내가 중등학생 때 단체관람한 영화 〈파비안느〉는 『파비안』을 각색한 것은 아닌 모양이다. 주인공의 성별부터 다르니 말이다. 파비안느는 여자고, 파비안은 남자다.

『파비안』은 바이마르 시대 독일의 어두운 사회상을 배경으로 한다. “동쪽은 범죄가, 중앙은 사기가, 북쪽은 비참이, 서쪽은 부패가 지배하고 있고, 온갖 방향이 몰락으로 꽉 차 있습니다”는 구절이 단적으로 말하듯. 『파비안』은 전혜린의 번역 유고를 펴낸 것이고, 『최후의 증인』은 『파비안』과 같은 책이다. 케스트너의 희곡 『독재자 학교』를, 『출판저널』(제26호, 1988년 9월 5일)은 이렇게 신간안내를 했다.

“한 독재자가 타도되면 또 다른 독재자가 다시 등장하는 독재의 악순환 과정을 희곡형식으로 리얼하게 그려내고 있다. 이 희곡은 십여명의 모조대통령학교를 운영하고 있는 육군장관, 총리, 주치의, 교수팀이 지명한 한 모조대통령이 종신직 수락연설 도중 저격당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저격당한 대통령이 엉겁결에 원고에 없는 사면령을 발표하자, 그를 명령불복종죄로 제거하고 다른 모조대통령을 세우는 과정이 희곡의 중심을 이룬다. 이 작품은 저자가 나치정권 등장 당시 구상하였다가 구상후 20년, 즉 나치몰락에 즈음하여 독일에서 출간된 바 있다.”

『시간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는 ‘캐스트너의 산문집’을 표방하나 속내는 ‘종합선물세트’다. 시와 산문, 단편소설, 짧은 희곡 등을 담았다. 책은 「캐스트너가 캐스트너에 대해서」로 마무리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케스트너는 케스트너가 아니다. 『망가진 시대』는 첫머리에서 케스트너가 죽은지 8년 뒤 드러난 케스트너의 출생에 얽힌 비밀을 짚는다.

“케스트너의 아버지는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한 에밀 케스트너가 아니라, 오랫동안 이 집안의 주치의였던 위생고문관 찜머만 박사였다는 것이다. 어느 날 어머니가 아들에게 이 사실을 고백하였으며, 나중에 케스트너는 자기 아들의 생모에게도 이러한 사실을 알렸다고 한다.”

케스트너는 정식 결혼을 하지 않고, 루이제로테 엔데를레와 30년간 동거했다. 하지만 케스트너의 아들을 낳은 이는 반려자나 다름없는 루이제로테가 아니라, 동거 중에 사귄 애인 프리델 지베르트였다. 케스트너의 유산이 두 여자에게 똑같이 나눠지자 루이제로테는 섭섭해했다고 한다.

케스트너를 흔히 ‘모랄리스트’라 일컫는다. 그렇다면 케스트너의 애정행각은 그의 정체성을 거스르는 것이 아닌가? 그렇진 않다. 박홍규 교수는 모랄리스트는 단순한 도덕가가 아니라고 말한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모랄리스트란 그리스, 로마의 전통적 휴머니스트, 특히 회의론의 영향을 받은 17~18세기의 철학적 작가들을 가리키며, 그들은 누구보다 몽테뉴에게 현저하게 나타나는 반합리주의자, 반체계주의자, 반형이상학주의자들이다.”

모랄리스트의 특징이 무엇보다 웃음이 있다고 보는 박 교수는 “모랄리스트가 도덕선생과 다른 점은 자기동일성이 없고, 언행이 일치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고 덧붙인다. 그런데 “그래선지 우리가 말하는 모랄리스트는 거꾸로 언행일치를 전제한다”는 것이다.

『삶을 사랑하고 죽음을 생각하라』는 케스트너 입문서로 아주 알맞다. 케스트너의 작가적 특성과 작품 세계에 대한 박홍규 교수의 설명부터 매우 유익하다. 박 교수에게 “케스트너는 독일문학에서는 보기 드문 유머를 지녔으며, 거창한 주제의식을 갖지 않고도 사회에 비판적인 모랄리스트(moraliste)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으나 케스트너는 “히틀러에 대해 통렬하게 비판하고 저항한 작가”이기도 하다.

박홍규 교수는 케스트너의 작품 세계를 ‘사회적 아동문학’으로 규정하고, 케스트너의 ‘실용서정시’에도 의미를 부여한다. “여기서 ‘실용’이란 과장된 말, 말재주, 빈말, 말의 사치를 배격하고, 절제 속에서 통속적이고 직설적이며 솔직한 표현으로 시대와 삶의 알맹이를 보여주는 것을 뜻한다.” 케스트너의 책들에 대한 해제도 독서 길잡이 구실을 하는 유용한 정보려니와, 박홍규 교수의 케스트너 인용문에는 빛나는 경구가 많다. 몇 개 가져온다.

“최소한 오래 살아 놈들 약이라도 올려야 하지 않겠어?”
“인생을 어렵게 보기는 쉽다. 그꾷나 인생을 쉽게 보기는 어렵다.”
옛날에는 뭐든지 좋았다고 말하는 것은 “대개 터무니없고, 잔소리할 게 없어 핑계삼아 하는 말”이다.
“인간은 오직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는 선량하지도 현명하지도 않다.”
“남보다 0.1초 빨리 가려고 정해진 길을 미친 듯이 뛰는 건 그야말로 미친 짓이야. 건강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병이 나니까 말이야.”

『하늘을 나는 교실』(문성원 옮김, 시공사, 1995)을 읽고 진한 감동을 받았다. 한마디로 케스트너는 위대한 작가다. 지금까진 바스콘셀로스의 『나의 라임오렌지나무』를 읽고, 특히 착한 어른 뽀루뚜가의 자동차가 도시고속철도 망가라치바와 부딪히는 장면에서 콧등이 시큰해지지 않는 자와 상종하지 않기로 다짐해 왔지만, 이젠 하나 추가다. 다음 대목에서도 눈시울이 차가운 자와는 인간관계를 맺고 싶지 않다, 진정코.



마르틴은 돌아서서 달아나려고 했다. 선생님이 마르틴을 붙잡았다. “잠깐, 얘야!” 유스투스 선생은 마르틴에게 몸을 굽히고 나무에게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아주 조그만 목소리로 물었다. “여비가 없어서 그러니?” 그 순간에 마르틴의 용기있게 보이려던 행동은 끝나 버렸다. 마르틴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 눈 덮인 볼링장 난간에 머리를 대고 목놓아 울었다. 슬픔이 목구멍까지 차올라 마르틴을 마구 뒤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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