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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철학자’가 두는 삶의 훈수

프란체스코 알베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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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 의식과 도덕적 행동은 내가 주목하는 주제 가운데 하나인지라 ‘번역자’의 간결한 첫 멘트는 책에 대한 호감을 더해 주었다. 그런데 이어지는 문장은 약간 납득이 안 갔다.

첫 장부터 진득하게 읽는 것이 일반적인 독서법이지만 책의 앞뒤에 놓인 곁텍스트를 훑어보고 나서 본문에 진입하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다. 소설이 아니라면, 부속 텍스트에서 얻은 사전 정보는 본문의 길라잡이 구실을 하면서 책의 이해를 돕는다. 필자의 경우, 특히 번역서는 저자 서문과 옮긴이 후기를 먼저 읽고 본문으로 들어가곤 하는데, 프란체스코 알베로니(Francesco Alberoni, 1929- )의 『자발적 복종을 부르는 명령의 기술』(홍재완 옮김, 교양인, 2004)도 그랬다.

“이 책은 권력을 차지하거나 유지하는 방법을 가르치지 않는다. 이 책의 목표는 어떻게 도덕적으로 명령을 할 수 있는지, 도덕적으로 행동하면서 어떻게 효율성을 얻을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윤리 의식과 도덕적 행동은 내가 주목하는 주제 가운데 하나인지라 ‘번역자’의 간결한 첫 멘트는 책에 대한 호감을 더해 주었다. 그런데 이어지는 문장은 약간 납득이 안 갔다.

“최근 몇 년 동안 우리는 자신의 본래적인 가치를 잃어버리고 있다. 왜냐하면 국가, 교회, 군대, 정당, 학교, 가족 등 공적,사적 도덕성을 유지해왔던 긍정적이고 바람직한 교육 제도들이 약화되는 것을 방치했기 때문이다.” 다른 건 어떤지 몰라도 우리네 학교?정당?군대가 언제 공적이고 사적인 도덕성을 지닌 적이 있었던가. 국가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얼마 전, 중,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의 편향된 역사 서술에 맞서 ‘성공한 대한민국’을 부르짖기로 다짐한 분들이 정녕 말짱한 정신으로 그랬는지 다소 의아할 따름이다. 해방 60년의 3분의 2가 민간 독재, 쿠데타, 군사 독재, 학살, 그리고 군부 독재로 점철되었는데 무슨 근거로 ‘성공’ 운운하는지. 이와 때를 같이 해 처음으로 ‘10?26 사건’을 다룬 영화의 시사회장에 나타난 ‘5000년 가난을 구제했다’는 1인 시위자의 샌드위치 피켓에 씌어진 항의 문구가 성공의 가늠자일까. 비굴하게 연명하느니 나는 차라리 굶어 죽겠다.

그런데 유족 대표가 법원에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낸 까닭에 이 영화가 제대로 상영될는지는 미지수다. 법원이 어떤 판단을 내릴지 알 수 없으나 〈그때 그 사람들>은 지금이 한국 영화의 전성기임을 말해 주는 하나의 증거로 볼 수 있다. 해리 놀스라는 미국 영화계 관계자의 표현을 빌면, 이것은 우리나라가 오늘날 영화적으로 가장 흥분을 자아내는 국가(심재명의 신문 시평에서 다시 따옴)이기에 시사회라도 가능한 것이리라.

신문 보도에 따르면, 박 전 대통령의 유족이 이 영화에 발끈한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그런데 그 중에서 “사생활이 문란하”다는 설정에 반발하는 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일이 아닌가 한다. 그러면 당시 국가기관인 중앙정보부의 요원이 맡았다는 ‘채홍사’의 존재 자체를 애써 부정하겠다는 건가. 아니면 ‘채홍사’가 단지 국빈 방문한 다른 나라 국가 원수를 접대하는 임무만을 수행했다는 말인가. 그렇다고 대한민국이 걸어온 길이 말짱 실패한 역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시 『명령의 기술』로 돌아오자. “대규모 공기업에서 경쟁은 패거리 형성, 연합, 권력 쟁취를 위한 합종 연횡, 권력 투쟁과 같은 ‘정치적’ 특성을 띤다. 과거에는 이러한 현상이 조직의 정상에서만 일어났지만 이제는 모든 계층까지 내려와서 가장 낮은 계층에서도 폭력의 일반화를 볼 수 있다.”

일전에 밝혀진 유아 강탈 및 엄마 살해 사건은 정말이지 극악무도한 범죄다. 폭력의 일반화로 치부할 문제가 아니다. 사건의 의뢰인과 실행자들은 동정의 여지가 전혀 없는 악인이다. 아주 나쁘다. 물질 만능의 사회를 탓하기에 앞서 개인에게 준엄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런데, 앗! “단돈 100달러에 친구를 배반하고 거짓 증언을 할 사람들이 널려 있다”니. ‘교회’가 거명됐을 때 진작에 눈치챘어야 했는데. 책의 제일 뒤에 놓인 독립된 꼭지는 ‘옮긴이 후기’가 아니었다. 지뫀이의 ‘에필로그’다.

“철학적 탐구가 아니라 비슷한 개인적 경험과 비슷한 필요에서 출발하는 아래로부터의 도덕의 탄생을 말하고 싶었다”는 알베로니는 ‘에필로그’를 이렇게 마무리짓는다. “이 책은 악으로부터 선을, 불의로부터 정의를 구분하도록 해주는 공통의 가치와 원칙을 자신의 마음속에 키우는 창조적인 지도자를 형성하는 데 공헌하고 싶은 바람에서 모든 민족과 문화를 향해 쓴 것이다.”

알베로니는 창조적인 지도자로 율리우스 카이사르, 나폴레옹, 샤를 드 골, 윈스턴 처칠 등을 꼽는다. 특히 카이사르와 나폴레옹은 거푸 언급되는데 카이사르는 원대한 계획, 타고난 전투 능력, 넓은 도량의 소유자로 평가된다. 나폴레옹에 대해서는 화려하게 치장한 다른 장군과 달리 일반 병사와 비슷한 복장으로 고락을 함께 한 점을 높이 산다.

반면, 관료를 보는 시각은 지나치리만큼 냉정하다. 알베로니는 “위대한 예술 작품을 창조하거나 위대한 과학적 발견을 이룩한 관료를 본 적이 있는가?” 반문하면서, 그것은 “하루 종일 정부 부처의 복도를 서성이면서 보냈던 사람들하고는 거리가 먼 이야기”라고 단언한다. 미국인들의 지도자관에 관한 알베로니의 해석이 이채롭다. 그들은 세계에서 가장 현실적인 사람들인데도 지도자가 구체적인 목표보다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꿈을 제시하길 더 바란다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사회심리학자인 알베로니의 책은 지금까지 여남은 권 번역되었으나 중복 번역된 것이 더러 있어서 필자가 직간접으로 확인한 바로는 그의 한국어판은 7종으로 파악된다. 여남은 권의 출간 시기는 셋으로 나눌 수 있는데 1990년대 초반과 후반, 그리고 2010년대의 중반이다.

알베로니의 책이 생각보다 많이 우리말로 옮겨지고 자주 출간된 것은 『여자는 졸고 있는 남자를 증오한다』(강성준 옮김, 새터, 1992)가 많이 팔린 때문으로 풀이된다. 약간 도발적인 한국어판 제목은 본문에 인용된 시몬 드 보부아르의 발언에서 따온 것이다. “남자가 곁에 있지 않으면 언제나 아쉬워한다. 곁에 있어도 책을 읽거나 글을 쓰면서 눈길을 주지 않으면 허전해 한다. 여자는 졸고 있는 남자를 증오한다.”

꽤나 진한 ‘연애론’이었던 이 책을 기화로 『우정론』(조석현 옮김, 새터, 1993), 『장미꽃 향기가 나는 남자』(김수영 옮김, 새터, 1994), 『에로티시즘』(김순민 옮김, 강천, 1992), 『사랑의 발견』(김성은 옮김, 명문당, 1992) 등이 나왔다.

1990년대 후반의 알베로니 번역서는 모두 제목이 길다. 『소중한 사랑을 얻기 위한 18가지 지혜』(양서원, 1997)는 ‘신연애론’이라 할 수 있고, 『남에게 베푸는 사람 받기만 하는 사람』(정선희 옮김, 세종서적, 1999)은 사람의 다양한 심리와 행동을 유형별로 서술한 마음 분석서다. 『남을 칭찬하는 사람 헐뜯는 사람』(이현경 옮김, 황금가지, 1998)도 이와 비슷한 성격의 책이다.

알베로니의 마음 헤아리기는 깊이가 있다기보다는 실용적인 측면이 짙다. 아울러 인물 유형의 이분법적인 대비가 때로는 서로 모순되고, 때로는 단순한 감이 없지 않다. 이를 의식한 듯 알베로니는 『남에게 베푸는 사람 받기만 하는 사람』에서 독자 편지의 문제 제기에 답하는 형식을 빌려 해명에 나선다. 복잡한 현실을 어떻게 파악할 수 있을지 고민하지 않고 그저 단순화시키려는 게 문제라는 것이다. 남녀의 행동 분석도 마찬가지라지만 해명이 그리 깔끔하진 않아 보인다. 이 책에서는 권력자를 향한 비판이 눈길을 끈다.

“권력의 자리에는 비겁한 무리들이 쓸어담을 만큼 많다. 사람들이 마음에 그리고 있는 것과 정반대다. 사람은 누구나 지도자를 고귀하고 용감한 사람으로 여기고 싶어한다. 목표를 제시하고, 위험에 맞서며, 결단을 내리고, 책임은 자신이 다 떠맡는 사람이라고, 일을 같이 하는 사람을 뽑는 일에도 실수가 없으며 부하를 위험한 일에 내보내면 뒤에서 지원하며 지켜줄 것이라고. 그런데 실제로 조직의 최고 자리에 오르는 사람뫀 신용할 수 없는 비겁자일 경우가 많다.”

『여자는 로맨스하고 싶고 남자는 포르노하고 싶다』(거송미디어, 1998)와 『연애는 반란이다 연애는 혁명이다』(새터, 1999)는 L'Erotismo를 원제로 하는 같은 책이다. 번역문마저 일치하는 대목이 적지 않은 걸로 봐서 어느 한쪽이 베낀 것으로도 짐작된다. 드러난 정황만으로는 나중 나온 책이 무리수를 둔 것으로 여겨지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먼저 나온 책이 늦게 나온 책의 번역문을 일부 베꼈다.

이렇듯 시공을 초월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 『연애는 반란이다 연애는 혁명이다』는 『여자는 졸고 있는 남자를 증오한다』를 제목을 바꿔 펴낸 책이어서다. 번역자도 같은 사람이다. 『여자는 로맨스하고 싶고 남자는 포르노하고 싶다』가 편역서를 자임한 것에선 번역문 표절의 심증을 굳히는 한편, 일말의 양심이 느껴진다. 『연애는 반란이다 연애는 혁명이다』도 100퍼센트 떳떳하진 않다. 일어중역본으로 추측되는 무단 번역물인 탓이다.

요즘도 이따금 저작권을 무시하는 지난 시절의 출판 관행을 옹호하는 논리를 접하곤 한다. 참으로 어이가 없는 일이다. ‘중복 출판과 무단 번역으로 이만큼 이뤄 냈다’는 주장에 대해 나는 그래서 그것뿐이지 않느냐, 고 응수하련다. 저작권(법)에 적개심부터 드러내는 일부 인터넷 사용자의 태도 또한 썩 바람직하진 않다.

진보네트워크센터 오병일 사무국장의 「저작권법은 사이버 보안법?」(〈한겨레〉2005년 1월 20일자 21면)은 그 단적인 경우다. 그는 지난 1월 16일 발효된 “가수나 연주자 등 실연자와 음반 제작자에게 전송권을 주는 내용의 개정 저작권법”에 불만을 토로하고 있으나, 설득력이 크게 떨어진다. 내가 “정작 인식이 바뀌어야 하는 사람들” 중 하나여서 그런지 몰라도 말이다.

좋아하는 시인의 시집을 사서 읽고서 “자신이 좋아하는 시를 게시판에 올려 놓”거나 그의 말대로 “내가 돈을 주고 산 시디에서 엠피3(MP3) 파일을 만들어 내 홈페이지 배경음악으로” 사용한다면, 누가 뭐라 하겠는가. 그랬어도 과연 “저작권법의 규제” 조항이 새로 만들어졌을까? ‘공유’를 강조하는 누리꾼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당신이 하는 일을 사회적으로 공유하게 돼 이제부터는 대가를 지불하지 않겠다면 어쩌겠는가. 그리고 설령, 저작권법에 아무리 문제가 있다 해도 희대의 악법인 국가보안법에 견주는 것은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

“블로그에 배경음악을 깔고 다른 글을 퍼오고 시에 대한 평을 하는 것은 개인들의 자기 표현이자 문화적 교류다. 만일 저작권이 이런 행위를 금지하고자 한다면 어떻게 저작권이 ‘문화의 향상, 발전을 위한 법’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국가보안법보다 더 가혹하게 사람들의 일상적인 표현과 소통을 규제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오 사무국장이 지향하는 진보가 뭔지 잘 모른다. 하지만 이런 식의 막무가내라면 나는 그런 진보는 원하지 않으며 동의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한겨레〉 1월 27일자에 실린 문화관광부 저작권과 담당자의 반론이 설득력이 있다. 〈한겨레〉 ‘왜냐면’에는 사안에 따라 해당 분야 공무원의 반론이 종종 실린다. 문화관광부나 국가보훈처의 반론은 수긍이 가는데 비해 힘깨나 쓴다는 외교부(출입국관리소 포함), 국방부, 경제 부처의 관리들은 여전히 ‘모르쇠’로 일관한다.

깔끔한 번역과 산뜻한 편집이 돋보이는 『명령의 기술』은 5년만에 선보인 알베로니의 책이다. 이 책이 알베로니 저서의 세 번째 출간붐을 몰고 올지는 단언하기 어려우나 『우정론』이 다시 나오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우정론』은 필자가 맨 먼저 읽은 알베로니의 책으로 이 글을 쓰도록 이끈 맹아이기도 하다. 다른 책과 다르게 단편적이지 않다. 본격 우정론이다.

“현대 사회 가운데 우정이나 사랑을 그다지 존중하지 않는 곳이 미국 사회이다. 그 때문에 미국인들은 인간관계나 개인간의 갈등이 항상 문제시되고 있다. 이런 상태에 이른 까닭은 그런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인간과학과 사회과학이 시장과 조직의 논리에 오염되었기 때문이다. 미국 사회에서는 아무리 노력을 하더라도 실제로는 경제에 입각한 관계 범위를 뛰어넘을 수 없다.”

지금으로선 알베로니에게 인생의 훈수를 듣고자 하는 독자에게 『명령의 기술』을 적극 추천한다. 앞서 알베로니를 사회심리학자라 호명했지만, 필자는 그에게 ‘생활 철학자’나 ‘인생 경영 철학자’라는 명칭을 부여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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