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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의 독일적인, 그래서 불행하기도 한 ‘문인 박사’

마틴 발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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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과 ‘해석’은 ‘기획리뷰’를 끌고 나가는 두 축이다. 그런 점에서 얼마간의 공백 끝에 새 출발하는 ‘기획리뷰’의 첫 주인공으로 독일의 작가 마틴 발저(Martin Walser, 1927- )를 초대한 것은 적절한 선택이라 여겨진다. 우리말로 옮겨진 발저의 책들이 번역의 문제점과 해석의 아쉬움을 안고 있어서다.

근 열 달만에 ‘기획리뷰’ 연재를 재개하는 감회는 실로 남다르다. 2004년은 필자에게 문자 그대로 다사다난했기에 더욱 그렇다. 초봄에는 ‘여명(餘命) 선고’까지는 아니어도 그에 못지 않게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소리를 들었다. 봄볕이 무르익기 시작할 무렵 큰 수술을 받고 회복하는 가운데 둘째 아이가 태어났다. 여름에서 가을로 이어지는 시기에는 후속 치료를 받으며 몸을 추스르는 한편, 책읽기와 글쓰기를 본격적으로 다시 시작했다.

초봄의 충격파가 워낙 커서 그렇지, 올해에는 기쁜 일도 많았다. 수술로 인한 심리적 후유증은 둘째 아이로 인해 차츰 극복되었다. 아니, 갓 태어난 아기의 얼굴을 보자마자 정신이 버쩍 들었다고 하는 편이 맞다. 선호하는 신문의 출판면에 다달이 독서 칼럼을 쓰고 있고, 가을에는 새 집으로 이사를 했다.

또, 올 안으로 ‘기획리뷰’를 엮은 『책으로 만나는 사상가들2』(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와 약간 손을 본 이 책의 첫째 권이 함께 나온다. 여기에다 연말에는 필자의 출판 평론 활동과 관련해 작은 상을 받는다. 지난봄의 곤경을 상쇄하는 겹경사라 하겠다. ‘기획리뷰’의 재출발 역시 필자에게는 커다란 기쁨이다. 얼마 전, 기존 연재물의 부쩍 는 조회수를 보고 적이 놀랐다. 전혀 예상치 못한 숫자였다. 이런 관심에 부응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굳이 의미를 부여하자면, 10개월만에 재개된 ‘기획리뷰’는 『책으로 만나는 사상가들3』의 시작인 셈이다. 주지하듯이 ‘기획리뷰’는 ‘번역서로 통한 해외 저자의 수용 양상을 살피는 것’을 목적으로 우선한다. 여기에다 해외 사상가(또는 저자)의 리뷰를 거듭하면서 줏대가 있는 책읽기를 지향하게 되었다. 그것은 한마디로 비판적 독서를 고무하는 것이다. 이러한 뜻을 새로 쓴 첫째 권의 머리말을 통해 다음과 같이 피력한 바 있다.

해외 사상가에 대한 개인적 관심과 자료 정리 차원에서 시작한 해외 사상가의 번역서 리뷰가 어느새 첫 권과 둘째 권 합쳐 105인에 이르렀다. 내가 이 작업을 왜 하고 있을까? 자문하다가 이번에 첫째 권을 다시 훑어보며, 사상가 두 사람의 발언에서 그 실마리를 얻었다. 레이몽 아롱은 한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뛰어난 사상가들과의 대화를 사랑할 뿐만 아니라 학생들에게도 이런 취미를 기르라고 권합니다. 학생들은 누군가를 찬양하고 그를 흠모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늘 교수와 만나지만 교수란 대개 감독관의 입장에 있거나 혹은 찬양할 만하지 못하기 때문에 찬양과 흠모의 대상이 되기가 쉽지 않습니다. 교수는 학생들을 위해 위대한 철인과 사상가를 해석해 주는 역할을 맡아야 합니다.”

또 가라타니 고진은 다음과 같은 독서론을 개진했다. “읽는 일은 작자를 변형시킨다. 여기에서 ‘올바른 이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만약 그것이 있을 수 있다면 이른바 역사 자체가 완결되어 버린다. 헤겔 미학이 그의 역사철학과 마찬가지로 ‘올바른 이해’에 의해 완결되어 버린 것은 그런 연유에서이다. 그것은 작품이라는 텍스트가 극복할 수도 없고 환원할 수도 없는 불투명함을 지니고 자립한다는 사실을 작자와 독자 모두 의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가 교수는 아니어도 독자들이 흠모하고 찬양할 만한 인물을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길라잡이 구실을 하는 일이 즐겁다. 그러나 고진의 독서론에 공감하는 나로서는 아무리 훌륭한 사상가라 해도 그를 무작정 흠모하거나 무조건 찬양하는 것만큼 위험한 일도 없다고 생각한다.


‘번역’과 ‘해석’은 ‘기획리뷰’를 끌고 나가는 두 축이다. 그런 점에서 얼마간의 공백 끝에 새 출발하는 ‘기획리뷰’의 첫 주인공으로 독일의 작가 마틴 발저(Martin Walser, 1927- )를 초대한 것은 적절한 선택이라 여겨진다. 우리말로 옮겨진 발저의 책들이 번역의 문제점과 해석의 아쉬움을 안고 있어서다. 고등학교에서 제2외국어로 배운 독일어조차 다 까먹은 필자로서는 현대 독일 작가의 소설과 산문의 번역 품질을 판단할 능력이 없다. 다만, 발저의 한국어판들이 우리나라 번역 출판의 한계를 그대로 노정하고 있다는 점은 말할 수 있다. 그러니까 번역 출판의 일반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번역의 문제라기보다는 번역서의 문제이자 번역서 편집과 출간의 문제다. 물론 번역 문장이 좀 껄끄러운 책이 없는 건 아니다.

마틴 발저의 책은 문학전집에 다른 작가의 작품과 함께 실린 중편소설을 포함해 네 권이 번역되었다. 중편소설과 나머지 세 권은 출간 시기가 거의 한 세대나 떨어져 있으나 비슷한 문제점을 노출한다. 〈오늘의 세계문학- 13〉(중앙일보사, 1982)에 귄터 그라스의 「텔그테에서의 만남」, 페터 바이스의 「부모와의 이별」과 함께 수록된 발저의 「도망치는 말」(안삼환 옮김)은 지금 읽기에도 수월하다. 하지만 오탈자가 수두룩하다. 이태 뒤 나온 보급판에서는 오탈자를 어느 정도 바로잡았지만 그래도 많이 남아 있다. 이 시리즈에 들씌워진 오역의 악평에 대한 절반의 책임은 책을 만든 편집자에게 있다 할 것이다.

마틴 발저의 장편소설이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은 중편이 맛뵈기로 선보인지 무려 19년만의 일이다. 대작 두 편이 한꺼번에 나오느라 그렇게 뜸을 들였나 보다. 그런데 이 두 권에도 오탈자가 적잖다. 『샘솟는 분수』(구승모 옮김, 종문화사, 2001)에는 오자가 좀 많다. 정오표가 끼워져 있는 61쪽과 나머지 다섯 군데의 실수 말고도 오타가 꽤 된다. 이 소설에는 두 번 이상 반복되는 구절이 더러 있는데 여기서 그만 큰 오자가 났다. 아버지가 너덧 살 난 아들에게 또박또박 읽도록 가르친 읽기 힘든 긴 단어여서 그랬을까! 바가바드기타는 “바가바트기타”와 “바가와트기타”로 표기되고, 타고르의 이름은 “라빈드라나트”와 “라빈드타나트”, 그리고 “라빈트라나트”로 변신을 거듭한다. 설마 알쏭달쏭한 단어여서 너덧 살 먹은 아이가 매번 잘못 읽은 것을 표현한 건 아니겠지! ‘제8회 한,독 문학번역상’을 받은 『유년시절의 정체성』(권선형 옮김, 종문화사, 2001)에는 오자가 제일 적다. 하지만 “금새”(금세), “줄곳”(줄곧), “장미빛”(장밋빛) 같은 평범한 낱말과 연도의 표기가 틀려 오자가 많다는 인상을 준다. 게다가 이런 사소한 실수가 번역상을 받은 문장에도 흠집을 낸다.

산문집 『어느 책 읽는 사람의 이력서』(안인길 옮김, 미래의창, 2002)의 표기 또한 들쑥날쑥하다. “장 파울”이 “쟝 파울”이 되는가 하면, 카프카의 작중인물 K.의 이름은 세 가지- “요세프”, “요제프”, “요셉” -다. 오탈자 말고도 어색한 우리말 문장이 적잖은 이 책은, 번역자가 24년 전 ‘제19회 한국번역문학상’ 수상자라는 사실을 무색하게 한다. “인생의 감정을 느끼는 능력”이 뭔지도 모르지만, 이를 달리 표현한 “인생이 향상되는 걸 더욱 선명하게 느끼게 된다”는 건 무슨 말인지 더욱 모르겠다. “언어는 풍부하지만 우리가 명령을 내릴 수 없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언어를 대하면 우리의 가난을 가질 수 없다”니. 도대체. 아무리 산문이라 해도 마틴 발저의 명료한 소설 문장을 감안할 때, 그가 이렇듯 뜻이 잘 안 통하는 표현을 마구 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한편, 이 산문집의 ‘역자 해설’에 나타난 번역자의 마틴 발저에 대한 해석은 오버가 아닌가 한다. 번역자는 발저가 1979년에 쓴 반(反)나치 성향의 수필 내용 일부와 1998년 독일평화상재단의 세계평화상 수상 강연록에 담긴 반유대주의적인 구절을 대비한 다음, 이렇게 결론짓는다. “그러나 나이가 들게 되면 비인륜적이고 잔인한 장면을 TV가 거듭 방영할 경우, 채널을 돌리는 게 보통이다. 지극히 인간적인 자세의 한 면이라고 생각된다.”

반면, 『샘솟는 분수』의 번역자는 신중한 접근을 조언한다. 그는 간략한 작품 설명이 담긴 ‘들어가는 글’에서 독자가 균형 잡힌 태도로 발저의 소설을 대하길 바란다. 역자는 이 작품이 “국가사회주의당에 대한 부정적이거나 긍정적인 평가를 담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면서도 “작품의 분위기는 서정적이고 향수에 가득 차 있으며 보수적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아울러 “히틀러가 지배하던 제3제국에 대한 향수”를 불러올 가능성을 전혀 배제하진 못한다는 점에 대해 주의를 촉구한다.

설득력 없는 변호에 귀가 얇아지기보다는 조심스럽게 다가서는 자세가 바람직하다. 그렇지만 필자의 독후감을 감안할 때, 『샘솟는 분수』를 옮긴이의 다음과 같은 조언을 유념하면 충분할 듯 하다. “국가사회주의당이 지배하는 제3제국(히틀러 정권) 없이는 오늘날의 독일을 생각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현재와의 연관 없이는 이 작품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이것을 저자는 한적한 시골에서 살고 있는 일반 서민의 시각에서 어떤 부담감이나 합리화 과정 없이 독자들에게 담담하게 제시하고 있다.”

마틴 발저의 소설 읽기는 흥미로운 독서 체험이었다. 독일 소설도 이렇듯 재미있고 술술 읽어 나갈 수 있다는 것이 처음에는 실감나지 않을 정도였다. 물론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이 독문학에 대한 오해를 일부 씻어 준 바 있다. 하지만 쥐스킨트의 소설이 ‘소품’이라면, 발저의 중,장편은 독일 ‘정통 소설’의 계보에 속한다. 한편으로는 그간의 무지막지한 독문학 번역, 나아가 외국 문학 번역 풍토에 대해 푸념하지 않을 수 없다.

『샘솟는 분수』는 자전적 요소가 아주 짙다. 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작가의 유소년?청년기와 거의 일치하고 공간적 배경은 작가가 성장한 고향 그대로다. 이 소설의 주인공 ‘요한’은 발저의 분신으로 봐도 무방하다. 이 소설보다는 자전적 요소가 덜하지만 『유년시절의 정체성』에도 그의 삶의 이력이 물씬하다. 이 소설은 제목과는 달리 주인공의 청년기부터 중년기를 다룬다. 두 소설을 합치면 한 사람의 생애를 포괄하는 셈이다. 그런데 『유년시절의 정체성』의 주인공 ‘알프레드 도른’에게는 ‘요한’보다는 다른 등장인물의 색채가 더 두드러진다. 그것은 바로 ‘요한’의 아버지다. 경제적으로 무능하면서 병약한 ‘요한’의 아버지는 히틀러의 집권을 파국이라 여기고 “하일, 히틀러!” 손짓에 동참하지 않은 유일한 인물이었다.

‘알프레드 도른’ 또한 시대의 추세와는 무관하게 산다. 옛 동독 드레스덴 출신의 ‘알프레드’는 “실력 때문이 아니라 태도 때문에” 사법고시에서 떨어져 쫓기듯 서베를린으로 건너온다. 그러나 서쪽의 상황도 만만치는 않다. “점점 더 현란하게 장식되는 상품세계에서 그의 빈궁함은 자신이 여기에 단지 손님으로 왔다는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알프레드’는 어디서나 국외자였다. “소속해 있으면 소속해 있지 않은 자들보다 더 유리했”건만 그는 어디에도 속할 수 없었다. 베를린 자유대학의 법학 강좌만 해도 그랬다. “맞지도 않는 경우에 아냐,라고 말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상당 부분 옛 나치들로 구성되어 있는 이 강좌에서는 특히 그렇단다. 알프레드가 그들 무리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은 점점 더 분명해졌다.” 담배와 술을 입에 대지 않는 그는 여자 친구도 없었다. 음악과 영화, 그리고 이혼당한 어머니와 그의 카운셀러 역할을 하는 70대의 괴츨 박사가 ‘알프레드’를 버티게 했다. 그렇다고 그는 시류를 거스를 체질도 아니었다. ‘알프레드’는 사법고시에 합격해 관직에 종사한다.

『유년시절의 정체성』은 내게 감응을 준 소설이다. 그건 아마도 ‘알프레드’의 소심함과 비사교적인 면에 친연성을 느껴서일 것이다. 여기에다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기 전까지 상대적으로 동?서의 교류가 활발했던 베를린의 풍경과 독일 법학도들의 학업 생활을 잘 그렸기 때문일 것이다. 법학 강의를 묘사한 대목은 ‘하버드 대학의 머시기들’보다 훨씬 감동적이다. 발저의 장편소설 두 편을 엘리아스 카네티의 『귓속의 횃불』(이정길 옮김, 심설당, 1982), 『구제된 혀』(양혜숙 옮김, 심설당, 1982)와 겹쳐 보는 것도 흥미로울 듯하다. 발저와 카네티의 소설은 자전적이면서 소설의 시대적 배경이 비슷하다. 하지만 소설의 색채는 서로 다르고 상호 보완하는 측면이 있다. 1981년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카네티는 유대계다. 『샘솟는 분수』의 번역서 표지에는 ‘2000년 노벨상 후보작’이라는 표식이 있지만 발저의 노벨 문학상 수상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팔순을 바라보는 연배도 그러려니와 하인리히 뵐이나 귄터 그라스와 달리 그는 지나치게 독일적인 작가다. 그의 표현을 빌면, 발저는 독일 역사의 다른 모든 세기 중에서 가장 나쁜 것이 명약관화한 20세기의 독일적인 작가인 까닭이다.

마틴 발저는 파시즘에 경도된 작가가 결코 아니다. 평범한 작가는 더욱 아니다. 『어느 책 읽는 사람의 이력서』의 원제 『Vormittag eines Schriftstellers(어느 작가의 오전)』에도 들어 있는 슈리프츠텔러(Schriftsteller)는 ‘문필가’로 번역하기에는 뭔가 부족한, 함의가 풍부한 단어라고 한다. 그런데 그에게는 이 ‘글을 쓰는 자’라는 호칭도 딱 들어맞지 않는다. 독일판 『현대문학의 근본개념 사전』(솔출판사, 1996)의 ‘작가(Autor)’ 항목에서 마틴 발저는 에드가 앨런 포, 말라르메, 토마스 만, 되블린, 블로흐, 뽈 발레리, 고트프리트 벤, 파울 첼란, 브레히트, 엔첸스베르거 등과 함께 “‘문인 박사(poeta doctus)’ 또는 학식 있는 작가라는 전통의 연장선에 있”는 다양한 작가군의 일원으로 소개된다. 발저는 카프카의 영향을 크게 입었다고도 하는데 「도망치는 말」에서 난데없이 커다란 메뚜기가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설정이 이와 무관치 않은 걸까.

독자를 멈칫거리게 하는 번역에도 불구하고 『어느 책 읽는 사람의 이력서』에 수록된 에세이 열 편은 마틴 발저의 ‘문인 박사’로서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그런데 남은 한 편 「그는 만인을 위해서 왔다」는 수준이 좀 떨어진다. 학식 있는 작가가 스포츠 비평을 시도한 것 자체는 고무적이나 프로 테니스를 보는 발저의 안목은 수준 이하다. 당시 세계 테니스계를 주름잡은 독일, 남녀 보리스 베커와 슈테피 그라프에게 흠뻑 빠져서일까. 스테판 에드베리, 피트 샘프라스, 이반 렌들 같은 다른 나라 선수를 보는 눈은 말할 것도 없고, 발저는 자국 선수인 미하일 슈티히에게도 편견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더욱 심한 것은 다음 문장이다. “스테피 그라프와 비교하면 모니카 셀레스는 스포츠 산업계가 철저하게 계산한 품목처럼 보였다.” 체코 태생의 셀레스가 독일에서 열린 투어 경기에서 관중의 피습을 받은 이후 급격한 내리막길로 접어들자 마틴 발저는 분명 자신의 생각을 고쳐먹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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