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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역사가’ 로버트 단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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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혁명』(길, 2003)은 역사학자 로버트 단턴(1939~ )의 두 번째 한글판이다. 우리 독서계에서, 특히 책을 다룬 책을 좋아하는 독자들 사이에서, 단턴이 확보하고 있는 지명도에 비하면 그의 책이 두 권밖에 번역되지 않았다는 건 좀 의외다.

『책과 혁명』(길, 2003)은 역사학자 로버트 단턴(1939~ )의 두 번째 한글판이다. 우리 독서계에서, 특히 책을 다룬 책을 좋아하는 독자들 사이에서, 단턴이 확보하고 있는 지명도에 비하면 그의 책이 두 권밖에 번역되지 않았다는 건 좀 의외다. 아니, 그럴 수 있다. 단턴은 『고양이 대학살』(문학과지성사, 1996)만으로 이미 우리 독서계를 평정했기 때문이다. 번역 출간 9년째에 접어든 이 책은 10쇄를 찍었다. 날로 위축되고 있는 인문서 시장의 사정을 감안할 때 소리소문 없는 대단한 스테디셀러 행진이다.

굳이 두 권에 대한 독서 만족도를 발설하자면, 『책과 혁명』이 더 재미있었다. 그렇다고 『고양이 대학살』이 재미가 없었다는 말은 아니다. 이 책도 아주 재밌다. 다만 『책과 혁명』이 좀더 재미있었다는 뜻이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아마도 『고양이 대학살』이 8년 앞서 번역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책과 혁명』을 먼저 읽었다는 점이 크게 작용한 듯싶다. 9년 전의 번역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고양이 대학살』의 번역문은 왠지 딱딱하게 느껴졌다. 

또한, 『고양이 대학살』이 연작 논문집의 성격을 지닌 데 비해 『책과 혁명』은 단일한 주제를 다룬 묵직한 연구서라는 점도 무시 못할 요소다. 이 책을 통해 비로소 ‘책의 역사가’로서 단턴의 확고한 위치와 명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책과 혁명』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3부작 중 한 권이다. 이에 대한 단턴의 설명을 직접 들어보자.

“이 책은 [짝을 이루는 『비밀문학의 전집』(The Corpus of Clandestine Literature)과 함께] 3부작의 두 번째 작품이 된다. 첫 번째 작품은 디드로의 『백과사전』(Encyclopedie) 출판에 관한 역사였으며, 세 번째는 출판과 서적 판매 전반에 관한 연구가 될 것이다.”

『고양이 대학살』의 옮긴이 서문에서 조한욱 교수는 “이 책은 1984년 발간된 이래 극찬을 받았던 것은 물론 역사 서술에 있어서 방법론적인 논쟁까지 야기시켰다”고 했는데, 이러한 논란의 불씨는 단턴이 서론의 첫머리에서 표명한 책의 개요에서부터 지펴졌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18세기 프랑스의 사고 방식을 연구한다. 이 책은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했는지뿐만 아니라 어떻게 생각했는가를, 즉 어떻게 세계를 해석했고 세계에 의미를 부과하였으며 감정을 불어넣었는가를 보여주려 한다. 이 연구는 지성사라는 순탄대로를 따르지 않고 프랑스에서 ‘망탈리테의 역사’라고 알려져 있는 아직 지도에 오르지 않은 영역으로 들어간다. 이 분야는 아직 영어 이름을 받지 못하고 있지만 아마도 단순하게 문화적 역사라고 불릴 수 있을 것이다.”

원서 출간 20주년을 맞은 지금 ‘망탈리테’가 영어권에서 어떤 번역어를 얻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으나, 우리나라에서는 ‘망탈리테’의 번역을 놓고 의견이 분분하다. 주명철 교수는 『책과 혁명』의 해제와 옮긴이 주석을 통해 전문 용어를 굳이 우리말로 옮기지 않으려는 세태와 ‘망탈리테’를 ‘심성’으로 옮기는 관행에 이의를 제기하며, 적절한 번역어로 ‘정신자세’를 제안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말을 ‘심성’으로 쓰는 학자들이 많다. 그들은 일본에서 ‘心性’으로 번역한 말을 단지 우리 음으로 읽으면서 번역어를 찾았다고 말한다. 일본에서 ‘浪漫’을 ‘낭만’이라고 읽지 않듯이, ‘心性’도 ‘심성’이라고 읽지 않는다. 말의 쓰임새가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스스로 번역어를 찾으려고 노력해야 할 이유가 이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중략) 나는 ‘정신자세’라는 말이 왜 적절한지 여러 군데에서 이유를 밝혔다. 여기서 다시 한번 말하겠다. 프랑스의 일상생활에서는 이 말에 해당하는 낱말을 부정적인 뜻으로 썼지만, 사회사가들은 학술적으로 쓰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정신자세’는 대체로 부정적인 뜻으로 쓰이는 낱말이었다.”

 단턴의 역사 연구가 ‘심성사’로 번역되든, ‘정신자세’의 역사로 옮겨지든, 아니면 ‘관념의 사회사’로 불리든 단턴이 “대량 인쇄의 문화와 서적 유통의 역사가 대중의 여론을 형성함에 끼친 영향을 논증하고 있다”(조한욱)는 점은 명백하다. 그리고 『고양이 대학살』은 그런 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 책에 실린 논문 여섯 편의 주제는 사뭇 파격적이고, 주제를 구현하는 방식은 기발하기조차 하다. 게다가 논문 여섯 편은 끝말잇기놀이처럼 이어진다. 논문 여섯 편은 각기 농민의 민담, 파리의 인쇄소에서 벌어진 고양이 죽이기, 몽펠리에의 중산 계급 시민이 기록한 그 도시의 설명서, 서적 거래 담당 경찰관의 저자 감시 보고서, ‘내용 설명서’와 ‘예비 논고’ 같은 『백과전서』의 곁텍스트, 18세기 프랑스 독서가의 도서 주문 목록을 소재로 한다.

논문 여섯 편이 담긴 책에는 농민, 노동자, 부르주아 같은 다양한 계층이 등장하지만 단턴은 “전형적 사례 연구를 제시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는 “‘전형적인 농민’이나 ‘대표적인 부르주아’ 같은 것이 있다고 믿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단턴은 라로셸의 상인이었던 장 랑송에 대해서는 예외적으로 대표성을 인정한다.

랑송은 한적한 시골 구석의 일상적인 삶 속에서 독서에 대해 논의한 진귀한 독자다. “나는 궁극적으로 랑송이 표본적이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것은 그가 어떠한 통계적 유형에 부합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정확하게 루소의 글 속에서 말하고 있는 ‘타인’이었기 때문이다.”

「빨간 모자 소녀」를 중심으로 18세기 프랑스 농민의 민담을 분석한 글은 세상(또는 역사)은 살벌하고 냉혹하다는 인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하다. 「빨간 모자 소녀」를 역사적 문서로 인식하고 다시 읽어야 하는 까닭에서 그런 느낌은 최고조에 이른다.

“근세초 프랑스의 농민들은 계모와 고아의 세계, 비정하고 끝없는 노동의 세계, 거칠자 동시에 제어된 잔인한 감정의 세계에 살고 있었다. 그 이후에 인간의 조건은 너무도 변화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그 삶이 야비하고 잔인하고 단명하였던 사람들에게 그 세계가 어떻게 보였는지를 상상하기는 어렵다.”

물론, 당시의 프랑스 농민들은 「빨간 모자 소녀」의 도움이 없이도 삶이 잔인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고 한다. 프랑스 민담의 쓸모는 설교를 하거나 교훈을 이끌어내지 않고서도 세상의 모짊과 험함을 입증한 것에 있다. 민담은 다음과 같은 특수한 세계관을 전달하는 매개체였다.

“그것은 세상은 고되며, 동료 이웃의 이타심에 대해 어떤 환상도 지니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며, 주위에서 얻어낼 수 있는 작은 것이나마 지키기 위해서는 명석한 두뇌와 재빠른 기지가 요구된다는 것이며, 도덕적인 훌륭함은 어느 곳에도 쓸모가 없다는 것이다.”

앞에서 『책과 혁명』이 단일한 주제를 다뤘다고 썼다. 하지만 이 책의 내용이 그리 단순하진 않다. 단턴의 표현을 따르면, “이 책의 주제는 너무 범위가 넓어서 한 권에서 다루기는 어렵다.” 이 책은 ‘프랑스 혁명 이전의 금서 베스트셀러’를 다룬다. 언뜻 봐서도 포괄적이고 만만찮은 주제다. 단턴은 18세기 프랑스의 금서 베스트셀러에 주목하는 이유로 다음 두 가지를 든다.

첫째, 인문과학의 새 분야인 책의 역사에 대한 탐구가 문학과 문화사 전반에 대해 좀더 넓은 안목을 마련해줄 수 있어서다. 독자의 책 입수 경위와 제한적이나마 수용 양상을 파악함으로써 문학을 전반적인 문화체계의 일부로 연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단턴은 “유명한 저자가 쓴 위대한 책에 대한 선입관을 버려야 한다”고 조언한다.

둘째, 서적의 역사가 어떻게 의사소통의 역사라는 영역으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주는지 보여주고 싶어서다.

진부한 표현을 하자면, 이러한 단턴의 의중이 얼마나 제대로 구현되었는지 판단하는 것은 오롯이 독자의 몫이다. 나는 독자들이, 특히 책의 역사와 책에 관한 책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꼭, 단턴의 번역서 두 권을 읽기를 바란다. 먼저 읽은 사람으로서 두 권을 읽는 순서에 대해 조언을 드린다면, 『고양이 대학살』부터 읽는 걸 권하고 싶다.

책?출판?독서에 관한 해박한 지식과 풍부한 해석 이외에 단턴의 책이 전하는 강한 메시지는 대충 이런 것 같다. 다른 사람의 생각은 내 생각과 다르다. 과거의 삶의 방식은 오늘의 삶의 방식과 다르다. 그러니까 내 생각으로 남의 생각을 넘겨짚지 말아야 하고, 오늘의 잣대로 과거를 재단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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