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lly What do you want?
조류독감 사태, 광우병 파동과 헬레나 노르베리-호지의 책들
노르베리-호지는 산업화된 농업에서 우선적으로 고려되는 몇 가지 사항을 지적하는데 단일 재배 경작의 적응성, 운송과 처리의 용이성, 시각적인 완벽성 등이 그것이다. “산업적 농산물의 경우에는 단일 재배 경작 조건에 얼마나 잘 견디는가, 운송과 처리가 얼마나 쉬운가 하는 점이 영양가보다 더 중요하게 고려된다.”
충북 음성에서 시작된 조류독감이 전국의 닭과 오리 사육 농가를 파산 지경으로 몰아 넣은 데 이어, 미국 발 광우병 파동은 전세계적으로 쇠고기 소비를 위축시키고 있다. 신문과 방송의 뉴스는 이와 관련된 소식을 연일 보도하고 있으나, 변죽만 울릴 뿐이지 뾰족한 대응책은 없는 듯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사태는 ‘식용 동물의 대량 사육’이 지닌 근본적인 문제점이 노출된 것이기 때문이다.
닭과 오리를 사육해 가족의 생계를 꾸려 가는 농민들께는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지만, 식용 가축의 대량 사육에 의한 대량 절멸 사태는 어느 정도 예상된 일이었다. 대량 사육되는 가축은 육종 개량으로 유전적 형질이 동일한 품종이다. 따라서 한 마리가 어떤 전염성 질환에 걸리면 축사의 모든 가축에게 빠르게 병이 퍼진다. 공장식 사육 환경은 면역력을 저하시켜 거의 한 마리의 예외도 없다. 이를 막기 위해 미리 항생제를 주입하는 등 애를 써보기도 하나, 이것은 항생제에 내성을 지닌 바이러스가 나타나는 또 다른 문제점을 야기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신문과 방송은 이러한 본질적 측면에는 ‘꿀 먹은 벙어리’다. 대신, TV 뉴스의 카메라는 닭고기 소비 촉진에 나선 어느 지방자치단체의 삼계탕 점심 식사 광경을 비춰주기에 바빴다. 이럴 때마다 우리나라 공무원들 참 안쓰럽다는 생각이 든다. 이날 삼계탕 집단 급식을 한, 천 명의 공무원 중에는 체질적으로 닭고기를 꺼리는 이들도 있었을 것이고(이 숫자는 좀 적을 것이다), 그날따라 닭고기가 땡기지 않은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공무원들에게 동요의 빛이 전혀 없었다는 기자의 멘트에도 불구하고 이 숫자는 좀 많을 것이다).
우리 공무원들이 고생하는 것은 잘 알지만, 이번 조류독감 사태에서는 초기 대처에 허둥지둥해 사태의 확산의 불러왔다는 책임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고생은 고생대로 하면서 비난만 뒤집어쓰는 꼴이다. 하지만 외국에 이와 유사한 사례가 없어서 초기 대처에 미숙했다는 관련 공무원의 변명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다. 해외에 그러한 사례가 없으면 우리가 대응 방안을 만들면 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외국에도 별 뾰족한 수는 없는 듯하다. 외신으로 전해진 광우병 파동과 관련한 미국 당국의 갈팡질팡하는 대응은 그런 점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또, 이를 전하는 우리나라 TV 뉴스도 갈팡질팡하기는 마찬가지였다. 23개국이 미국산 쇠고기의 수입을 금지했다는 소식과 살코기만 잘 발라먹으면 인간 광우병에 걸린 염려가 없다는 내용이 번갈아 나온 것은, 안면 바꾸기가 장기인 TV 뉴스의 속성을 이해한다 손쳐도 바람직한 언론의 자세와는 거리가 있다. 적어도 닭?돼지?소의 다양한 부위를 갈아 만든 고기 패드를 사용하는 햄버거에 대한 위험성은 지적했어야 했다.
아무튼 신문과 방송의 종사자들이 조류독감 사태와 미국 발 광우병 파동의 근본적인 원인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알고 있으면서도 애써 외면하는 걸까, 아니면 아예 모르고 있는 걸까. 만약, 모르고 그러는 것이라면 『오래된 미래』로 유명한 헬레나 노르베리-호지의 덜 알려진 책들을 읽기를 권하고 싶다. 이 책들은 공동 저서이기는 하나 책의 논지는 그대로 노르베리-호지의 견해로 봐도 무방하다.
물론 노르베리-호지가 ‘에콜로지 및 문화를 위한 국제협회(ISEC)’의 연구 조정관 피터 고어링과 변호사이자 ISEC의 프로그램 책임자면서 자신의 남편인 존 페이지와 함께 지은 『모든 것은 땅으로부터-산업적 농업을 다시 생각한다』(시공사, 2003)는 식용 동물 대량 사육의 폐해를 직접 언급하진 않는다. 그래도 부제목이 시사하듯이, 농작물을 중심으로 한 산업적 농업의 폐해에 대한 고찰은 산업적 축산업의 문제점을 새겨볼 계기를 부여한다.
노르베리-호지는 산업화된 농업에서 우선적으로 고려되는 몇 가지 사항을 지적하는데 단일 재배 경작의 적응성, 운송과 처리의 용이성, 시각적인 완벽성 등이 그것이다. “산업적 농산물의 경우에는 단일 재배 경작 조건에 얼마나 잘 견디는가, 운송과 처리가 얼마나 쉬운가 하는 점이 영양가보다 더 중요하게 고려된다.”
농산물의 매끈한 외양이 산업화된 농업의 우선적 고려사항이 된 데에는 소비자의 책임도 크다. 유통업체의 광고와 당국의 몰상식한 규제의 물결 속에서 “사람들은 과일이나 채소가 크기, 모양, 색깔 면에서 좁은 기준에 맞아떨어져야 한다고 믿게 되었”고, 이에 따라 “소비자들은 오직 선홍색의 흠 없는 사과, ‘제대로’ 모양이 갖추어지고 결함이 없는 감자, 곧은 모양과 적당한 크기에 오렌지색이 선명한 당근만 사려고 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서구의 소비자들은 대부분 이제 농업 현실로부터 유리되어 있기 때문에,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특이한 형태나 색깔을 지닌 변종들은 널리 인정받지 못할 뿐 아니라, 사실상 농산물로 취급되지도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벌레가 있는 흙에서 자란, 이따금 벌레 먹은 흔적인 있는 농산물이 “좀더 ‘완벽해 보이는’ 산업적 농산물보다 맛도 좋고 영양도 풍부할 가능성이 높지만 실제로는 수준미달로 간주”되는 것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한편, 산업화된 농업에서는 전문화, 표준화, 집중화 같은 일반적인 산업의 원리가 그대로 관철된다. 노르베리-호지는 현대 농업에 지대한 악영향을 끼치는 산업의 세 가지 원리를 조목조목 비판한다.
우선, 전문화는 “좁은 시야”나 다름없다. 오늘날의 농업학자들은 극히 전문화된 지식만을 다루는 분야에서 일을 하는 탓에 자신의 작업이 좀더 넓은 전망 속에서 어디에 위치하는지와 자신의 연구를 응용한 결과가 장기적으로 어떤 영향을 가져올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다. 예컨대 새로운 살충제에 대한 연구는 해충의 박멸에만 초점이 모아질 뿐, 살충제가 다른 곤충에게 미치는 영향이나 살충제의 잔유 성분이 물 또는 농작물을 통해 사람에게 끼치는 영향은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문화는 농민의 발목을 붙잡기도 한다. “새로운 테크놀러지를 이용하려는 농부들은 단일 작물 생산에 집중해야 한다는 엄청난 경제적 압력을 받는다.” 일단 전문화의 추세에 휩쓸린 농부는 시장의 변동에 몹시 취약해지고 다양한 작물의 재배로 회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진다. 전문화된 농기계의 구입과 경작지의 확대에 너무 많은 투자를 했기 때문이다. 반면, 전문화된 농업 체제에서 다양한 작물을 재배하는 농민은 아무런 기술적?경제적?교육적 지원을 받지 못한다.
표준화는 “동질화를 추구하는 경향”으로 해석된다. 연구 대상을 단순화하고 표준화함으로써 현실 세계를 왜곡하는 과학적 보편 법칙의 추구가 농업에도 적용돼 농업을 획일화한다. “자연에 ‘기준’이란 없다”고 말하는 노르베리-호지는 통념과는 달리 표준화는 능률을 향상시키기는커녕 매우 비능률적인 농사 방법이라고 비판한다.
집중화는 “소농의 무력화”를 낳는다. 이제는 농민의 교육에서 생산물의 가공과 포장에 이르는 농업 과정의 모든 단계에서 중앙집권적인 정부와 기업이 주도권을 행사한다. 자유무역협정(FTA) 같은 국제 협약은 이러한 추세를 더욱 강화시켜 세계 농업 시장의 지배력을 소수의 손아귀에 집중시킨다. 그 결과 농민의 운명은 땅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이뤄지는 결정에 전적으로 좌우되고, 지역 생태계와 농촌 공동체는 쇠퇴하며, 소농은 씨가 마른다.
하지만 우리가 농업을 보는 시각에 깊이 침투한 편협한 과학적?경제적 세계관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눈앞에 드러나 있는 심각한 문제들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겨우 문제점을 인식한다 해도 일반적인 해결책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뿐이다. 또한, 진지한 해결 방안은 찬밥 대접을 받는다. “양육하고 돌보는 전통적인 방식을 부활시키려는 시도는 ‘비경제적’이고, 낭만적이고, 비실용적인 것으로 경멸당한다.”
가축 대량 사육의 문제점은 제5장 「축산:공장화된 사육장」에서 짧게 언급된다. 영국에서는 구이용 닭 5,800만 마리 가운데 절반이 10만 마리 이상 수용하는 농장에서 집단 사육되고 있고, 미국에서 도살되는 소와 돼지의 상당수가 도살 시점에 병에 걸려 있다고 전한다. 그런데 대량 사육의 문제점을 해결할 실마리는 제10장 「과거로부터 배우기」의 다양한 작물 재배의 이점을 서술한 대목에서 찾을 수 있다.
“다양한 작물을 심는 것은 농작물 경작의 실패 위험을 완화할 수 있는 효과적인 전략이기도 하다. 하나 또는 몇 가지 작물이 해충, 병, 나쁜 기후로 인해 실패해도, 다른 작물 가운데 일부는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면, 산업화된 농업 체제에서 소비자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노르베리-호지가 인용한 미국의 작가 웬델 베리의 ‘책임 있게 먹는 방법’은 좋은 참고가 된다. 그 몇 가지를 옮겨본다.
“가능한 한 농산물 생산에 참여하라.”
“구매하는 식품의 원산지를 확인하고, 집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서 생산된 농산물을 구입하라.”
“가능하다면 자신의 지역에서 채소나 과일을 재배하는 사람과 직접 거래하라.”
『모든 것은 땅으로부터』는 “농업이 궁극적으로 우리 모두의 근본적인 기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재료로 더할 나위가 없지만 아쉬움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책은 생태농업의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고 있으나 이것은 그저 참고자료로 삼아야지 우리 현실에 그대로 적용해서는 곤란하다.
또한, 번역이 매끄러운 편이 아니다. 특히, GMO를 유전자 조작 농산물이 아니라 유전자 변형 유기물로 옮긴 것은 유감이다. 이 책의 논지로 봐서는 유전자 변형보다는 유전자 조작이 더 합당한 표현이다. 생물공학을 다룬 제8장에서는 유전자 조작이라는 표현이 자주 나오는 것을 봤을 때 번역자가 절충적 입장을 취한 것 같다. 이 책의 번역자가 옮긴 책을 여러 권 읽었는데 이 책의 번역 만족도가 가장 떨어진다.
헬레나 노르베리-호지와 ISEC가 함께 지은 『허울뿐인 세계화』(따님, 2000)는 농업의 산업화를 부추기는 세력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담고 있다. 이 책의 원제는 Small is Beautiful, Big is Subsidised다. ‘작은 것이 아름답고, 큰 것은 망한다’로 직역할 수 있는데 앞의 구절은 슈마허의 책 제목으로도 익히 알려져 있다.
뒤의 구절은 ‘큰 것은 망한다’는 뜻 외에 ‘큰 것은 보조금을 받는다’는 의미도 갖는다. 노르베리-호지는 세계화를 주도하는 대기업은 정부의 보조금 혜택을 크게 입고 있다고 지적한다. 아울러 대량생산된 것이 값싸고 효율적이며 더 좋게 마련이라는 ‘규모의 효율성’은 하나의 신화일 뿐이라고 지적한다.
이 책에는 우리의 상식을 깨는 내용이 가득하다. 미국 식품의약국(FDA)과 환경보호청(EPA)의 인증마크는 소비자에게 진정제나 마취제 역할을 한다는 것도 그 중 하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FDA와 EPA의 관료들과 몬산토 같은 농업관련 대기업의 중역들은 ‘회전문’을 통해 자리바꿈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자가 이 책을 통해 새롭게 안 가장 충격적인 내용은 미국 동부의 대도시를 이어주는 전차 네트워크가 자동차관련 협회에 의해 무자비하게 파괴되었다는 사실이다.
“1920년대 중반부터 제너럴 모터스(GM), 캘리포니아 스탠더드 오일, 파이어스톤 타이어 등이 주도하는 자동차관련 기업협회가 이러한 전차노선을 사들여 계획적으로 파괴했다. 1946년에 이르러 이들 기업의 간판회사인 내셔널 시티라인은 80개가 넘는 도시의 대중교통체계를 장악했다. 그리고 이것들의 질을 저하시키는 행위가 계획적으로 자행되었다. 운행 횟수를 줄이다가 아예 중단시켰다. 선로는 제거되었고 전차는 불태워졌다.”
『오래된 미래-라다크로부터 배운다』(녹색평론사, 1996(초판); 2001(개정증보판))는 노르베리-호지의 대표저서다. 또한 이 책은 우리나라에 번역된 환경도서 가운데 가장 좋은 평가를 받았고 가장 많이 팔린 책이기도 하다. 이 책은 47개 국어로 번역되었는데 한국어판의 호응은 그 중에서도 꽤 열띤 편이라고 한다. 『오래된 미래』는 노르베리-호지의 티벳 라다크 견문록이다. 이 책은 스웨덴 출신의 언어학자인 노르베리-호지는 학술조사차 라다크를 찾았다가 눌러 앉아 16년간 겪은 현지체험이 바탕을 이룬다.
‘라다크로부터 배운다’는 부제가 말해 주듯이, 이 책은 라다크의 삶의 방식을 우리의 ‘오래된 미래’의 삶의 양식으로 여긴다. “내가 미국이나 영국에서 강의를 할 때, 라다크 사람들의 미소 띤 얼굴과 자족한 표정을 본 서구인들은 도대체 진보가 무엇인지 재평가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지나친 것은 모자란 것만 못하다. 전 세계의 모든 곳이 라다크가 될 수는 없다. 더구나 우리는 한두 세대 전의 기억만 되살려도 우리가 바로 라다크라는 평범한 사실을 깨우칠수 있다. 아무튼 만화로 만들어진 어린이를 위한 『오래된 미래』인 『라다크 소년 뉴욕에 가다』(녹색평론사, 2003)의 내용은 그 취지는 십분 이해해도 과유불급(過猶不及)이다.
만화에 나타난 뉴욕과 라다크를 악과 선으로 나누는 이분법은 예전의 이상주의자들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기계적인 도식으로 대비한 것을 떠올리게 한다. 또, 이런 식의 도식적인 비교가 어려서부터 휴대전화와 자가용 승용차를 당연시하는 우리의 어린이들에게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지도 의문이다.
2003년 12월 노르베리-호지는 우리나라를 찾아 독자, 환경운동가 등과 만남을 가졌다. 12월 10일 저녁 서강대 성이냐시오관 강당에서 열린 강연회에는 많은 청중이 모여 우리나라에서 그녀의 인기(?)를 실감하게 했다. 그런데 노르베리-호지의 강연 내용은 환경과 생태 문제에 어느 정도 관심있는 이에게는 상식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그녀의 강연을 들으면서 이 정도의 내용을 꼭 외국인 연사를 초청해 들어야 하는가, 하는 회의가 일기도 했다. 그래도 두 가지 점은 인상적이었다. 하나는 포테이토칩은 먹을 수 있지만 컴퓨터칩은 못 먹는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청중을 향해 던진 다음과 같은 화두다. Really What do you want?(당신이 진짜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강연회가 열린 건물의 계단을 내려오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노르베리-호지가 라다크에서 깨달음을 얻은 주된 원인은 뭘까? 선진국 스웨덴 태생이어설까? 언어학을 전공해서일까? 여자이기 때문일까? 사람됨이 훌륭해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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